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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 플랫폼을 표방했던 얼룩소는 2021년 9월 창간해서 지난해 9월 파산했다. 이재웅(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이 투자하고 정혜승(전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과 천관율(전 시사인 기자) 등이 참여했다. 한국의 척박한 미디어 스타트업 환경에서 얼룩소의 실험은 비록 실패했더라도 의미가 크다.

언더스코어가 얼룩소 3년 동안 35만 건의 게시물과 이용자 4만여 명의 활동 로그 265만 건을 수집해서 분석했다.

이게 왜 중요한가.

  • 3년 동안 100억 원 이상을 쏟아부었는데도 망했다.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검을 할 필요가 있다.
  •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공론장을 만들고 키우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아직 풀리지 않는 질문이 남아있다.

“‘글값’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제안.

  • 천관율이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 “우리 주위에 많은 후원 광고를 떠올려 보자. 후원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시하고, 그 이야기에 감화된 사람들이 돈을 내도록 설득한다. 사람들을 감화시키기도 어렵고, 감화된 사람이 돈을 내도록 만들기는 또 어렵다.”
  • “얼룩소가 만드는 글 시장은 이 두 문제를 하나로 줄여준다. 당신의 이야기가 사람들을 감화시켰는가? 그러면 그건 차별화된 콘텐츠다. 이제 돈을 내라고 한 번 더 설득할 필요가 없다. 그 자체로 정당한 보상을 창출한다. 그걸 당신이 원하는 변화에 쓰면 된다.”

데이터로 보는 얼룩소의 3년.

  • 언더스코어가 확인한 데이터는 다음과 같다.
  • 얼룩소는 2022년 1월 오픈한 뒤 2월부터 글을 작성한 이용자들에게 현금 포인트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랄 만한 포인트를 받았다는 인증샷이 쏟아졌고 내로라하는 글쟁이들이 얼룩소로 모이기 시작했다.
  • 데이터를 보면 3월 들어 게시물이 크게 늘었는데 4월부터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월간 활성 이용자 수도 한 달만에 피크를 찍고 빠르게 줄었다.
  • 아마도 보상(포인트)이 기대보다 크지 않았거나 일부에게 집중된다는 불만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짜로 쓰던 글이라면 1만 원만 받아도 기분이 좋겠지만 다른 누군가가 300만 원을 받았다는 걸 알고 나면 열정이 식기 마련이다. “나도 언젠가 3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는 크지 않았다.
  • 2022년 11월에는 콘텐츠 생산자를 뽑아 1주일에 최소 100만 원을 보장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걸었지만 그때는 이미 플랫폼으로서의 활력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참여 기반의 콘텐츠 플랫폼이 작동하지 않으니 전문 필진을 키워 퀄리티를 높이겠다는 새로운 시도였지만 역시 잘 안 됐다.
  •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는 건 ‘글값’을 제대로 지불했지만 이용자는 늘지 않았고 오히려 꾸준히 줄었다는 사실이다.
  • 11월부터 ‘좋아요’가 두 배 이상 늘었지만 게시물 작성과 댓글은 반등하지 않았다.

얼룩소의 3단계 실험.

  • 1단계: 글을 쓰면 돈을 준다고 했다. 모처럼 좋은 글이 쏟아졌지만 공론장에 불이 붙지 않았다.
  • 2단계: 필진으로 참여하면 돈을 준다고 했다. ‘글값’을 올렸고 좋은 글도 늘었지만 사람들은 크게 열광하지 않았다.
  • 3단계: 구독형 서비스로 전환했다. 비용을 지불하고 외신 큐레이션도 늘렸다. 좋은 글이 더 늘었지만 독자들은 계속 줄었다.

보상의 역설.

  • 강태영(언더스코어 대표)은 “역설적이게도 콘텐츠에 대한 보상이 오히려 운영진의 의도와 유저들의 기대 간의 간극을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 ‘생활/사건사고’ 토픽의 글이 론칭 초기에는 70%까지 치솟았다가 30%까지 줄었다. 메인 페이지에는 사회 현안을 다룬 글이 떠 있었지만 실제로 이용자들이 작성하는 글 대부분은 연성 콘텐츠였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보상이 줄어들면서 참여도 줄었다.
  • 실제로 네이버 블로그에서 얼룩소를 검색하면 ‘부업’과 ‘포인트’를 주제로 쓴 글이 46%나 됐다. 공론장에 관심 없는 포인트 알바들이 대거 유입됐다는 이야기다.
  • 얼룩소 에디터들이 뽑은 ‘얼룩소 트렌드’에서 ‘생활/사건사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였다.

‘글값’의 동기 부여.

  • ‘글값’의 동기 부여는 데이터로 확인되지 않았다.
  • 언더스코어의 분석에 따르면 ‘글값’을 받은 사람이 더 많이 쓴 것도 아니고 ‘글값’을 받지 못한 사람이 특별히 덜 쓰는 것도 아니었다.
  • 다만 2024년 5월, ‘글값’을 주지 않기로 한 뒤에는 게시물과 댓글, ‘좋아요’가 모두 급감했다.

얼룩소는 왜 실패했나.

  • 얼룩소의 질문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경제적 보상으로 양질의 콘텐츠를 끌어낼 수 있는가.”
  • 언더스코어는 이렇게 분석했다. “얼룩소가 뿌린 ‘글값’이 오히려 얼룩소의 정체성을 망가뜨렸다.”
  • ‘글값’을 제대로 지불하면 좋은 글이 늘어날 거라고 기대했고 실제로 좋은 글도 있었겠지만 포인트를 노린 글이 대부분이었다. 전문 필진을 확보하려는 노력도 잘 안 됐다.

다르게 읽기: 지표를 어디에 둘 것인가.

  • 제이콥 닐슨(닐슨노만 창업자)의 참여-불평등 법칙에 따르면 커뮤니티에서는 어차피 1%가 대부분의 활동을 하고 9%가 약간의 기여를 하고 나머지 90%는 뜨내기들이다.
  • 단순히 얼룩소에 ‘생활/사건사고’ 토픽의 비중이 많아서 문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포인트 알바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 그런 것이고 얼룩소 기획자들도 충분히 감안했던 변수였을 것이다.
  • 확인해야 할 가설은 첫째, ‘글값’이 좋은 글을 만들었는가, 둘째, 그 좋은 글이 공론장의 떡밥으로 작동했는가다.
  • 애초에 좋은 글의 기준부터 모호하지만 분명한 건 ‘글값’을 중단했더니 글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낌없이 ‘글값’을 쏟아부었지만 열광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공론장의 조건.

  • 공론장은 그동안 없었기 때문에 갑자기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열광하거나 분노하는 지점이 있고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을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 안타깝게도 얼룩소에는 편집 전략이 없었다. 애초에 언론이 아니라 공론장을 표방했을 때 감수해야 할 한계였다. 의제를 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나열했고 이슈를 주도하기에도 약했다. 무엇보다도 전성기 시절 다음 아고라와 비교하기에는 콘텐츠가 턱없이 부족했다.
  • 강태영의 분석에 따르면 애초에 얼룩소의 ‘글값’이 잘못된 인센티브로 작동했을 수도 있다. 세상에 좋은 글이 넘쳐나는데 굳이 ‘글값’ 경쟁을 하는 플랫폼에 와서 글을 읽겠다는 독자들이 얼마나 될까. 좋은 글을 확보하는 전략이었지만 정작 독자에 대한 배려가 빠져 있었다.
  • 얼룩소의 실패는 두 가지 질문을 남긴다.
  • 첫째, ‘글값’을 주면 글을 쓰겠다는 사람들이 모이겠지만 애초에 무슨 글을 쓸 것인지 전략이 있어야 했다.
  • 둘째, 유효 독자를 확보하지 못하는 매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공론장의 실험도 마찬가지다. 글쓰는 사람에게는 금전적 보상 만큼이나 독자와 영향력이 필요하다. 얼룩소는 좋은 글이 있으면 독자가 따라올 거라는 가설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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