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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이재명 페이스북. 2022년 8월 14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유지하기로 결단하고, 민주당 외부의 다른 여러 세력을 참가시켜 통합형 비례 정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안타깝지만 여당의 위성정당을 막을 방법은 없다”면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 감각으로,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을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세 가지 옵션이 있었다.


  • A안. 2016년까지의 비례대표 선출 방식인 병립형으로 회귀한다. (국민의힘의 동의가 필요하다.)
  • B안. 현행 제도를 유지하되, 따로 비례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는다. (이탄희 의원이 제안한 위성정당 금지법을 통과시킬 수도 있다.)
  • C안. 현행 제도를 유지하되, 지난 총선 때처럼 다시 위성정당을 만든다.

세 가지 옵션의 이해득실을 따져보자.


  • A(병립형 회귀)는 욕은 얻어듣겠지만, 가장 깔끔하게 비례대표 선거제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다만 여기에는 적절한 명분과 작업이 필요하다.
  • B(현행+위성정당 금지법)는 의석을 좀 잃겠지만, 그걸 명분 삼아서 국민의힘을 공격할 수 있고 다음 대선 등에서 명분상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 C(다시 위성정당)는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이다. 잃는 것도 얻는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정치개혁 입법이라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얼마나 현실 정치에서 구현이 불가능한지 보여주는 반면교사인 데다, 민주당이 주도적으로 제안해 국힘을 질질 끌고 갔던 법안을 스스로 해킹해서 형해화한다는 점에서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 약간의 실질을 얻는 거 같지만 대의와 명분 모두 다 잃는 너무나 이재명스러운 방식이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


  • 이게 이재명이 말한 상인의 현실 감각이다.
  • B(현행+위성정당 금지법)는 일부 의석을 잃겠지만 민주당 주도로 발의한 준연동제가 국민의힘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의 표준이 되도록 강제할 수 있다. 2020년 선택이 옳았다고 주장하려면 이 길밖에 없다.
  • A(병립형 회귀)는 정치개혁을 방기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연동형 비례로 위성정당을 만드는 거나 의석수 1~2석을 받는 걸로 정치 브로커 또는 행동 대장 노릇을 하는 비례 위주 정당을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깔끔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힘과 협상할 여지도 없지 않다.
  •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과 연대해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으면서 선거 승리를 위해 위성정당을 만들고 원칙을 버렸다는 원죄가 있다. 그래서 뭐가 됐든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고 어느 정도 손실은 불가피하다.
  • 이런 모든 상황을 감안하면 민주당 입장에서는 A(병립형 회귀) > B(현행+위성정당 금지법) >>>> C(다시 위성정당) 정도의 보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장고 끝에 A와 B를 포기하고 C를 선택한 것이다.

위성정당, 네가 만들면 나도 만든다.


  • C(다시 위성정당)는 결국 실질적으로 준연동형 비례제의 형해화를 의미한다. 주요 정당이 모두 비례 위성정당을 만들고 정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비례 위성정당을 만들거나 비례 위성정당에 합류할 가능성이 크다.
  • 소선거구 제도에서 지역구 당선은 안 되더라도 유의미한 지지율을 확보한 정당에 의석을 배분하자는 취지가 완전히 사라진다.
  • 결과적으로 준연동형을 유지하면서 통합이든 아니든 위성정당을 만들겠다고 나서면 정의당을 비롯해 제3지대 정당의 몫을 빼앗게 된다. 소수의 지역구 의석 당선 가능성이 있으면서 비례를 동시에 노리는 정당 몫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의당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


  • 모두가 위성정당을 만들거나 그 위성정당에 합류하면 둘 중 어디에도 끼지 않는 정의당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된다.
  • 지난 총선 때 확인한 것처럼 민주당이 정의당 몫의 비례 의석을 가져갈 뿐만 아니라 비민주 진보 세력 정당들이 정의당에 묶일 필요 없이 민주당의 동맹 세력, 우당(友黨) 노릇만 하면 확실하게 의석을 나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이 정당을 굳이 만들어 지지고 볶을 필요가 없다는 게 준연동형+위성정당의 가장 큰 해악이다.

민주당은 무엇을 얻는가.


  • 민주당 입장에서 해볼 만한 게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민주당은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 정당과 연대해 왔는데 어느 정도 피로감이 누적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툭하면 민주당의 뒤통수를 치거나, 민주당이 꺼려하는 의제를 관철시키려고 충돌하곤 했다. 그런데 정의당 이외의 다른 진보 정당들이 진보라는 간판을 걸고 민주당의 충실한 대리인 역할을 해주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 민주당 왼쪽의 영역을 어떻게 관리해야하는 가라는 고민을 안고 있는 민주당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효용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민주당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권을 쥐고 갈 수 있다. 민주당 간판 아래 들어와 배지를 얻어가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이재명의 선택은 결국 지난 총선 때 더불어시민당과 비슷한 정당을 만들면서 동시에 정품 인증 방식으로 열린민주당 같은 유사 위성정당이 나타나는 걸 막겠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재명이 간과한 것이 있다.


  • 문제는 위성정당을 만들면 민주당이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방식으로 뽑기 어렵다는 데 있다.
  • 공천의 핵심 기구인 공천관리위원회를 민주당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기 어렵고 인재 영입이나 공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비공식적인 라인으로 개입하거나 아예 대리인을 내세워야 한다.
  • 기업으로 치면 숨겨진 계열사 또는 외주 하청 회사를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생산품(공천)의 품질은 관리가 안 되고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섭외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천금 같은 비례 의석에 높은 평판과 직능을 대표할 사람을 뽑지 못하고 당성만 강한 비공식적 권력에 충성하는 사람이 오게 될 가능성이 크다.
  • 지난 총선에서 윤미향이나 양원영, 김홍걸 같은 더불어시민당 비례의원이나 김의겸이나 최강욱 같은 열린민주당 비례의원은 정품 인증 비례 위성정당에 대거 영입될 수도 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 사실 정치개혁이란 명분을 앞세워 거대 양당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진입 장벽을 높이면서 퇴행하는 일은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개혁 의제에서 숱하게 경험했던 바다.
  • 이를테면 돈 안드는 정치를 하겠다며 정당법 등이 바뀌면서 지구당이 사라졌고 의석에 비례해 국고 보조금을 주겠다며 정당의 조직을 형해화하고, 한 번 선출직에 당선되면 계속 해당 정당의 우위가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를 만들기도 했다. 단체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면 진보 정당에 도움이 되겠지만 여전히 제약이 많고 중대선거구제 확대는 계속해서 검토만 하고 있다.
  • 한국의 정당 구조는 현직 의원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국가에 의해 보조를 받는 카르텔 정당 성격이 강해지면서 한번 특정 선거구에서 원외로 밀려난 정당은 해당 선거구에서 당선되기가 대단히 어렵다. 양당의 기득권 헤게모니, 특정 지역에서 강세인 특정 정당의 기득권만 강해질 뿐이다.
  • 이런 현실이 이른바 민주진보 진영에서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는 건 수도권에서 2014년 이후 국민의힘이 계속 밀려나면서 이 지역의 당원협의회가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원외 지구당 위원장인데 정치를 하려면 변호사나 의사 아니면 토호 세력이거나 아니면 그나마 동원할 건더기가 있는 시민단체 간부 정도가 돼야 한다. 그래도 자기 돈 쓰고 정치해야 하니 그냥 유튜브나 종편 스타가 되려고 바득바득 노력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민주-진보 빅텐트라는 환상.


  • 정치개혁이 선거법 개정으로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선거법 개정으로 소수 정당의 진입 문턱을 낮춘다거나 등등의 구호가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인지는 2004년과 2020년, 2024년의 정치개혁 어젠다가 어떻게 후퇴했는지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 내가 [이탈리아로 가는 길] (2023)에서 심도 있게 다룬 이탈리아 정치판의 경우도 사르토리 등 여러 정치학자를 배출한 정치 선진국답게 정치 문제를 선거법 개혁으로 풀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는 베를루스코니의 등장과 네오 파시스트 정당의 집권, 잘 사는 북부 제일주의 정당의 집권 여당화, 포퓰리즘 정당의 주류화이고, 결국 정치 혼란이 지속하고 있다.
  •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정당이나 정치자금 관련 법제를 건드리지 않는 선거법 개정은 결국 정당의 역학 관계의 반영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 정치를 개혁하고 싶은가.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다른 세력과 타협 가능하고 현실적으로 유지 가능한 균형을 만들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 이번 사태는 진보 진영의 정치개혁 의제가 얼마나 뜬구름 잡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는 따지고 보면 민주-진보 빅텐트에 있는 동류”라는 의식이 빚어낸, 그리고 본인들 정치 파당의 이해관계를 진보 전체의 이해관계로 포장하는 분들이 스스로 불러낸 자기 파괴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석 줄 요약.


  • 민주당의 선택은 사실상 위성정당을 현행 선거제의 표준으로 만드는 것이다. 민주당식 정치개혁의 익숙한 귀결이다.
  • 가장 큰 피해자는 정의당과 제3세력이다. 정의당이 이재명의 결단을 환영한다고 나선 건 이들이 원내 의석 몇 석에 목숨을 거는 카르텔 정당 체제의 일부가 됐다는 방증이다.
  • 선거제만 바꾸면 정치개혁이 된다는 기대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 줄 요약.


  • 한국이 달리 이탈리아로 가는 길을 걷는 게 아니다. 선거제도 바꾸는 걸 정치개혁이랍시고 추진하고 그 결과는 더 파탄적이라는 것부터 너무나도 이탈리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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