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우리는 어떤 사람을 언급할 때 직책을 붙이는 걸 당연시한다. 그냥 이름 석 자만 붙이는 건 뭔가 무례한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직책을 붙이는 것은 대단히 정치적인 문제다. 제대로 붙이면 핵심을 꿰뚫을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하지만 반대 사례도 흔하다.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과 성완종 전 의원은 같은 인물이지만 어떤 직책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성완종 게이트’는 천지 차이로 성격이 달라진다. 그런 이유로 나는 기본적으로 이름만 표기하는 걸 좋아한다.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평가받는 것이지 직책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종섭

여기 정종섭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있다. 세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직책을 붙인다면 그는 교수였고, 장관이었고, 국회의원 당선자다. 각 직책은 꽤 다른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가 장관으로 취임할 당시부터 퇴임할 때까지 행정자치부 출입기자였던 덕분에 그를 나름대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부터 나는 정종섭이라는 인물을 생각할 때면 항상 머리에 떠오르는 낱말이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산림(山林)이고 다른 하나는 곡학아세(曲學阿世)다. 역사용어와 고사성어가 떠오른 건 아마도 그가 아버지한테서 한학을 배웠고 개인전을 열 정도로 서예에 조예가 깊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정종섭 교수

사진 출처: 교수신문
사진 출처: 교수신문

정종섭 ‘교수’는 서울대 법학과에서 헌법을 가르쳤다. 지방재정이나 지방행정에 문외한이다. 행자부에선 전례가 없는 장관 이력이었다.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을 하기 위해 정종섭을 장관으로 임명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다.

실명을 밝힐 수 없는 한 로스쿨 교수가 정종섭 ‘교수’를 평한 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헌법학을 전공한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참여정부까진 ‘진보’인 양 하고 다니더니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마자 ‘보수’로 확 돌아섰다. 한자리 해보려고 이리저리 바깥으로 다닌다. 자리 욕심이 대단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종섭 ‘교수’는 한때는 책임총리제, 특별검사제, 재정법률주의 등을 주창했던 분이다.

정종섭 장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 안전행정부는 행정자치부와 인사혁신처, 국민안전처로 쪼개졌다. 정종섭은 마지막 안전행정부 장관이자 첫 행정자치부 장관이었다.

인사청문회에서 그가 1985년 군법무관으로 입대해 군 복무를 하면서 대학원을 다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얄궂게도 그는 참여정부 당시 인사청문회 도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2014년 여름쯤 만난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 교수를 얼마 전에 만났는데 ‘현재 인사청문회 제도가 너무 엄격하다. 제도 만드는데 참여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는 취지로 말했다.”

어쨌든 그는 장관이 됐다. 하급직원들 사이에선 인기가 괜찮았다. 하급직들 신경을 많이 써주려 했다. 회의를 줄여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줬다. 실·국장들 브리핑 내용을 이해하는 능력도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한국 권력층에게 만연한 고질병인 ‘우리[footnote]’우리’라 쓰고 ‘경상도’라 읽는다.[/footnote]가 남이가’에서 벗어나 지역균형 인사에 노력한 대목은 평가할 만 했다.

경주 명문가 출신인 그는 서울대 재학시절 친하게 지낸 동기 덕분에 그 여동생과 결혼했다. 그 덕에 영호남 결합이 됐다. 그는 고시공부를 고창에 있는 문수사라는 절에서 했고 첫 검사 부임지는 군산이었다.

정종섭 장관 시절의 파행들

내부 운영과 비교하면 행자부가 추진한 정책은 대체로 청와대가 제시한 방침을 구현하기 위한 무리수의 연속이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은 대체로 지방자치단체에 갑질하는 걸 기본방침으로 하는데 행자부는 지자체 팔 비틀기의 선봉이 돼 버렸다. 재정을 지방에 떠넘기는 행태는 행자부가 왜 필요한지 존재 이유까지도 생각하게 했다.

지방공기업 사업이 민간경제를 침해하고 위축시킨다며 장난감도서관을 민간에 넘기라고 했던 건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행자부는 공립 장난감도서관이 180개가 넘는다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장난감 대여업’을 문제 삼았다. 경남 진주시가 운영하는 장난감도서관이 행자부 장관 표창을 받은지 반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정종섭 장관의 신중치 못한 발언들

게다가 그는 대외적으로는 여러 차례 구설에 올랐다. 국회에서 신중하지 못한 발언을 하는 바람에 주민세 인상 법 개정이 물 건너간 것은 작은 사례일 뿐이다.[footnote]참고로, 나는 주민세 인상을 지지한다.[/footnote] 대표작은 2015년 8월 새누리당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만찬 건배사로 ‘총선 필승’을 외친 게 아닐까 싶다. 당시 야당에선 정종섭 ‘장관’ 해임결의안까지 추진했을 정도로 후폭풍이 상당했다.[footnote]그 후로 한동안 ‘총선 필승’은 내 단골 건배사가 됐다. 주어는 없다.[/footnote]

당시 정종섭 ‘장관’은 새누리당 연찬회에 초대받지도 않았다. 제 발로 찾아갔다. 그것도 비서실에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며 수행비서 없이 혼자서 찾아갔다고 들었다. 공식 해명은 ‘의원들이 건배사를 시켜서 당황해서…’였지만 다른 증언도 있다. ‘뒤풀이 자리에서 지역구별로 있는 자리에 자기가 먼저 와서는 건배사를 제창했다.’ 그는 파문이 확산되고 며칠이 더 지난 금요일(28일) 아침 8시쯤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어 “11시에 기자회견 준비해라”고 시켰다.

국회의원 출마하지 않겠다던 정종섭 장관

그날 ‘긴급’ 기자회견에서 나는 ‘국회의원 출마 의지’를 재차 물었다. 그는 그때 분명히 대답했다. 자신은 국회의원 출마할 생각 없다고. 물론 그 말을 믿는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종섭 ‘장관’은 2015년 11월 8일 장관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다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발전과 박근혜 정부 성공을 위해 할 수 있는 걸 다하겠다고 했다. 내년도 예산안 문제로 한참 바쁜 행자부는 말그대로 ‘멘붕’에 빠졌다. 총선 출마를 묻는 질문이 재차 나왔다. 그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사진 출처: 정종섭 블로그
사진 출처: 정종섭 블로그

그 말대로라면 그는 꽤 성급하게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었다. 류성걸을 경선에서 제치고 대구 동구 갑 선거구에서 공천을 받았다. 탈당 후 무소속 출마한 류성걸을 재차 꺾고 국회의원이 됐다. 그는 류성걸과 경북고 동기동창이다. 그는 이제 자타공인 ‘진실한 친박’ 이른바 ‘진박’이다.

조선시대 산림과 정종섭 국회의원 당선자

정종섭은 아마 자신을 조선시대 ‘산림'(山林) 같은 존재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본다. 정치권은 날이면 날마다 욕만 먹는 존재이고, 정부 관료들은 무능하니 이런 때 국가를 운영할 역량은 오히려 자신 같은 이에게 더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산림이란 학식과 덕은 높지만, 과거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해 존경을 받는 선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산림은 특히 조선 후기 공론을 좌지우지하면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검소하게 살자’, ‘공부 열심히 하자’, ‘바르게 살자’는 평론가 정치로 경세치용(經世致用)이 될 턱이 없다. 대표적 산림인 김집이 대동법 시행을 반대하며 김육과 치열한 논쟁을 벌인 건 유명한 일화다.

조선시대 산림은 재야에서 고고한 척이라도 했지만, 정종섭 ‘의원’은 친박 돌격대로 마음을 굳힌 듯하다. 그는 24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청문회 활성화를 위한 국회법 개정안이 “의회 독재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위헌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한겨레 보도를 보면 그는 2005년 4월 국회 공청회에선 “국정운영 중심은 대통령에서 국회로 전환돼야 한다”며 상시 청문회를 지지했다. 그는 교수 시절 ‘헌법학 원론’에서는 정부 시행령에 대한 국회 통제권 보장이 필요하다고 썼으면서도 지난해 6월 국회법 개정안 논란에선 침묵을 지켰다.

곡학아세

내 눈에 비친 정종섭은 산림에서 발탁된 선비가 아니다. 그는 사기(史記)에 나오는, “학문을 굽혀 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한다”는 ‘곡학아세’의 전형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정치인의 기본 자질 중 ‘권력의지’ 하나만큼은 확실한 분인 듯싶다. 그래도 그렇지, 박근혜 대통령을 ‘예수’에 비유한 걸 보면 이 분 유머 감각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글은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