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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 가림막 없는 기표대는 비밀투표 원칙을 침해하는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014년 6.4 지방선거를 맞아 흔히 기표소라 부르던 천 가림막이 달린 설비를 천 가림막이 없고 좀 더 높이가 낮은 ‘기표대’로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라는 소식이 알려졌다. 여기에 많은 이들이 이에 반대하고 있다. 주된 이유는 천으로 된 가림막이 없어진다면 누군가 나의 선택을 지켜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비밀투표권의 침해 가능성인 것으로 보인다.

기존 밀폐형 기표대(기표소)와 신형 개방형 기표대 (자료 제공: 중앙선관위)

또한 이 교체작업에 대략 34억 원 정도의 예산이 소모된다는 내용이 함께 알려져, 예산낭비가 아니냐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이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지점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비밀투표의 원칙에 관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기표소 내부의 촬영행위이다.

비밀투표의 원칙

전국 규모의 투표 관리에서 업무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비밀투표의 원칙이다. 만약 비밀투표의 원칙을 포기한다고 가정해보자. 투표 관리에 관한 거의 모든 문제가 즉시 사라지게 된다.

즉, 내 신분을 입증하고 나는 어떤 후보자를 선택했는가를 공개적으로 기록하게 되면 부정투표 시비는 원천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누구나 어떤 유권자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언제든지 그 유권자들을 ‘계산’할 수 있게 된다면, 날을 정해놓고 투표할 필요조차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비밀투표의 원칙은 투표 관리 업무의 편리성을 위해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원칙이다. 투표라는 것이 권력을 선출하는 행위이며, 선출된 권력은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유권자들에게 얼마든지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비밀투표의 원칙을 포기해 버린다면, 유권자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위협적인 후보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진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업무 편의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비밀투표 원칙

따라서 진정으로 사회 공동체를 위해 바람직한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는 유권자의 선택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서는 비밀투표권 보장은 필수적인 일이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투표 관리 업무는 상당히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투표용지에 붙어 있는 일련번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유권자들은 투표소에 가서 본인의 신분을 확인한 후, 투표용지를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권자에게 들려주는 투표용지의 한쪽 모서리에 있는 작은 삼각형에 일련번호를 쓰고 잘라서 보관한다. 이는 투표용지가 몇 장이나 배부되었는가에 대한 증거이며, 전체 투표수를 관리하는 중요한 자료다.

하지만 유권자가 받게 되는 투표용지에는 그 일련번호가 적혀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비밀투표의 원칙을 지키기 위함인 것이다. 만약 투표용지에도 일련번호가 적혀 있다면, 해당 유권자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그 일련번호를 추적해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비밀투표의 원칙이 깨지는 것이다.

유권자 투표용지에는 없는 일련번호

문제는 유권자 투표용지에 일련번호가 안 적혀 있다는 이유로 인해 유권자가 그 투표용지를 어떻게 처리하더라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현장에서는 투표용지를 배부받은 유권자가 기표소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투표함에 그 투표지를 집어넣는 척하면서 넣지 않고 그대로 가져가 버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일종의 기념품으로 간주해서 가져가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때문에 투표소에서는 혼란이 발생한다. 투표를 마친 뒤 투표함을 개표소로 보내 열어보고 집계하면, 투표소에서 기록된 투표용지 발급 개수와 개표소에서 나온 투표용지의 집계 수가 맞지 않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도 누가 투표용지를 가지고 갔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또 어떤 경우에는 미리 가지고 간 다른 종이를 투표함에 넣는 경우도 있다. 이 또한 약간의 소동을 유발한다. 투표함 속에서 엉뚱한 투표용지가 나온다거나, 전혀 관계없는 종이가 나오게 되면 개표 관리자들은 긴장하기 마련이다. 만약 그 종이가 투표용지와 유사하게 인쇄된, 쉽게 말해 “위조 투표용지”라면 사건은 더 복잡해진다. 발급된 투표용지보다 더 많은 투표지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발급된 투표용지보다 더 많은 투표지가 나오는 경우는 종종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위에서 얘기한 위조 투표용지의 문제가 아니고, 투표소 관리 사무원이 발급된 투표용지를 잘못 계산한 경우가 더 일반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1001번부터 1994번까지 일련번호가 기록되었다면 1994-1001+1 을 해야 발급 수가 나오는데, 사무원들이 종종 +1 을 빼먹는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개표소에는 투표소에서 계산한 투표수보다 한 장 더 많은 개표 수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변수들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투표용지에 일련번호를 매겨 관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중요한 비밀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가림막이 없어진 신형 기표대는 과연 비밀투표권을 손상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 볼 수 있겠다.

신형 기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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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 기표대 (아직 정확한 모습은 공개하고 있지 않다)

기존의 기표소는 천으로 된 가림막이 쳐 있어서 그 안에서 무슨 행동을 하는지 외부에서는 전혀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비밀투표의 원칙은 충실히 지킬 수 있는 기표소인 것이다. 신형 기표대는 투표자의 상체가 노출된다. 물론 기표를 위한 공간은 일정 높이의 벽이 쳐져 있어서 기표 내용을 훔쳐보기는 쉽지 않은 구조이다.

실제로 일반적인 투표소 현장을 가보게 되면, 기표소는 해당 지역 유권자의 숫자에 맞춰 적게는 한 대나 두 대, 많게는 세 대 이상 설치가 된다. 그 기표소들은 대부분 벽을 향해 일렬로 설치되어 있기 마련이다. 신형 기표대의 경우에는 벽을 옆으로 두고 측면으로 설치되며 기표 대기자 제한선을 두어, 다음 기표자는 선 밖에서 대기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투표소 관리 사무원들은 기표대에 접근한 유권자들의 옆모습을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무원들에게는 내 선택이 노출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그런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신형 기표대 과연 비밀투표 원칙을 침해하는가

또 하나 고려할 것은 앞뒤로 있는 기표대의 다른 유권자들에게 노출되는지 여부다. 신형 기표대의 경우 유권자의 상체는 노출되지만, 일정한 높이의 벽이 있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 기표도장을 찍는가 하는 것은 노출되지 않는다. 그것을 확인하려면 바로 옆에 붙어서야 할 정도이지만, 연속으로 설치된 기표대의 간격은 그러기에는 충분히 멀고, 충분히 가려져 있다.

물론 유권자가 기표한 투표용지를 접기 전에 들어서 흔들거나 하면 노출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따지면 구형 기표소의 경우에도 기표한 투표용지를 들고 나오면서 부주의하게 행동한다면 노출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정도라면 신형 기표대가 비밀투표권을 물리적으로 침해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쉽게 동의하기 힘든 수준이다. 물론 완벽한 가림막이 있다가 없어지면서 심리적인 불안감이 증폭될 수는 있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약간의 주의만 기울인다면 자신의 선택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노출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이런 신형 기표대의 도입을 “반공개투표” 제도라며 비판하는 것은 조금 과한 것 아닐까?

예산 논란은 오해… 2007년부터 보관비 문제로 일회용

또, 예산 문제는 알려진 내용이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구형 기표소를 모두 버리고 신형 기표대로 교체하는 것에 예산을 34억이나 쓴다는 보도는 기표대의 사용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 오보이다.

선관위에서 사용하는 기표소는 신형 구형을 막론하고 모두 다 사실상 일회용이다. 가림막은 얇은 천으로 되어 있고 그 뼈대는 모두 두꺼운 종이로 제작된다. 그리고 한 번 사용하고 나면 폐기한다. 이런 식으로 운영하는 이유는 바로 ‘보관비’ 때문이다. 투표지 분류기 같은 고가의 장비라면 사용 연한이 지나가도록 계속 보관해 가며 사용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몇 년에 한 번씩 사용하는 기자재들, 그것도 전국적으로 10만 개가 넘는 물건을 보관하게 되면 제작비보다 보관비용이 더 많이 들게 된다. 기표설비는 공간은 많이 차지하지만, 제작 단가는 겨우 개당 몇만 원 수준밖에 안 되는 저렴한 장비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논란이 된 기표대 교체는 사실상 교체가 아니라, 어차피 새로 제작해야 하는 기표대를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지, 그 형태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34억 원의 예산이라는 것도 그저 보기에는 큰 돈 같지만, 전국 선거에 필요한 10만 개 이상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개당 평균 단가는 3만 원 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선관위에 확인한 결과 이번에 새로 제작하게 될 신형 기표대의 경우 일반용은 2만 8천 원, 장애인용은 4만 원 선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수준의 예산이라면, 기존의 구형 기표소를 새로 제작하더라도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예산일 뿐이며 전국 선거를 치르기 위한 정상적인 비용이라고 봐야 한다.

이 정도라면 예산 낭비라는 지적은 사실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는 판단을 내려도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개방형 기표대 장점

또 있다. 기표소가 가림막에 의해 완전히 밀폐되어 있던 것이 사라져서 개방형으로 바뀌게 되면, 유권자가 그 안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투표용지를 훼손하거나, 기표도장을 줄줄이 여러 번 찍거나 (실제로 이런 투표지는 흔하게 발견된다.) 다른 종이를 꺼내 들거나 투표용지 자체를 가방이나 호주머니에 집어넣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투표소 관리 사무원들 역시 이런 문제에 대한 실무적인 고충에서 해방된다. 사실 천으로 완전히 가려진 기표소 안에서 하는 행동을 적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인력이 충분한 것도 아니고, 사무원들 자체가 선관위 직원이 아니라 외부에서 긴급 조달된 인력들인 탓에 관련 규정에도 미숙하고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처방안도 서툴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지간한 문제가 있어도 묵인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는데, 이런 행동들이 지속한다면 엄밀한 투표 과정에 대한 관리가 이루어지기 힘들어진다.

가장 좋은 것은 그런 이상 행동들을 할 기회 자체를 주지 않는 것 아닐까? 완벽하게 가려진 공간에서의 인간의 행동과 개방된 공간에서의 인간의 행동은 사뭇 달라지기 마련이다.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지 않은 개방형 기표대에서는 정상적인 투표 행위 이외의 관찰 가능한 이상행동을 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형 기표대가 가지는 꽤 좋은 장점이 된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에서도 개방형 기표대 사용

또 이런 시도를 우리가 처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 독일, 영국, 호주, 일본 등에서는 이런 형태의 기표대를 활용하는 중이다. 물론 그 나라들은 민주주의가 성숙한 선진국이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상태이긴 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상체가 노출된 기표대에서 기표한다고 해서 그게 어떤 문제점을 유발하는지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선택 자체는 충분히 가려질 수 있는데 말이다.

개방형 기표대를 선택한 미국, 일본, 영국, 독일 등의 투표 모습

개방형 기표대를 선택한 미국, 일본, 영국, 독일 등의 투표 모습

선진국들 역시 우리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유사한 고민을 충분히 했던 것이고, 그 결과 도입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방식을 참고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별다른 문제가 있는 판단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가 지난 2012년 치러진 양대 선거 과정에서 재외국민 투표에 이미 이 신형 기표대가 아무 문제 없이 쓰인 바 있다. 이 정도면 새로운 기표대는 충분히 테스트 된 것 아닐까?

그리고 신형 기표대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맨 처음에 언급했던, 기표소 내에서의 촬영행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투표지 촬영 행위 문제

기표소 내부에서 투표용지를 촬영하는 것은 현행법상 처벌이 규정되어 있는 불법이다. 이와 관련된 사건도 있었다. (관련 기사: 슬로우뉴스, ‘투표지 촬영 금지는 과연 정당한가’)  난생 처음 투표하는 설렘에 기표소 안에서 기표하지도 않은 투표용지를 촬영했다가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건에 관한 분석 기사다. 해당 기사의 결론에 대해 완벽히 동의한다.

그 사건에 적용된 법 조항은 조금 부주의하게 만들어진 문구들이라는 점에도 동의한다. 기표소 안에서의 투표지 촬영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것은 여러 가지 허점을 유발할 수도 있다. 기표소 밖에서 찍으면 괜찮다는 말인가? 기표하지도 않은 빈 투표용지를 촬영하는 것은 도대체 왜 금지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가능하다.

해당 법 조항의 취지는 여태껏 논의했던 것과 같은 주제, 비밀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자신의 선택을 촬영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직간접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공개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는 비밀투표권을 침해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물론 기표하지 않은 투표용지는 얼마든지 촬영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기표 후의 투표지는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있게 촬영하면 안 된다. 해당 법 조항은 이런 내용을 포함하도록 개정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앞서 링크한 기사에 언급된 선관위 담당자의 해명에 의하면 기표하기 전에는 투표용지, 기표한 후에는 투표지로 용어를 달리 사용한다고 한다.)

투표지 촬영 억제력… 예전과 가장 큰 변별점 

이 문제도 역시 구형, 신형 기표대의 차이점과 관련이 있다. 구형 기표소는 가림막으로 완전히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얼마든지 투표지(기표 전의 투표용지와 구분되는 의미이다.)를 촬영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스마트폰 같은 모바일 장비들이 촬영할 때 “찰칵” 하는 소리를 내도록 강제되고 있기 때문에 소리를 들음으로써 촬영행위를 적발할 수 있었지만, 여러 대의 기표소가 설치된 와중에 소리만으로 현장에서 촬영행위를 적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다가 그런 행위를 적발하는 과정은 전체적인 투표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게 되고 투표장은 소란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형 기표대의 경우 상체가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촬영 행위 자체가 어려워진다. 비록 등 뒤이지만 사무원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을 꺼내 자신의 투표지를 촬영한다는 것은, 그 행위가 형사 처벌이 가능한 불법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아니 유권자들이 그런 시도 자체를 안 하게 될 것이라고 봐야 한다.

과연 이 촬영행위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까? 겨우 인증샷 찍는 정도를 가지고 과민 반응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을 수도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표한 투표지의 촬영행위는 “매표 행위”로 이어진다. 좀 더 자세히 명명하자면, ‘스마트폰을 이용한 최첨단 매표행위’가 되겠다. 아직 적발된 사례는 없다. 그러나 매번 선거 때가 되면 공공연하게 들려오는 소문이 있다. 바로 표를 사고파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1966년 미국 오리건시티에서의 투표 모습 (사진: Clackamas County Historical Society, CC BY NC)

1966년 미국 오리건시티에서의 투표 모습 (사진: C.C.H.S, CC BY NC)

매표 행위 가능성 차단할 효과적인 방법

예전 같으면 선거 때가 되면 돈을 돌렸었다. 마을 이장이 목돈을 받아와서 선거 전날 밤중에 개별 가정을 방문해 몇만 원씩 들어 있는 봉투를 돌리기도 했었고, 부녀회장을 통해 돌리기도 했었고, 다양한 경로로 돈이 오가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매표 행위는 거의 사라졌다. 지속적인 단속의 효과일 수도 있을 것이고, 사회적인 인식 수준 자체가 높아져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예전같이 순수하지 않아서 돈 받고 안 찍는 사례가 속출했고, 돈 주는 쪽에서도 더 확실한 방법을 원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인증샷을 이용한 매표행위가 바로 그 확실한 방법이다.

사전에 믿을만한 유권자들에게 귀띔을 해준다. 기표소에 가서 특정 후보에게 기표한 뒤,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인증샷 (명함을 놓고 같이 찍어도 되고, 얼굴 옆에 들고 찍어도 되고..)을 찍어오면 돈을 준다는 약속을 미리 확보한 현찰을 보여주며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선거 규모에 따라 표준 단가도 있다고 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밑바닥 서민층에게 이런 유혹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 된다. 주는 돈이 어지간한 일당 몇 일치에 해당하는 수준이 되면 더욱 그렇다.

이 방법이 공식적으로 적발된 적은 아직 없지만, 선거 때만 되면 지역에서는 이런 소문이 꼬리를 물고 끊이지를 않고 있다.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는 지역이라면 더욱 이런 소문이 활발하게 돈다. 지역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이나 캠프 사람들도 이런 사실들을 서로 다 알고 있으면서 쉬쉬하곤 한다. 그러나 쉬쉬하고만 있지, 누구 하나 나서서 문제 삼지도 못하고 있는 그런 골치 아픈 문제이기도 하다. 증거를 잡기가 거의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신형 기표대는 이런 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효과만으로도 앞서 언급된 모든 장단점을 다 덮고 남을 것으로 생각한다.

Rob Boudon, CC BY

Rob Boudon, CC BY

한 가지 더

매번 프리젠테이션 때마다 마지막 부분에 ‘하나 더'(One more thing~) 을 외치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말하는 고 스티브잡스를 흉내 내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선관위 측 담당자에게 문의하는 과정에서, 다른 언론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위에서 논의된 모든 가능성을 다 이해하고서도 유권자들이 가림막을 없애길 원치 않는 때에 대비해서, 선관위 측에서는 신형 기표대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형태와 유사한 탈부착 가능한 가림막을 장착할 수 있도록 설계를 했다고 한다. 물론 여론보다는 지방 선거의 당사자인 각 정당에서 신형 기표대 사용을 거부할 경우를 대비했을 것이라고 보이긴 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여론이 신형 기표대의 사용을 거부하는 쪽으로 흐르게 되면, 당연히 각 정당에서도 반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선관위는 탈부착 가능한 가림막을 추가로 주문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정 반대가 된다. 즉, 신형 기표대로 교체하기 위해서 예산이 낭비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폐쇄형 기표소와 유사한 기표대를 만들기 위해 예산이 추가로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산은 예산대로 더 들어가고, 스마트폰 인증샷을 이용한 매표 행위는 존속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쩌면 정치권에 있는 음험한 기득권자들은 이 상황을 더 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권자의 판단은 어떻게 될까?

계산법과 발견법: 편견 없이 냉정히 평가해야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는 사건은 흔히 겉에서 보기와는 다른 실상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언제나 구체적인 내막을 확인하기 이전에 직관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파악하곤 한다. 흔히 말하는 계산법(Algorithm)과 발견법(Heuristics, 어림법이라고도 한다.) 중에서 사람들이 더 즐겨 사용하는 것은 발견법이기 때문이다.

중앙선관위는 지난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신뢰를 크게 상실했다. 디도스 공격사건도 그랬고, 개표부정 논란도 거기에 일조했다. 제기된 의혹의 사실 여부를 떠나 선관위의 대응은 적절하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논란은 더욱 확산하고 선관위에 대한 신뢰는 추락했다. 더 심각한 것은 국정원 등 국가 권력기관의 조직적인 대선 개입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한 점이다. 이는 선관위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총체적인 선거 관리의 실패로 규정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선관위가 신뢰를 잃은 것과 기표대를 신형으로 바꾸는 작업은 분리해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 이 내용을 섞어서 ‘신뢰를 잃은 선관위니까 그들이 하는 기표대 교체 작업은 역시 수상한 짓일 것이다’는 식 판단은 아주 전형적인 발견법에 수반되는 오류다.

선관위의 신뢰성이나 의도를 판단하기 이전에 신형 기표대 도입이 좀 더 나은 선거 운영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를 냉정하게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판단에는 특정 정파의 유불리 문제도 개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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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초대필자, 딴지일보 정치부장

월간 더딴지. 딴지 라디오 "그것은 알기싫다", "딴지 이너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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