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부쩍, 국내 언론에서도 긴 이야기와 다양한 미디어요소를 결합한 장편 온라인 기사 형식을 본격 시도하고 있다. 그것을 형식에 주목하여 멀티미디어 장편 기사라고 하든, 조작성에 주목하여 인터랙티브 기사로 부르든, 독서의 몰입감을 강조하여 이머시브 기사(immersive article)라고 부르든 말이다.
2012년 뉴욕타임스의 ‘스노우폴‘이 히트를 친 이래로 마치 온라인상에서 저널리즘을 멋있게 보여주는 최적의 모습이라도 되는 듯 멀티미디어 기사에 관한 관심이 폭발했다. 하지만 스노우폴과 가깝게 모습을 재현하는 것 자체에만 매몰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멀티미디어형 장편기사들이 시도를 위한 시도가 아니라 정말 쓸만한 기사로 만들어지기 위해(물론 긍정적 사례들은 이미 등장하고 있다) 필요한 요소들은 무엇인가. 세부적 검토사항이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 형식에 어울리는 이야기
1. 체험성
이머시브형 기사형태의 장점은 체험의 느낌을 키우는 것인 만큼, 애초에 이야기 자체가 기자 또는 취재대상자의 ‘체험’으로 서술되는 방식에 가까울수록 더 유리하다. 예를 들어 장편 르포 스타일이 그렇다. 한국에서는 90년대까지만 해도 시사월간지의 특기 분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양식이기도 한 만큼, 언론계에서 노하우가 부족하지는 않을 분야다. 구글 글래스를 끼고 생활한 체험이든, 격투기 선수의 인생역정이든 말이다.
2. 기승전결 스토리
길게 이야기할만한 드라마적 구성이 갖춰질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하다못해 토픽에 대한 설명성 기사라고 할지라도, 평탄한 설명체가 아닌 극적 전개가 있어야 한다. 배경 지식을 제시하고, 서서히 클라이막스로 향하는 흐름이 있어야 눈요기 정도에는 금세 익숙해지는 독자들을 긴 시간 동안 붙들어 놓는다. 이머시브 기사는 아니라도 WIRED의 장편형 특집 기사 가운데 극적 구성을 잘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 참조하기 좋으며, 최근 좋은 사례는 가디언의 미국발 인터넷 감청 스캔들에 대한 종합 설명 기사가 있다.
3. 높은 정보량
전달할 정보도 별로 없는 기사가 길이만 길고 매체 기법만 다양하면 그것이야말로 작성자에게도 독자에게도 낭비다. 이왕 커다란 장편 기사를 표방했다면, 두고두고 다시 들춰보고 싶은 온갖 관련 데이터들이 흘러넘쳐야 한다. 애플의 iOS 운영체계 발전사를 조망한 버지(TheVerge)의 기사가 좋은 예다.
4. 특수한 구체적 소재의 사회적 함의
독자는 시간을 투자해서 길고 긴, 그리고 종종 쉽지 않은 내용을 읽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따라서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소재여야 흥미를 끌 수 있으며, 그것이 어떤 사회적 함의로 연결되어 통찰을 줄 것 같은 보람이 있어야 인지력을 투자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이 형식을 히트시킨 ‘스노우폴’의 경우, 설산에서 조난을 당한다는 구체적 사연을 소재로 하며, 극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협력, 개개인의 의지, 자연 앞에 선 인간의 한계 등 보편적인 통찰을 상당히 밀도 깊게 표현한다.
5. 층위성
그냥 큰 줄거리 위주로 속독하고 싶은 이는 그렇게 할 수 있고, 더 깊게 알고 싶은 이들은 세밀하게 관련 정보들을 정독할 수 있도록 층위를 구성할 수 있는 방식의 이야기가 적합하다. 이것은 이야기 자체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이야기의 구성 실력의 영역에 가깝기도 하다. 일관된 테마를 전달할 수 있다면 아예 여러 기사 꼭지들의 종합 페이지 모양으로 만드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그 형식을 살리는 방식
6. 목소리와 표정에 의미가 있는 인터뷰
인터뷰를 기사의 일부로 삼을 때, 말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그냥 문자가 훨씬, 대단히, 압도적으로 낫다. 굳이 동영상 또는 음성 같은 멀티미디어 인터뷰 자료를 삽입하는 것은, 표정 및 목소리에 중요한 의미가 있을 때에 한정되어야 한다. 특정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기에 보여주는 결연함이든, 슬픔에 빠져서 진심으로 울먹이는 것이든 무엇이든 말이다.
7. 위치 관계를 정돈하는 지도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 하나를 위해 지도를 동원하는 것은 낭비다. 위치가 사건이 벌어지는 내역의 어떤 관계를 나타낼 수 있을 때 그런 것을 담아내는 지도를 넣어야 한다. 가디언 데이터스토어의 2011년작, 영국 폭동 당시 각 지역의 소득 수준과 소요 장소를 지도화하여 계층문제를 건드린 사례가 두고두고 인용될 모범사례.
8. 패턴을 요약하는 그래프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 더 명확한 것을 그냥 이미지가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프화할 것이 아니라(각 언론사가 남발하는 신년 여론조사 파이 차트들을 생각해보라), 정말 요약할만한 패턴이 데이터로서 존재할 때 비로소 그래프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 특히 긴 서사형 기사 사이에 들어가는 그래프이기에, 주목할 만한 의미가 없다면 매우 짜증을 유발할 따름이다.
9. 메커니즘을 체험시키는 인터랙티브
인터랙티브는 기본적으로 독자가 무언가를 선택하면 그것에 대한 결과를 알려주는 것이다. 많은 정보 가운데 독자가 선택한 일부만 노출하며 정돈하는 브라우징형, 질문에 답하면 결과를 알려주는 문답형, 독자가 일정한 조건들을 조합하여 과제를 풀도록 만드는 보다 본격적인 게임형 등 범위도 넓다.
하지만 인터랙티브의 기본 특징은 무엇보다 독자가 매우 귀찮게도 적극적으로 조작하며 참여하여 열심히 둘러봐야 겨우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일관된 장편 스토리 안에서 인터랙티브를 구현한다면, 정보의 전달(브라우징형이 특히 여기 해당된다) 자체보다는 어떤 사안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전달할 때 효과가 있다. 미국 대선 제도의 복잡함을 설명하는 기사에서, 주 단위 선거 결과에 따른 경우의 수 계산하기 같은 것을 넣는다면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10. 내용을 주도하는 텍스트
그러나 결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장편 기사의 핵심은 여전히 글이라는 점이다. 본문과 소제목과 블락인용들이 가장 눈에 띄어야 하고, 전체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 글보다 움직이는 배경화면이 시선을 장악하면, 그냥 망한다.
망하지 않기 위한 점검사항
11. 베타테스트는 했는가
처음 읽는 사람에게 한번 읽게 시켜보라. 코딩에 들어간 기술적 노력을 전혀 모를 사람이면 더 좋다. 정말 재미있어서 계속 끝까지 읽어보게 되는지, 읽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이동은 그럭저럭 편한지, 내용이 기억에 남는지. ‘오오 멋있네요’ 그런 것은 피드백이 아니니까 무시하고, 지적당하는 것은 정식 출시 이전에 고쳐놔야 한다.
12. 어디서나 잘 돌아가는가
다소 저사양 시스템에서도 문제없는가. 여러 브라우저에서 같은 양식으로 나오는가. 플러그인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없을 때 무엇이 보이는가(예: 플래시라든지, 유튜브 접속 문제라든지).
13. 화면에 무엇이 얼만큼씩 보이는가
누구나 그 기사를 제작한 그래픽 디자이너처럼 23인치 고해상도 모니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넷북 컴퓨터 화면에서도 원하는 인터랙티브 세그먼트의 조작 구역과 결과 구역의 그래픽이 정말 한 화면에 제대로 뜨기는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14. 본문 선택과 공유가 편한가
그냥 일반적 방식으로 텍스트를 부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북마크든 SNS든 공유도 편해야 한다. 아예 문단 단위로 앵커를 넣어서 특정 부분에 바로가기 링크가 구현된다면 더욱 좋다(안 그래도 긴 기사 아닌가).
15. 찾아갈 수는 있는가
여러 검색엔진에 정상적으로 걸리는가. 걸리면 제대로 된 소개 텍스트로 나오는가. 아니 그 전에, 게재사이트의 대문에서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제공되기는 하는가. 이왕 화려하고 멋지게 만들었다면, 제대로 알려져야 할 것 아닌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하지만 독자적 브랜드화 노력 필요
이런 요소들을 가볍게 여기다 보면, 노력은 노력대로 들어가고 기사는 외모만 화려할 뿐 도저히 읽기 힘들 정도로 산만해진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 예술도 많은 경우 그런저런 모방에서 시작한다.
다만 이왕 시도를 위한 시도를 하고자 한다면 최대한 비슷한 것을 재현하기보다는 확실하게 특이한 것을 선보여서 형식 자체를 하나의 브랜드 이미지로 승격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무엇에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형식 하나로도 깊은 인상을 심어준 좋은 사례가 바로 폴리곤(Polygon)의 콘솔 게임기 엑스박스원 리뷰 기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은 표준처럼 되어버린 뉴욕타임스 역시 바로 그런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이 분야로 인력과 자원을 투자하고 있는 모든 언론사에,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