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언련 이달의 좋은 보도상 수상자 인터뷰] 기획보도 ‘이토록 XY한 대법원’을 쓴 경향신문 이혜리·김희진·김혜리 기자
“당신이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경향신문, ‘이토록 XY한 대법원’ (연재) 중에서
“만약 당신이 남성이라면 성별이 같은 남성 판사를 적어도 한 명은 법정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여성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재판부 전원이 여성 판사일 가능성은 전국 모든 고등법원에서 0%다.”
성범죄 피해자가 되는 상상만큼이나 유쾌하지 않다. 여성의 경우 재판부에서 같은 성별 판사를 만나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은. 지난 8월 기준 전국 법원에 있는 여성 법관은 1,097명. 전체 판사(3,117명) 중 35.2%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 숫자는 재판부별로 살펴보면 무의미해진다. 판사 3명으로 구성되는 재판부 특성상 여성 법관이 재판부에 1명도 없을 확률이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선 전체 법관 구성보다 재판부 한 명 한 명이 어떻게 구성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경향신문이 ‘여성 대법관 부족’ 문제에 접근하면서 간과하지 않은 부분이다. 경향신문은 지난 10월 ‘이토록 XY한 대법원’이라는 기획기사에서 전국 6개 고등법원 118개 재판부, 서울지역 8개 법원 재판부를 전수 분석해 여성 법관이 1명도 없는 재판부가 60개(50.8%)라고 짚었다. 여성 대법관 부족에서 시작한 문제의식을 넓혀 진정 ‘시민에게 필요한 법원’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거리를 던진 것이다.
경향신문은 왜 여성 대법관 부족 문제를 다뤘고, 다양한 법관의 필요성까지 이야기하게 됐을까. 2023년 11월 ‘민언련 이달의 좋은 보도상’을 수상한 이혜리·김희진·김혜리 기자를 11월 29일 서울 종로구 민언련에서 만났다.
직접적 계기 된 ‘여성 대법관 비토’
-‘여성 대법관 부족’을 기획한 계기가 궁금하다.
이혜리 : 이전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대법원장이 제청할 대법관 후보자의 추천을 위해 설치된 대법원 소속 위원회로 총 10명으로 구성됨)’ 구성을 분석해 그들이 추천한 대법관 후보자의 연령이나 학력 등을 간헐적으로 기사화했다. 그때마다 여성 대법관 부족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마땅한 계기가 없었다.
그런데 대법관 여럿이 퇴임하고 대법원장도 바뀌던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이 김명수 대법원장 추천 후보 2명에 대해 거부를 검토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둘 다 여성 법관이었다. 문제를 체감하게 됐고 이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터뷰에 응해준 세 분 모두 여성이다.
이혜리 : 경향신문은 법조팀이 전원 여성이다(다 같이 웃음).
-이번 기획을 만들고 완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일까.
김희진 : 법원을 담당하는 저와 김혜리 기자, 법조 반장인 이혜리 선배. 이렇게 세 명이 기획을 진행하는 데 걸림돌 같은 게 없었다. 셋 다 더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이야기를 얹으며 기획을 발전 시켜나가는 스타일이다. 나에게 당연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켜야 한다거나 그런 과정이 없었다.
이혜리 :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희 셋 그리고 법조팀 전원이 여성인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법조팀 전원이 여성으로 구성된 것은 경향신문 내에서 최초다.
-학교, 지역을 중심으로 인사 불균형 문제에 접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성별인가.
김희진 : 옆에서 살펴본 결과, 대법관을 인선할 때 출신 지역은 고민한다. 이전엔 A출신이었는데 이번에 또 A출신을 뽑아도 될까 같은 고민. 그런데 성별에 대해선 그런 게 없었다. 여성으로서 살아온 경험과 남성으로서 살아온 경험은 다르지 않나. 무엇을 판단할 때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혜리 : 올해는 한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인 김영란 대법관의 취임 20년이 되는 해다. 나름 긴 시간인데 역대 대법관 156명 중 여성은 8명뿐이다. 여성 대법관 한 명 늘어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 싶었다.
-기존 출입처 취재도 해야 했을 텐데 따로 기획을 준비하는 일이 힘들진 않았나.
김희진 : 법조팀 일이 워낙 많다 보니 기존 업무를 하면서 병행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대충하기는 싫었다. 기획 회의를 할수록 취재할 게 많아지고, 회차도 점점 늘어났다. 8월부터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늦게 출고됐다. 하지만 의욕을 갖고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잘해보자’, ‘이것보다 더 잘하자’ 되뇌면서 임했다.
‘재판에서 여성 판사 만날 확률’ 살펴본 이유
-기획 제목과 달리 다양한 법관 사회의 구성을 다 살폈다. 처음엔 고등법원 재판부를 분석했는데 이유가 있나.
이혜리 : 먼저 고등법원 ‘재판부’ 별로 분석한 부분이 중요하단 점을 말하고 싶다. 법관 사회 성비를 살피면서 우리가 중요시한 부분은 ‘소송 당사자 입장’이었다. 전체 법원 성별 자료는 법원이 갖고 있다. 그들도 조직을 관리하려면 각 법원에 여성 판사가 몇 명 있는지 같은 정보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이자 재판 당사자 입장에서는 전체 법원 성별 구성보다 내 재판부에 어떤 판사가 들어오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재판장에서 같은 성별의 판사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런 관점에서 기사도 “당신이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는 식으로 시작했다. “대구라면 여성 판사가 1명이라도 있는 재판부를 만날 가능성은 50%”, “부산에 산다면” “100% 확률로 남성 법관 3명으로 구성된 재판부를 마주하게 된다”와 같이 썼다.
-재판부별 성비 데이터 같은 게 있었나.
김혜리 : 재판부 구성과 다양성을 살펴볼 데이터는 한국에 없다. 우리도 일일이 수기로 확인해 나갔다. 홈페이지 같은 데서 이름을 보고 공보관에게 물어보거나 직접 확인하는 등 법관 한 명 한 명 성별을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전국 모든 법원에 있는 법관의 성별을 분석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고등법원으로 범위를 좁혀 데이터를 만들었다.
-‘전국 고등법원 재판부 50%에 여성 판사가 없다’는 결과가 도출됐을 때 기분은.
김혜리 : 실망스러웠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현실이 데이터로 증명되는구나 싶었다. 평소 취재할 때 법정에 들어가 보면 검사나 변호인, 판사 모두 남성인 경우가 대다수다. 특히 기자들이 주로 챙기는 재판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주요 사건, 부패·비리 사건 등인데 그런 재판부는 남성 판사의 비율이 훨씬 높은 것 같다.
-사법행정 라인도 살폈다.
이혜리 : 사법행정 라인은 재판만큼이나 중요하다. 법원 관련 여러 의사결정을 하는 곳이다. 여기에 여성 법관이 얼마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다. 특히 사법행정권자는 재판부 구성에 영향을 미친다. 법관에 대한 평정권도 사법행정권자가 갖고 있다.
-법관 사회 성비 구성에 책임 있는 사법부 내 조직은 따로 없나?
이혜리 : 없다. 양성평등기본법에서는 ‘국가기관등은 양성평등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행정부는 여성가족부가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각 기관들이 성별 대표성 제고 방안을 시행한다. 여가부가 목표치 미달 기관을 공표하고 개선 권고도 한다.
그런데 사법부와 입법부는 여기서 빠져있다. 사법부 스스로 성평등 정책을 총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기획 마지막 부분에서도 언급한 내용이다. 최근 대법원장 후보자 청문회에서 성평등이 중요하다는 언급이 나오고 내년엔 대법원도 비슷한 계획을 만든다고 들었다. 변화가 조금씩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여성 대법관 주심의 ‘성인지감수성’ 판결이 하급심에서 3,697회 인용됐다는 기사가 인상적이었다.
김희진 : 2018년 10월 ‘성인지감수성’이란 용어를 형사사건 판결에 원용한 첫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성폭력 판단 기준을 넓힌 판결이었다. 선고 후 올해 10월까지 이 판결이 얼마나 인용됐는지 살펴보니 총 3,697회였다. 해당 판결 주심은 여성인 박정화 전 대법관이었다.
-판결 인용 여부를 살펴본 이유는.
김희진 : 선진적인 젠더 판례의 인용 횟수를 살펴본 이유는 최대한 시민의 입장에서 대법관 다양화의 필요성을 말해보고 싶어서였다. 대법관이 어떠해야 한다는 원론적 이야기는 일반 시민 입장에서 너무 거리감 느껴질 것 같았다. 여성 대법관의 존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사례로서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여성 대법관이 세운 선진적 판례가 없는지 찾아보면서 해당 회차가 마련됐다.
‘법관 다양화’ 당연한 명제 곱씹어보기를
-오늘 ‘시민 입장에서’란 말을 많이 들었다. 왜 시민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가?
이혜리 : 법원의 존재 이유가 시민이기 때문에?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다’는 장금이가 생각나는 답변이다. 우문현답이다.
이혜리 : (웃음) 너무 당연한 거다. 법조팀은 크게 두 군데, 검찰과 법원 취재를 한다. 그런데 검찰 청사엔 일반 시민이 없지만 법원엔 청사 주차장에 남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시민이 많다. 분쟁이 발생했을 때 권리를 구제받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 법원인 것이다. 그런데 법원이 시민을 위해 기능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다. 시민의 관점에서 법원을 분석하고 해결 방법도 찾는 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법원의 존재 이유와도 결부되고 제대로 된 해결책 마련의 단서이며 설득력도 거기 있다고 본다.
-기획을 진행하면서 즐거웠던 일은 없나.
김혜리 : 평소 소통할 기회가 없는 여성 판사분들을 만나본다는 점이 좋았다. 이분들이 인터뷰에 응해준 이유는 기획 취지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희진 : 여성 법관들은 평소 인터뷰에서 말을 조심하고 아끼는 편이다. 근데 이번엔 편하게 말해주신다는 느낌을 받아서 기억에 남는다. 또 연결을 잘 해주신 것도. ‘이분 한번 만나보면 좋겠어요’ 같은 일도 이번 취재에서 많이 겪었던 것 같다.
이혜리 : 새로운 팩트를 발굴하는 게 재미있었다. 대법관 다양화는 오랫동안 얘기된 주제라 독자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일 만한 새로운 정보, 새로운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성인지감수성 판결 3,697회 인용과 같은 수치를 발견했을 때 인상적이었다. 혼성 재판부에서 여성 판사가 주심이고 연차가 높으면 전원 남성 판사로 구성된 재판부에 비해서 형량이 높다는 것도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외국 연구 자료였다.
-기획을 마무리하며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면.
이혜리 : 대법원과 대통령실에서 이 기획을 보고 다음 대법관 인선 때 신경 써주면 좋겠다. 대법관 인선 절차란 것이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있긴 하지만 대법원장이 후보를 결정해서 임명을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구조다. 저희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했지만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대법원장과 대통령이다. 다음 인선 때 꼭 대법관 다양성에 대해 신경 많이 쓰길 바란다.
김희진 : 어쩌면 당연해 보일 수도 있는 ‘대법원 구성에 다양화가 필요하다’란 이번 기획 주제를 여러 사람이 찬찬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나아가 앞으로 대법관 인선에 있어 성별뿐 아니라 훨씬 여러 다양성 지표를 고려하는 변화로까지 이어지는 날이 오길 바란다.
김혜리 : 이 기획이 법원 구성원들에게는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일반 독자들에게는 법원과 ‘나’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