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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 원 커피에 씌워진 사치의 오명: ‘커피는 죄가 없어!’

“젊은이들이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 원씩 하는 커피를 마실 때, 늙은 아버지들은 첨단을 등진 변두리 어두컴컴한 작업장 뒤편에서 인스턴트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있는 게 우리네 풍경이었다.”

4월 15일, 한겨레는 올 2월까지 한겨레에 연재되었던 소설 ‘소금’의 출판 소식을 전한다. 위의 문장은 기사가 소설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며 인용한 것으로, 기사는 이를 “소설 화자인 ‘나’가 이 시대 젊은 자식들과 늙은 아버지들의 처지를 대비시켜 본 상념의 일부”라 설명한다.

이 기사는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설 자체가 화제가 된 것은 아니다. 화제는 저 한 줄의 문장에 집중되었다. 반응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블로거 ‘–G–‘는 만화를 그려 저 구절이 담은 메시지에 반박하기도 했다. 이 글 또한, 소설 자체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저 한 줄의 문장 – 한겨레가 선택한 한 줄의 문장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억척스러움’의 양면성

스테이크는 물론이고 요즘은 흔한 것이 되어버린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심지어 그저 그런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만 봐도 ‘비싸다’며 손사래를 치는 우리 부모 세대와 비교하면, 우리는 분명 소비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몇백 g 용량의 인스턴트 커피믹스를 사면서도 어느 쪽이 더 싼지를 한참 저울질해 집어들던 시절, 커피라 하면 당연히 크림과 설탕을 함께 넣은 그 인스턴트 커피를 떠올리던 세대에 비해, 커피 하면 으레 커피 전문점의 카페 아메리카노를 떠올리는 우리 세대는 그야말로 ‘소비하는 세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비하는 세대의 일원인 나에겐 부모 세대의 그 억척스러움, 그야말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소비 자체를 극단적으로 줄일 줄 아는 그 억척스러움이 언제 봐도 대단해 보이고, 또 개인적으로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저 문장에서는 ‘적의’가 느껴진다. 굳이 그 적의를 그대로 기성세대에게 돌려주자면, 아파트값이 떨어진다며 장애인 시설물 설치에 반대하고, 아파트 매물값을 담합하며 추한 모습을 보이던 부녀회의 이야기, 고된 하루 끝에 위로차 소주 한 잔을 걸치고 집에 들어와서는 폭력과 폭언을 행사하던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그 ‘억척스러움’의 이면에 있다. 부동산 공화국, 넘쳐나는 성매매 업소, 가정폭력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 따위가 바로 그 ‘억척스러운’ 부모 세대의 작품이다.

화려한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와 작업장 뒤편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는 늙은 부모의 대비 또한 게을러 보인다. 모든 기성세대가 작업장 뒤편에서 인스턴트커피를 마시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젊은이가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 원씩 하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은 아니다. 88만원 세대란 말로 대표되는 젊은이들의 취업난과 경제난은 이미 사회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되고 있다.

사치와 폭리의 상징이 되어버린 카페 아메리카노

그러나 저 문장이 불편한 이유는, 비단 문장에서 느껴지는 적의 때문만이 아니다.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 원씩 하는 커피’라는 구절, 그 구절 자체로도 충분히 불편하다. 대체 만 원씩 하는 커피를 젊은이들이 어디서 마실 수 있는지 하는 지엽적인 문제를 배제하더라도 충분히 그렇다.

한때 PC통신 ‘나우누리’에서는 TGI 프라이데이스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스타벅스 같은 커피전문점을 사치의 대명사로 모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오늘날에도 똑같은 얘기를 한다면 오히려 그쪽이 이상한 취급을 받겠지마는, 여전히 커피는 사치와 폭리, 비합리적 소비의 대명사다. 언론은 커피 한 잔에 들어가는 원두값이 150원 수준에 불과하다며 4천 원짜리 카페 아메리카노를 폭리의 대명사로 이름 붙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카페의 임대료, 커피 한 잔을 뽑기 위한 직원의 노동력은 물론, 최소한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커피머신의 가격도 중요하지 않다. 커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그것을 비난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다.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는 사치와 폭리의 상징으로 비난받았다

혹 어떤 사람들은, 빈곤한 젊은이들에겐 마땅한 작업공간을 구할 방법이 없다 보니 커피전문점에서 미팅하고, 작업할 수밖에 없다며 4천 원짜리 커피전문점을 변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꼭 작업공간으로 활용해야만 젊은이들이 4천 원짜리 커피전문점을 즐겨 이용하는 현실을 변호할 수 있는 것일까? 커피의 향미, 정신없는 도심 속에서 잠시 앉아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효용, 차 한 잔과 함께 지인과 나누는 대화… 4천 원짜리 카페 아메리카노로부터 사람들은 수많은 효용을 즐긴다. 이것이 정말 사치와 나태를 불러오는 악마의 검은 물일까.

카페모아 커피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회에서 시각장애인이 바리스타로 일하는 커피전문점을 운영하기도.

오히려 반대 측면을 지적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은 한국의 커피전문점들이 훌륭한 커피를 뽑아내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기업은 공장에서 공산품을 찍어내듯 카페를 찍어내 좁고 복잡한 도심 속에 억지로 끼워 넣고 있고, 젊은이들은 달리 갈 곳도, 달리 즐길 것도 없이 이런 공장제 카페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도심 속 커피전문점의 난립은 사치와 나태의 상징이라기보다 측은한 시대의 상징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몰이해는 아니었을까

이것이 내가 저 문장을 불편해하는 가장 큰 이유다.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 원씩 하는 커피’란 표현은 경험 많은 소설가의 문장이라기엔 – 피상적으로 느껴진다. 커피전문점의 커피에 대해, 그곳에서 작은 여가를 즐기는 젊은이들에 대해 알고 탐구하는 모습 대신, 그저 거리를 점령한 커피전문점들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고 지나갔을 법한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소비’라는 이유로 타인의 소비를 사치와 나태로 규정해 버리곤 한다. 우리가 그 효용을 모른다고 해서 타인에게도 효용 없는 소비일 것이라 지레짐작해버리는 것이다. 오래전 PC통신 시절부터 패밀리레스토랑과 커피전문점은 젊은이들의 사치를 상징하는 ‘된장녀의 성소’로 비하되었다. 위에 소개했던 만화의 묘사처럼, 게임과 만화는 철없는 아이들의 가치 없는 소비로 격하되었다. 백화점에 몰린 사람들은 종종 과소비를 상징하는 단면처럼 묘사된다.

저 문장으로부터도 그런 냄새가 풍긴다. 내가 모르는 소비에 대한 적의, 내가 겪지 못한 효용에 대한 몰이해. 커피는 언제까지 자신을 스스로 변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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