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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거워스의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2016, 한글 번역: 김영사, 2018)는 제1차세계대전이 1918년 11월에 끝났다는 것은 오직 승전국의 경험에 국한될 뿐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전승국인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다수 지역은 대략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전혀 다른 종류의 후반전에 들어갔음을 상세히 추적하여 보여주는 대작이다.

주지하다시피 제1차 세계대전은 현대 세계를 과거와 단절시킨 가장 결정적 단절점 중 하나였다. 주된 원인은 전차, 항공기 같은 신기술, 국민총동원령으로 대변되는 전쟁의 규모 확대와 같은 다분히 ‘현대적’ 현상이 이 전쟁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났으며,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한 전통 왕조들이 내파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승전국이냐 패전국이냐보다 총력전에 적응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훨씬 중요했다. 이탈리아는 승전국임에도 지속적 정치 위기를 겪었고, 승전 진영에 가담했었던 러시아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아예 독일에 사실상 항복해버렸다. 물론 어느 누구보다 현대전을 잘 수행한 독일은 다소 예외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호엔촐레른 왕조로 대표되는 구식 전제정은 확실히 전쟁수행을 방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기계문명이 최초로 자신에 대한 전 지구적 대량 살상을 가져온 첫 번째 체험, 제1차 세계대전.
인간의 기술기계문명이 최초로 자신에 대한 전 지구적 대량 살상을 가져온 첫 번째 체험, 제1차 세계대전.

1차 대전의 후반전: 라인강 서쪽  vs. 라인강 동쪽

그렇다면 이제 구 전통이 사라졌으니 새로운 근대의 세계가 열렸을까? 승전국에서는 확실히 그런 조짐이 보였다. 영국과 프랑스 부분적으로 위기를 겪긴 했어도, 총력전의 경험을 통해 국민을 단결시키고,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며 정부 및 사회 시스템을 근대적으로 탈바꿈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정말 구 전통이 대대적으로 내파된 패전국 지역에서 사정은 전혀 달랐다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국가 자원을 총동원하여 펼치는 총력전의 포성은 분명 멎었으나, 더 끈질기고 지저분한 폭력이 산발적으로 빗발쳤기 때문이다. 구 제국들의 연쇄적 붕괴는 제국의 지배권이 미치던 광대한 지역(알자스 로렌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헬싱키에서 팔레스타인까지)에서 모든 종류의 질서를 파괴해버렸고, 구 제국의 권위로 봉합하던 민족적, 사회적 긴장이 폭발하기 좋은 토양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과 뒤이은 적백내전이 벌어졌고, 독일에서는 스파르타쿠스 봉기와 우익 준군사조직들의 탄압이, 폴란드와 소련 사이에서는 전쟁이, 핀란드에서는 내전이, 발트에서는 독일 의용군의 학살이,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서는 인종청소가 벌어졌다. 라인강 동쪽 사람들은 기나긴 세계대전의 터널을 빠져나오니 일상이 전쟁터로 바뀌어버리는 끔찍한 후반전을 경험한 셈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인 라인강 서쪽은 평화로웠지만, 라인강 동쪽은 전쟁과 학살로 점철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인 라인강 서쪽은 ‘새로운 근대’로 이행했지만, 패전국 지역인 ‘라인강 동쪽’은 기존 질서가 파괴되며 새로운 민족적 사회적 긴장이 폭발해 혁명과 전쟁과 인종학살이 벌어지는 제1차 세계대전의 ‘후반전’이 벌어졌다.

혼란을 먹고 자란 파시즘과 제국주의 

영국, 프랑스, 미국으로 대표되는 협상국의 전후처리는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물론 협상국 지도자들은 나름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고, 국내 여론을 고려했을 때 그들에게 일종의 불가항력이 있었음은 명백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윤리적 책임을 지우는 것이 부당하다곤 하더라도, 그들의 정책이 의도하든 의도치 않았든 중동부 유럽에서 전개된 폭력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패전국에 부과된 가혹한 강화조건은 어떤 국가도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불공정한 적용도 문제를 악화시켰는데,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 동질적인 국민국가가 등장하기는커녕 각자가 각자의 소수민족을 품은 소제국들이 무한히 병립하는 혼란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와 터키의 격렬한 전쟁이 1923년에 종결되고, 유럽에서 폭력은 일단은 사그라든 것처럼 보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의 폐허에서 등장한 후계 국가들은 그럭저럭 자리를 잡았고, 가장 시급한 민족 문제들도 일단은 해결되었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패전국이나 만족하지 못한 승전국들은 이 상황을 타개할 수정주의적 대외정책을 모색했다.

자국의 정당한 땅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소수민족에 대한 불만은 20년대에도 공공연하게 폭력으로 분출되었다. 1917년부터 1923년까지 폭력적 공간에서 기억을 형성한 이들은 자신들의 폭력을 영웅시했고 이후 문제 해결에도 폭력을 숭앙하는 성향을 키우게 되었다. 이민족, 혹은 국내의 ‘불만분자’는 청소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종종 짐승 내지는 비인간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이 모든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부상, 나아가 극동에서 일본의 제국적 팽창을 불길하게 예시하고 있었다.

나치 일본 제국주의 파시즘

인종청소와 인구 교환 그리고 민족국가  

평화가 찾아온 곳이 없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해결된 문제가 있다면,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영토를 놓고 싸웠던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분쟁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리 희망찬 소식은 아니었는데, 양측이 수십만의 인구를 자국에서 강제이주시켜 상대국으로 보내버린 대규모 인구 교환이 사태를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터키와 그리스에서 전개된 사태를 유심히 지켜본 다른 지도자들은, 자국에도 유사한 정책을 도입하고자 시도할 것이었다. 바로 ‘인종청소’말이다.

"현대의 첫 조직적 집단학살사건"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오스만 제국이 소수 민족이나 변두리에 거주하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사건.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 강제이주를 시행하면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서 통일과 진보위원회(통칭은 통일파, 이른바 청년 투르크당) 정권에 의해 오래전부터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한 곳(대 아르메니아)의 남서쪽에서 있던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됐다.
“현대의 첫 조직적 집단학살사건”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오스만 제국이 소수 민족이나 변두리에 거주하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사건.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 강제이주를 시행하면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서 통일과 진보위원회(통칭은 통일파, 이른바 청년 투르크당) 정권에 의해 오래전부터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한 곳(대 아르메니아)의 남서쪽에서 있던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됐다.

그리하여 1945년의 유럽은 이 문제를 그럭저럭 해결했다. 1923년에 시행된 ‘터키식 해법’(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은 1945년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있던 전유럽에 적용되었다. 사람이 사는 곳을 따라 국경을 긋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따라 사람을 완전히 재배치했다. 물론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나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다소간의 예외가 있었지만, 완전히 동질적인 인구 집단으로 구성된 국민 국가는 1991년까지 유럽에서 놀랍도록 잘 작동했다(심지어 공산주의 체제가 이식된 중동부 유럽에서도 말이다).

1914년 오스만 제국의 인구 조사에서 나타난 공식 수치를 보여주는 문서. 총 인구(밀레트 모두 포함)는 2,097만5,345명이며, 여기서 그리스 인구는 179만2,206명이었다(참조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A6%AC%EC%8A%A4-%ED%84%B0%ED%82%A4_%EC%9D%B8%EA%B5%AC_%EA%B5%90%ED%99%98#/media/File:Proportions_des_populations_en_Asie_Mineure_statistique_officielle_d1914.png 1923년 1월 30일 스위스 로잔에서 그리스와 터키 양국 정부는 "그리스와 터키 인구의 교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2][3] 터키 영토에서 그리스인을, 그리스 영토에서 터키인을 각각 추방, 교환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 조치에 따라 50만여 명의 무슬림(대부분 터키인)이 그리스에서 쫓겨났고, 150만여 명의 그리스 정교도(대부분 그리스인)가 터키의 아나톨리아(소아시아)와 동부 트라키아에서 쫓겨났다. 다만, 그리스-터키 전쟁 중에 터키 영토 내에 거주하던 100만여 명의 그리스인이 이미 추방되었기 때문에 이 협정으로 교환된 그리스인의 수는 40만여 명에 그쳤다(참고: 위키백과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A6%AC%EC%8A%A4-%ED%84%B0%ED%82%A4_%EC%9D%B8%EA%B5%AC_%EA%B5%90%ED%99%98
1914년 오스만 제국의 인구 조사에서 나타난 공식 수치를 보여주는 문서. 총 인구(밀레트 모두 포함)는 2,097만5,345명이며, 여기서 그리스 인구는 179만2,206명이었다(참조:  위키백과).”그리스와 터키 인구의 교환에 관한 협정(1923)”의 결과로 50만여 명의 무슬림(대부분 터키인)이 그리스에서 쫓겨났고, 150만여 명의 그리스 정교도(대부분 그리스인)가 터키의 아나톨리아(소아시아)와 동부 트라키아에서 쫓겨났다. (참고: 위키백과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이 같은 ‘재배치’를 겪지 않은 지역들은 예외없이 민족 문제로 말미암아 정치적 위기 내지는 대혼란을 겪었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그랬고, 소련이 그랬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유산인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다.

닮은 꼴: 1919년의 유럽, 2019년의 유럽 

제1차 세계대전 ‘후반전’과 동격으로 놓을 수는 없지만, 딱 100년이 지난 요즈음 유럽의 모습이 그 후반전에 많이 겹쳐보인다. 동유럽과 중동 출신의 이질적 인구집단이 모여드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민족 거주 구역으로 몰려살게 되고, 이질성과 긴장감은 점점 커진다. 초국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구는 무력하고, 가끔 충격적인 테러 소식도 전해진다. 주류 민족은 타락한 엘리트나 위협적 소수민족과 구분되는 자신들의 권리를 외치기 시작한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됐을지 의문이 안 들 수 없다. 정녕 인간은 민족, 피부색, 종교를 초월하여 한 가족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1900년의 유럽이나 2000년의 유럽은 이렇게까지 혼란하지 않았다. 20년만에 사람들이 바뀐 것도 아닐텐데 어째서 이렇게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느냔 말이다.

답은 어쩌면 명확할 수 있다. 현 단계의 인류는 여전히 다민족 질서를 다루는 것을 끔찍하게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가 팽창하고 생활 수준이 모두에게 향상된다면 타인에 대한 관용을 베풀기도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위협적으로 변하고, 전보다 명백히 위축된 삶을 살아야할 때 인간이 가졌던 사바나 시절의 본성이 깨어나는 듯 하다.

‘외부인을 배척하고 내집단과 결속을 강화하여 어려운 순간을 버텨내라.’

1900년의 유럽은 다소간 긴장은 있었지만, 모든 것이 잘 굴러가던, 대륙의 최전성기였다. 2000년에 유럽은 잃어버린 동쪽 절반을 되찾고 새로이 세계질서의 한 축으로 복귀를 선언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미국이나 동아시아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1919년의 유럽은 궁핍과 혼란이 만성화된 도가니였고, 2019년의 유럽은 활력 넘치는 미국과 동아시아 사이에 낀 늙은 대륙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 차이가 자국 내 타자에 대한 갑작스러운 태도 전환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3월 22일, 벨기에 브뤼셀 자반템 국제공항과 시내에서 일어난 '2016년 브뤼셀 테러 사건' 추모 이미지. 벨기에는 유럽 국가 중에서도 무슬림의 비율이 매우 높은 나라(인구 1,100만 중 50-60만 명)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테러단체 IS는 자신들이 브뤼셀 테러를 일으켰다고 시인했다. https://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oid=001&iid=1079406&sid1=104&aid=0008273632&mid=hot&cid=1038849&ptype=021&nh=20160323061431
2016년 3월 22일, 벨기에 브뤼셀 자반템 국제공항과 시내에서 일어나 사망자 최소 34명, 부상자 최소 250명의 참혹한 피해를 낸 ‘2016년 브뤼셀 테러 사건’ 추모 이미지. 벨기에는 유럽 국가 중에서도 무슬림의 비율이 매우 높은 나라(인구 1,100만 중 50-60만 명)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테러단체 IS(이슬람국가)는 자신들이 브뤼셀 테러를 일으켰다고 시인했다.

민족국가의 딜레마 

언젠가 ‘민족주의를 변호한다’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당연히 반응이 안 좋았다. 시민성에 근거한 개인들의 연대, 그를 바탕으로 한 공화정치를 급진적으로 상상해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아직도 퇴물이 된 민족주의에 집착하느냐는 비판들이었다. 하지만 1917년부터 1945년까지의 유럽, 1945년부터 대략 1980년까지의 유럽, 그리고 1980년부터 지금까지의 유럽을 비교해보면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민국가를 구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통치에 편리한지 절감할 수 있다.

우드로 윌슨,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사진은 1919년 모습).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레닌이 1913년 표방한 민족자결원칙과 분리권을 의식해 제1차 대전의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기 위한 '책략'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우드로 윌슨,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사진은 1919년 모습).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반영된 ’14개조 평화원칙’은 레닌이 1913년 표방한 민족자결원칙과 분리권에 대응해 제안되었다. 민족자결주의는 한국의 3.1운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제2차 대전 이후의 식민지 독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 원칙은 제1차 대전의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새롭게 편입하기 위한 정치 전략이라는 해석도 있다.

분명 다양한 민족의 공존과 긴장은 문화를 풍성하게 하지만, 긴장이 심해지면 구성원들에게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줄 수 있으며, 대내외적 상황이 악화될 경우 갈등이 증폭되곤 한다. 특정한 이념과 사상에 근거한 야심찬 정치기획으로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채택해온 가장 근원적인 정서를 극복할 수 있을지, 누군가는 가능하다고 소리 높이겠지만, 나는 점점 회의적이다.

물론 세계화를 통해 이주가 현대 세계의 중요한 풍경으로 재등장하고, 이미 수많은 이질적인 소수문화가 선진사회로 쏟아져 들어오는 지금 시대에, 1945년을 ‘좋았던 옛날’로 추억하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민족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이질성이 주는 근원적 공포, 그리고 동질성이 주는 안정의 가치를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이 점을 먼저 인식해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이든 대안이든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작년에 한국에서도 불거진 난민 의제 같은 딜레마 상황에서도 충분히 적용해봄직한 사고 틀이다.

서유럽의 무지와 오만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에서 인상적인 점은 동유럽의 역사적 경험에 관한 서유럽 지식인의 무지를 지적한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유럽과 이 시기 유럽을 겹쳐보며 결국 그 무지가 결국 현재의 정치적 위기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국민국가를 일찌감치 만들어보았고, 국가의 치안이 그렇게 급속도로 붕괴한 적이 없던 영국과 프랑스는 동유럽의 경험에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1945년 이후 철의 장막마저 세워지자, 서유럽이 느낀 동유럽과의 심리적 거리감은 더욱 극대화되었을 것이다(독일조차도 자신의 동유럽성을 부정하고 서유럽의 ‘올바른’ 경로를 강조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토 내 이질적 민족들의 존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대규모 이민자 유입을 허가한 것 아니었을까.

다른 문화를 다루는 ‘예법’에 관심 없는 다수의 대중과 현지의 문화에 녹아 들어갈 생각이 별로 없는 이민자들이 경제 불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사실 명확했다. 과거 대륙의 동쪽 반대편에서 어떤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는지’ 조금만 숙고해봤다면 말이다. 서유럽의 식자나 정치인들이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역시 ‘아시아’에 가까운 동유럽의 야만적 경험은 합리, 이성, 근대성의 정도를 걸어온 서유럽의 경험과 겹쳐질 수 없다는 오만과 오리엔탈리즘의 결과물 아니었을까.

20세기 최고의 명저 중 하나인 [오리엔탈리즘]을 남긴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년~2003년)
20세기 최고의 명저 중 하나인 [오리엔탈리즘]을 남긴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년~2003년).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서양이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하고, 동양을 지배하기 위해 동양을 타자화하는 모든 동업주의적 방식과 체계라고 정의했다.
전후 이탈리아가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하여 유고슬라비아의 피우메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자, 미국 대통령 윌슨은 이탈리아 국민에게 부당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해달라고 호소했다. 이탈리아의 일간 신문 [레코파]는 이렇게 코웃음쳤다.

“윌슨은, 자신의 호소에 이탈리아 국민들이 정부에 반하여 들고 일어나서, 자신만의 추상적 사고의 상아탑에 갇힌 한 외국인이 강요하는 정책을 받아들이도록 정부를 압박할 것이라고 어떻게 단 한 순간이라도 생각할 수 있을까?”

윌슨과 이탈리아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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