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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 저베이스

영국 코미디언 리키 저베이스의 스탠드업 코미디 [리키 저베이스: 휴매니티] (2018년 녹화 버전, 위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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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베이스: 세상은 점점 더 망해가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 시작은 SNS 같아요.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멍청한 이야기들이 시작되어 널리 퍼지고 있거든요.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남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중요해진 세상이에요. … 진실따윈 던져버린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주장의 내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죠. 그들은 주장을 보지 않고, 대신 이래요.

“누가 그런 주장을 했지? 아, 보나마나 틀렸어. 그는 우리편이 아니잖아.”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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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터무니없는 행태는 예를 들면 이런 것이리라: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니 좋은 후보(혹은 정책)가 틀림없군요!”

이게 무슨 말인가? 장관 후보자나 국가 정책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지 않거나 못하며, 대신 자신들이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 정당의 판단에 맡긴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자기 생각의 방향을 자신이 혐오해 마지않는 정당의 판단에 종속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코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4월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임명을 놓고 야당이 반대했을 때도 여당 지지자 중 어떤 사람들은 저런 말을 했다. 그러나 김 원장은 결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위법 판단을 받은 뒤 사퇴했다. 지금 유은혜 교육부총리 후보자의 온갖 비리 의혹 때문에 야당은 임명에 반대하는 중이다. 여당 지지자 중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저런 말을 하고 있다.

스피커 마이크 의견 주장

야당이 무슨 주장을 하든 상관없이, 김기식이나 유은혜가 주어진 임무를 맡기에 부적합하다는 여론이 나올 정도로 탈법, 비리 논란이 있는 처신을 해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주장의 내용을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따위보다 발화자가 누구인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사실 이런 발언은 진정함을 반영한다기보다 풍자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발언과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이 흔히 한 켤레가 되어 작용함을 고려하면, 그냥 웃어 넘길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하다.

“우리편이 추천/지지/임명했으니 좋은 사람이 틀림없군요!”

상대편에 대한 무한부정과 우리편에 대한 무한긍정은 무상무념이라는 동전의 양면으로서, 서로 힘을 합쳐 공동체를 시궁창으로 이끈다.

"사실은 의견이 아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커코디 공학검사 박물관 입구에 붙은 말.
“사실은 의견보다 중요하다.” 영국 런던에 있는 커코디 공학검사 박물관 입구에 붙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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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베이스: 우리는 “당신의 의견이 중요한 만큼 내 의견도 중요해요”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죠. 그런데 SNS 때문에 요즘엔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사실이 중요한 만큼 내 의견도 중요해요.”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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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사실보다 그것과 배치되는 자기 주장이 더 옳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다. 사실을 무시하고, 아니 그런 걸 확인해보려는 의지조차 없이 의견만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선동하며, 자신의 말이 잘못이어도 사과나 수정은 하지 않고 또다시 남들이 듣고싶어하는 솔깃한 의견을 생산하기 바쁜 SNS ‘인플루언서’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사실이 중요한 것은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의 방향을 잡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라서 그런 게 아닐까. 사실을 버리면 현실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고 미래도 암흑(혹은 적어도 오리무중)으로 들어간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의견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하려는 의지이며, 당장 달콤한 사탕을 빨다가 미래에 함께 망하자는 굳은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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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베이스: 이 모든 것은 그냥 유명해지는 것에 대한 관심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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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그걸 병으로 칩니다. 정작 병자들은 자신이 그런 병에 걸렸다는 것을 잘 모르고, 아직 의료보험도 안 되긴 하지만요.

"이 모든 게
“세상은 점점 더 망해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 시작은 SNS 같아요. (….) 이 모든 것은 그냥 유명해지는 것에 대한 관심 때문이죠.” (저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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