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의 ‘악수 대결’을 기억하는가? 트럼프는 상대방의 손을 그야말로 쥐고 흔들면서 기선제압을 하고 협상에 임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미국 대통령으로서 세계의 수많은 정상을 만났을 때도 이런 제스처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여러모로 트럼프와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져 처음부터 미묘한 긴장관계를 형성한 프랑스의 젊은 대통령 마크롱은 오히려 트럼프의 악수를 역으로 받아쳤다. 트럼프가 손을 빼려고 하자 마크롱이 이를 다시 잡아채서 이를 악물고 손을 꽉 쥐어 트럼프를 당황시킨 것이다.
이런 원초적 기 싸움은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냈다. 일국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무슨 침팬지처럼 노골적으로 저런 짓을 벌이나? 하지만 사실 이 침팬지들의 원초적 기 싸움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이기 이전부터, 수백만 년 전부터 우리 종과 함께해온 역사 그 자체다.
침팬지의 정치학
위트레흐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영장류 연구자로 커리어를 시작한 프란스 드 발은 1970년대 말부터 네덜란드 아넴에서 반 자연상태로 만든 침팬지 사육장을 관찰한다. 이 침팬지 집단은 이에론, 루이트, 니키, 댄디라는 네 마리 수컷과 마마, 지미, 테펠을 중심으로 뭉친 다수의 암컷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당시 우두머리는 노회한 이에론이었는데, 암컷 침팬지 집단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마마의 지지를 통해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이에론이 점점 늙어가자 이에론의 동지였던 루이트가 반기를 들기 시작하고 니키가 가세하면서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드 발은 이 세 수컷의 역학관계에 더해 각각의 암컷 집단이 어떤 식으로 아넴 침팬지 집단에서 권력 이동에 역할을 담당하는지 수천 건의 관찰기록과 녹음테이프, 영상 등을 종합해 책을 써냈다. 그 책이 바로 [침팬지 폴리틱스]다.
침팬지 폴리틱스의 함의는 단순하나 묵직하다. 정치는 인간보다 오래된 활동이라는 것이다. 수컷 침팬지들은 사회적 집단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올리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성적 특권을 독점해 번식 기회를 최대한으로 확보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암컷 침팬지들은 안정된 권력질서가 장기간 유지되는 것을 선호한다. 권력이 분할되어 항구적 긴장상태가 유지되는 것보다 알파메일(우두머리 수컷)이 자원을 독점하고 질서 있게 분배하는 것은 새끼 양육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원의 분배에 대한 통제권을 둘러싸고 침팬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연합, 권모술수, 권력의 이동, 그리고 개체의 성격이 다분히 드러나는 그들만의 전략과 기획은 정치라는 것이 확실히 인간보다 먼저 형성되었다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이 정치로 말미암아 진화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다. 이는 이들 침팬지의 행태 속에 인간 정치의 중요한 본질이 생생히 드러나는 데서 잘 나타난다. [침팬지 폴리틱스]의 배경과 사건의 전개를 인간의 그것에 맞게 각색한다면 충분한 정치드라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수컷이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 알파메일의 권력에 대항하는 공격성과 도전정신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알파메일이 될 수 없으며 유지도 할 수 없다. 공격성, 힘만큼 중요한 것은 집단 구성원들에게서 받는 인망이며 이것이 그의 권력 유지를 위한 영향력으로 전환된다. 이는 권력 투쟁의 초기부터 잘 나타난다. 아넴 집단의 자세한 권력 투쟁의 역사에 관해서는 스포일러 염려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루이트는 이에론보다 힘이 강했음에도 처음에 이에론에게 감히 맞설 수가 없었다. 여족장 마마가 확고한 이에론 편으로 암컷들을 데리고 와 건방진 루이트를 응징했기 때문이다. 루이트는 이에론과 암컷 침팬지의 유대관계를 헤집어놓기 위해 다른 수컷인 니키를 활용한다. 니키와 간접적인 동맹관계를 맺고, 루이트가 이에론에 도전하는 순간마다 니키가 다른 암컷들을 괴롭히게 만들어 이에론의 영향력 행사를 차단한 것이다.
이런 긴장관계 속에서 침팬지들은 서로 털을 골라주면서(grooming; 그루밍) 유대관계를 쌓거나 긴장관계를 해소한다. 갈등이 잦을수록 서로 간의 그루밍도 잦아진다. 권력을 향한 경쟁이 필연적으로 막대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침팬지들은 그루밍뿐만 아니라 정치를 위한 다양한 사회적 표지들을 활용한다. 복종을 확인 받는 ‘인사’, 자신이 사회적 지위를 드높이기 위해 털을 쭈뼛 세우고 소리를 치며 하는 과시행위 등이 그것이다. 과시행위가 인정받으면 그 행위가 갑자기 사라지는 점은 이것이 높은 사회적 지위라는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행해지는 것임을 의미한다(목적이 달성되었으면 더이상 과시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
권력을 둘러싼 심리상태도 재밌다. 침팬지들은 권력을 잃었을 때는 그 비통함에 통곡까지 하고 유아 퇴행적 모습까지 보인다. 그러나 권력을 얻은 자라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언제든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경쟁자들 때문에 그들은 늘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많은 정치적 행위들과 각각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침팬지 개체들의 전략적 행동들이 교차할 때, 아넴의 방목장은 하나의 정치국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치학
인간과 침팬지의 행동은 이처럼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다. 본질은 이미 그들과 우리가 공유하고 있다. 단지 대단한 정도만이 다를 뿐이다. 우리 인간은 침팬지보다 덜 노골적으로 권력을 갈구하는 방법을 익혔다. 인간은 자신의 권력욕을 스스로 기만하면서 ‘모두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등의 수사로 포장하고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그루밍 대신에 언어와 음악, 종교 등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트럼프와 마크롱의 악수 대결은 여전히 우리에게 신체적인 신호는 우리의 근원적인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려준다. 그것이 미묘하게 당혹스러운 이유는 인간이 오랫동안 쌓아온 포장지를 한 번에 벗겨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그 포장지를 벗겨내자 비슷한 거부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설령 ‘인간’, 즉 7만 년 전부터(혹은 20~30만년 전부터)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현생 인류들로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형태의 사회적 상호작용은 그렇게까지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신체적 힘과 폭력이 공식적인 권력으로 향하는 길에서 배제되는 것은 문명이 자리잡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7만년 중 5천년도 안 되는 매우 짧은 기간이다. 그리고 문명이 생긴 이후에도 인류 문화는 지금에 비하면 극히 폭력적이었고, 수많은 유럽 귀족은 결투로 생을 마감하곤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정도로 폭력이 억제되기 시작한 건 스티븐 핑커의 말 대로 얼마 되지 않았다. 스티븐 핑커는 국가가 생긴 평화화 과정, 국가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문명화 과정, 그 국가가 더욱 심화시킨 인도주의 혁명과 권리 혁명으로 폭력이 계속 줄어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기수인 권리 혁명이 본격적으로 촉발된 것은 20세기 초엽에 가서나, 그것도 선진 사회에서나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전까지 침팬지들의 노골적 폭력은 인간에게도 아주 일상적이었다. 사실 인간의 지능은 폭력과 고문에도 놀라운 창의성을 발휘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침팬지들의 다툼보다 훨씬 끔찍할 때가 많았다.
이제 우리는 폭력을 생소한 것으로 생각하고 평화를 당연한 것으로, 또 달성해야만 할 것으로 생각한다. 사회가 평화를 요구함에 따라 인간은 또다른 본성을 그에 맞게 가동시켰기 때문이다. 그 본성은 바로 사회화를 통해 규범을 내면화하는 능력이다. 그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억제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의 가장 깊은 심연은 변화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여전히 신체적인 힘이 중요한 권력의 원천이 되는 곳, 긴장관계와 위계 서열, 그리고 활발한 권력이동을 야만적이고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이 만들어내는 곳이 한국에 딱 하나 있다.
교실의 정치학
그곳은 바로 교실이다.
이곳에서 학생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영장류를 관찰하는 동물행동학자의 눈으로, 또 수렵채집사회를 관찰하는 인류학자의 눈으로 면밀히 파악되어야 마땅하다. 인간의 사회화와 성격형성에 굉장히 지대한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인간이 되는 과정을 야생과도 같은 교실에서의 경험을 통해 몸으로 학습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학습과정은 과연 어떻게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될까?
[침팬지 폴리틱스]에서 프란스 드 발이 보여준 아넴의 침팬지 집단은 인간의 ‘자연 상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자연 상태든 문명화된 상태든 인간, 혹은 호미닌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언제 어디서나 인간 대부분(그리고 호미닌; hominin; 인간의 조상)은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고 많은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하며 전략적이고, 때로 비정해 보이는 행동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영국의 토머스 홉스는 일찍부터 자연 상태의 인간이 훨씬 더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구성원 간의 내부 폭력을 억제할 더 상위의 권위체가 자연 상태에서는 부재하기에 폭력이 횡행한다고 주장했다. 문명은 그 복잡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너무 노골적인 폭력은 억제하고 공통의 규칙과 합의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상위의 권위체를 요구했다. 이 점에서 문명은 자연 상태와 구분된다. 물론 사회가 어떤 기준을 두고 명확히 자연과 문명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스펙트럼에 가깝다. 침팬지에서 인간의 부족사회와 도시국가, 제국을 거쳐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 이르기까지 사회 수준이 고도화될수록 갈등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기 위한 완충 장치도 더 정교해졌던 것이다.
폭력을 극도로 억제하는 현대 산업사회는 현재까지 인류가 발전시켜온 가장 고도화된 사회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노골적으로 행해지는 물리적 폭력이 권력과 지위 획득의 중요한 수단이 되는 공동체를 떠나왔다. 대략 15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폭력이 지금보다 극히 일상적이었다. 그보다 더 15년 전으로 가면 훨씬 더 그랬다. 아마 산업화와 민주화뿐만이 아니라 폭력의 감소에 있어서도 한국의 속도는 확실히 서구 사회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전히 주요한 예외가 있다. 나는 그 예외를 학교의 교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아이들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흔한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라는 이미지와 결부되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누구나 한 번은 아이였던 적이 있기에 직감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순수함은, 악함이 없고 선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아이들은 사회에 대한 학습이 되지 않은 상태기에 여기서 순수함은 인간의 자연 상태를 뜻하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교실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홉스가 묘사한 전형적인 자연 상태와 같은 모습이 된다. 학교 선생이나 법과 공권력 같은 더 상위의 권위체가 폭력의 수위를 분명히 강력하게 억제하고 있긴 하지만, 학생 개개인 간의 모든 상호작용을 다 통제할 수는 없다. 또한, 다른 사회 공동체들의 구성원들은 이동의 자유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어 갈등 상황에서 쉽사리 소속을 옮겨 갈등을 피할 수 있는 반면, 교실의 학생은 그렇지 못하다. 기존 학생과의 유대관계, 생활 공동체로서 교실의 성격, 거주지에 의해 제약 받는 교육 공간 등 다양한 이유로 전학을 가는 것은 쉽사리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이런 면에서 교실은 아넴 침팬지 사육장과 유사하며 전학은 침팬지 집단이 다른 침팬지 집단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옮기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 가족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친구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또래집단도 스스로 선택하기 극히 힘든 것이다. 학생 대부분은 주어진 또래집단에서 어떻게든 적응하고자 발버둥 치며 또래집단 구성에서의 큰 변동을 겪지 않고 중등교육을 마친다. 마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본인들이 선택하지 않은 공동체와 함께 하는 침팬지들처럼 말이다.
이런 여러 조건들은 교실에서의 상호작용을 전통적인 인간 부족사회의 상호작용, 혹은 침팬지 집단의 상호작용과 유사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교실에서 그 순수한 아이들의 사회활동은 순수한 야생에서의 상호작용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이들은 자신의 지위를 계속해서 올리고 싶어 한다. 교실에서의 수업이 교사의 일방적인 강의로 이루어지고 학생들의 참여는 최소한으로 제약되기 때문에, 아이들의 사회적 상호작용은 대부분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 이루어진다. 이 시간은 거의 대부분 아이들이 넘치는 에너지를 떠들썩한 수다와 놀이로 해소하며 평화롭게 흘러가지만, 그 밑에는 언제나 권력을 둘러싼 긴장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그 권력의 구성과 역학을 한 번 해부해보자.
일진과 찐따: 교실 권력의 재구성
로빈 던바가 밝혀내었듯이 인간은 자신이 맺고 있는 사회적 유대관계를 동심원 구조로 조직한다. 중심에는 가장 유대관계가 깊은 5명의 구성원이 있다. 이는 3배 수로 계속 확대되며 확대 될 때마다 사회적 유대의 크기는 줄어든다. 이는 15명, 45명을 거쳐 인간이 관리할 수 있는 사회 네트워크의 인지적 한계로 역시 던바가 지적한 150명(이른바 ‘던바의 수’)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한 반에는 4명에서 8명 정도로 구성된 여러 소집단들이 생기기 마련인데,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을 같이 보내는 단위이기도 하다.
우선 편의 상 한 학급의 인원을 40명이라 가정하고 소집단의 규모도 일괄적으로 5명이라 가정하자. 이 경우 학급에서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을 같이 보내는 소집단은 8개가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8개 그룹에 매우 확실한 위계와 서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장 서열이 높은 그룹은 소위 ‘일진’ 그룹이고, 가장 낮은 그룹은 소위 ‘찐따’ 그룹이다. 그 나머지 그룹은 ‘양민’ 그룹을 이루는데, 이 구성은 대략적으로 정규분포를 이루고 있다. 즉 양민 그룹도 찐따에 가까운 그룹이 있고, 일진에 가까운 그룹으로 나뉜다.
초등학교에 다들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이런 위계 관계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학생들 개개인이 성장 속도에 차이를 빚게 되고 조금 더 외향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의 아이들과 내향적인 아이들로 본격적으로 분화되면서 반의 소집단은 그 성격이 서서히 나뉘기 시작한다. 경험상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가기 전부터 위계화된 서열구조가 등장하고 있었고, 아직 중고등학교에서 볼 수 있는 ‘노는 애’ 혹은 ‘일진’의 모습이 구체화되지는 않았어도 그 잠재적인 모습들은 거의 상위 그룹에서 형성되어 간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이 구조는 사실상 고착되어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이어지게 된다.
가장 높은 서열을 가진 일진 그룹은 반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학급의 다른 구성원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 즉, 이들은 권력을 갖고 있다. 어디서나 권력은 자원에 대한 통제권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자원은 원하는 자리, 아침마다 나오는 우유 등 사소한 것부터 다른 학생들의 금품에 대한 접근권처럼 범죄에 준하는 것까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원에 대한 통제권 때문에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부수적 수입에 불과하다. 기질이 되었든 사회화의 영향이 되었든 일진 그룹은 권력 그 자체를 위해 움직이며 다른 학생들을 위협한다.
그 다음으로 가장 낮은 서열을 가진 찐따 그룹이 있다. 이들에게는 당연히 권력이 없다. 권력은 한정된 자원이고 그 배분은 극히 불평등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일진 그룹, 그리고 때로 중간의 양민 그룹 또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그 자체로서 즐기기 때문에 찐따 그룹은 자주 희생양이 된다. 아예 공기처럼 무시당하는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 학급 구성원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도맡아서 해야 하거나 심심풀이 샌드백처럼 ‘장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장난’은 실질적으로 위계를 확인하고 타인에게 과시하는 기능을 하는데, 서열이 낮은 이들일수록 더 높은 수위의 ‘장난’을 견뎌내야 한다. 이 수위도 말 그대로 장난에서 범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있다(이것이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장난이었어요’라는 말을 애용하는 이유다).
‘장난’을 견디지 못할 경우 서열 구조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기에 싸움이 일어난다. 위계 서열이 같은 소집단 내에서든 그 바깥에서든 싸움이 일어나는 원인 대부분은 ‘장난’과 서열 때문이다. 요컨대 서로 간 서열에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한 수위의 “장난”을 치면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난다. 또 서열을 계속 확인하기 위해서 장난의 수위는 점차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높아지는 경향이 조절이 안 될 경우 도전이 발생하여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머지 학급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룹은 양민이다. 이들은 스펙트럼에 따라서 일진과 친한 준일진일 수도 있고, 찐따와 친한 준찐따일 수도 있다. 혹은 신체적 힘은 일진에 가까운데 여러 이유로 인하여 양민에 속한 경우도 있다. 대체로 획일적인 이미지로 사회화되는 찐따와 일진과 달리 양민 그룹은 가장 그 모습이 다채로운 그룹이다. 그리고 이 다채로움은 양민 집단의 유동성으로 이어지는데, 이 유동성을 중심으로 학급의 서열 변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일진-양민-찐따의 서열화가 거의 완료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격렬한 권력 구조의 변동이 시작되는 때이기도 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 시기가 청소년들의 성장기이기 때문에 그렇다. 학급에서의 서열은 단순화하면 신체적 힘과 물리적 폭력을 쓸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인망)으로 결정되는데 자연스레 키가 크고 외향적인 학생들이 유리해지는 구조다.
여기서 키의 성장은 매우 다양한 시기에 제각각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변동성의 중요한 원인이다. 초등학교 때 장신이어서 외향적 성격과 함께 잠재적 일진 그룹에 들어갔던 아이여도 중고등학교를 거쳐 성장이 정체되어 양민 그룹에 들어가거나 심지어 찐따 그룹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역으로 초등학교 때는 그저 그랬지만 중학교 때 이후로 키가 빠르게 커져서 일진 그룹에 들어가거나, 일진이 치는 ‘장난’에 도전해 서열을 뒤집어버릴 수도 있다.
물론 변동성이 있다고 해서 그 폭이 과장될 것까지는 없다. 일진에서 찐따로 혹은 찐따에서 일진으로 바로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계층변동은 서서히 일어나는 편이고, 하향 이동이든 상향 이동이든 양민은 어떻게든 거쳐 가기 마련이다. 혹은 기질적 특성이나 사회적 요인 때문에 양민 그룹에 그대로 정착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 매해를 거치면서 학급의 구성원들이 섞이는 것은 5명으로 구성된 소집단 네트워크가 고착화되는 것을 막고 계층구조를 유동적으로 바꿔준다. 그 전해에는 찐따그룹에 가까운 소집단에 있었어도 그다음 해에는 그 전 학급의 네트워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에 조금 더 상위에 있는 양민 그룹에 자연스레 녹아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계층구조 간 역동적인 권력변동에 더해서 주목할 점은 각 소집단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위계관계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성장으로 인한 권력구조 변동이 거의 마무리 되는 고등학교에서도 갈등이 지속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갈등의 가능성은 소집단 내부 혹은 계층 내부에서 중학교 때보다는 적은 빈도지만, 계속 상존한다. 심지어 이는 가장 권력과 관련 없어 보이는 찐따 그룹 내부에서도 충분히 자주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들에게는 권력을 향유하고 행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권력을 향한 의지는 여타의 구성원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또래집단에서의 사회화 압력
마키아벨리의 혜안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마키아벨리는 신분이 명백히 구분되는 집단을 다스리는 것보다 귀족들의 과두정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게 더 힘들다고 말한 바가 있다. 귀족 과두정에서는 피치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통치자와 동등한 존재라고 여기기에 더 쉽게 서열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찐따는 양민과 일진에, 양민은 일진에 도전할 수 없지만, 찐따 내부에서는 얼마든지 도전과 권력변동이 이루어질 수 있다(물론 일진들은 이를 매우 즐겁게 구경한다).
이러한 야생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권력의 행사와 권력의 이동은 개인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면밀히 관찰될 가치가 있다. 발달심리학자 주디스 해리스는 그의 저서들에서 개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부모의 양육이 아닌 유전적 영향과 또래집단에서의 사회화 압력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그는 여기서 인간이 ‘지위 체계’라는 마음의 체계를 갖고 있다고 가정한다. 자신을 둘러싼 또래집단에서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볼지, 정확히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일반적 평가’를 끊임없이 알아내고자 하는 심리 기제를 뜻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적절한 전략을 도출해내기 위해서이다. 만약 찐따 그룹의 학생이 스스로를 일진의 지위로 착각하고 일진과 “동등”하다는 듯이 행동하면 그는 물리적 폭력으로 서열을 각인 당하게 될 것이다.
청소년기에 이루어지는 숱한 갈등과 폭력은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자 혹은 방어하고자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지위 체계를 통해 자신에 대한 일반적 평가와 시선을 설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주디스 해리스는 10대 후반에 가서 또래집단 내에서 스스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익숙해지면, 성인이 되어서도 비슷한 전략을 계속 사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은 키와 임금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인데 흥미롭게도 그가 인용한 연구에서는 성인의 키보다 10대 때, 즉 청소년기의 키가 임금과 더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격이 형성되는 10대 때의 키가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끼치고, 이 지위가 외향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에 영향을 끼치고, 이러한 성격들이 더 높은 임금에 도전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소년기에 만연한 갈등, 폭력, 사회적 긴장은 개개인에게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갈등에서 패할 경우에 혹은 갈등을 어설프게 만들어낼 경우에, 자신의 지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규범을 찾아내지 못할 때에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게 된다. 이긴다면 지위를 높일 수 있겠지만 진다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다.
설령 계속 이기고 공격적인 성향을 극대화 한다고 하더라도 이 과정은 영원히 진행되지는 않는다. 침팬지와 인간은 패자 연합을 결성하여 과하게 지배적인 성향을 보이는 개체를 집단에서 배제하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진이 서열 확인을 양민에게서 조심스럽게 받아내거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많은 양민이 일진과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과도한 ‘장난’은 필연적으로 일진 집단 내에서도 인망을 잃게 만든다. 더욱이 성장에서 밀려나 신체적 힘이라는 자원에서 비교우위를 상실할 때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전쟁은 무엇에 좋은가?
인간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된다. 일찍부터 어른들이 ‘싸우면서 큰다’라고 지적한 것은 인간의 발달과정에 대해 누적된 관찰로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 싸우면서, 맞으면서, 때리면서, 지위를 향상시켰다가 다시 내려가게 되면서, 사회적 네트워크를 주도하거나 배제 당하게 되면서 인간은 숱한 사회적 전략과 대처방안을 체득하게 된다. 그야말로 몸으로 배운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은 정말 폭력적이다. 나 또한 이전에는 찐따 그룹의 일원으로 아주 혹독하게 사회화의 ‘묘미’를 그야말로 몸으로 학습했다. 교실은 결코 아름다운 교육의 장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곳은 정글과도 같은 곳이고 무정부적 폭력,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인간이 정부를 발전시켜온 것은 고작해야 5천년이 조금 더 넘을 뿐이다. 수백만년 동안 인간은 무정부 상태에서 노골적 폭력을 통해서 사회화를 시켜오고 개인의 이기심을 통제해왔다. ‘저 새끼 재수 없어’라는 낙인은, 지배 성향이 강한 개체를 통제하고 사회적 규범을 따르지 않으려는 무임승차자를 처벌해 집단행동과 협력을 이끌어내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런 낙인이나 폭력은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실제로 옳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언 모리스가 “전쟁은 무엇에 좋은가?”라는 질문에 답한 바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인간 사회를 부유하고 평화롭게 만든 것은 전쟁 때문이라고 했다. 구성원들 내부의 폭력을 억제하고 더 상위의 권위를 통해 평화를 강제하면서 인간 사회는 더욱 발전하고 도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절대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자유를(폭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해서)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더 큰 공동체를 만들어 더 큰 협력을 이끌어내려면 전쟁을 해야만 했다. 이언 모리스에 있어서 현재 유럽 연합의 그리스 위기는 전쟁이 허용되지 않아서 초래되는 것이다. 과거 영국은 외채를 갚지 못한 아테네 정부에 함선을 끌고 가서 강제로 받아낼 수 있었지만 지금 독일은 전차를 보내서 같은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이 그리스 위기의 근본적 이유라는 것이다.
물론 이언 모리스는 작금의 인간의 파괴 능력이 전례 없이 강해졌기에, 또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극도로 민감해졌기에 전쟁이라는 선택지는 무조건 피해야 하는 선택지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세계적 협력이 강조되는 지금일수록 더더욱, 전쟁이 우리를 지금 이곳으로 어떻게 데려왔는지 알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럴수록 전쟁을 피하는 지혜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같은 논리가 침팬지 집단과도 같은 청소년기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나쁜 것이다”와 “전쟁을 통해 인간 사회는 평화로워졌다”라는 말이 모두 진실이듯이, “폭력은 나쁜 것이다”, “누구도 맞을 이유는 없다”와 “싸우면서 큰다”는 둘 다 진실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학교폭력은 분명 근절되어야 할 관행이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경험과 관찰, 그리고 몇몇 짧은 독서로 미루어보아 인간은 싸우면서, 맞으면서, 때리면서 큰다고 믿는다. 우리 인간과 그 조상들이 수백만 년 동안 그래왔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이 지금 국제질서에서 그러는 것처럼 인위적으로 억제되었을 때, 인간의 성격형성은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영국의 뇌과학자 수전 그린필드는 [마인드 체인지]에서 디지털 문명 이전에 구축된 인간의 인지구조가, 디지털 매체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극에 지나치게 노출되면서 큰 변화를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 책의 이름이 바로 ‘마음 변화; 마인드 체인지’인 것이다. 그는 이 변화에 대하여 확답할 수 없지만, 근거 없는 낙관론 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확실히 디지털 매체에 어릴 때부터 과도하게 노출되면 집중력과 참을성을 갉아먹으며, SNS의 인간관계는 성격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다. 청소년기의 발달 과정에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변화 또한 비슷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 사회의 발전방향 때문에 폭력과 갈등은 극도로 억제되고 있고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성격형성이 예측하지 못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여담으로, 나는 서울대학교에 다니면서 일진, 혹은 ‘잘 나가는 애’가 없는 학교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리고 이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소위 명문대 바깥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혹은 조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는 모두 학교는 곧 정글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은 학교에서 펼쳐지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갈등의 역학을 도저히 알지 못하기에, 그것이 성격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정말 궁금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볼 성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