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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배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대법관 후보로 추천되었다. 김선수 변호사, 한승 전주지법원장, 이은애 서울가정법원 수석부장판사, 노태악 서울북부지법원장, 이동원 제주지방법원장, 임성근 서울고법 부장판사, 노정희 법원도서관장, 이선희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상환 서울중앙지법 민사 제1수석부장판사 등 9명과 더불어서다.

대법원장은 이들 가운데 셋을 골라 대통령한테 임명 제청하고 대통령은 국회 청문 절차를 거쳐 임명한다. 현직 대법관 가운데 고영한·김창석·김신 3명이 6년 임기를 마치고 오는 8월에 퇴임하는 데 따른 것이다.

사회 구성원 삶과 직결되는 대법원 판결

대부분 사람들은 대법원과 대법관은 몇몇 극소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며 산다. 자기자신과 이웃은 대법원과 대법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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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6월 21일 대법원이 휴일근로수당과 연장근로수당 중복 지급에 관해 내린 판결을 보면 알 수 있다. 휴일에 연장근로를 하면 휴일근로도 되고 연장근로도 되기 때문에 연장근로수당과 휴일근로수당을 모두 받는다는 상식을 뒤엎은 판결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주40시간 노동제를 채택하고 있고 여기서 말하는 ‘주’에는 월화수목금만 해당되고 토일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에 일하는 주40시간 초과 노동은 연장근로로 볼 수 없다는 몰상식한 판단이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일상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시절 엉터리 행정지침(휴일근로는 연장근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을 뜯어고친 덕분에 현재 시점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수많은 노동자가 꼼짝없이 어처구니없는 불이익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대법관이 되느냐에 따라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삶의 질과 무늬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나는 문형배가 대법관이 되면 이런 엉터리 판결에 절대 힘을 보태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겪고 알고 있는 범위에서 그 이유를 적어보겠다. 좀 길지만 읽어봐 주시기 바란다.

문형배는 발언도 또렷했다

1965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문형배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진주 대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법학과를 졸업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18기로 법관에 임용되었다. 법관에 임용된 뒤에는 줄곧 부산·경남 지역에서 판사 생활을 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경남도민일보 사진

부산지방법원과 부산지법 동부지원, 창원지방법원과 창원지법 진주지원, 부산고등법원과 부산가정법원이 문형배 판사의 근무처였다. 서울에 있는 각급 법원이나 법원행정처에서 활동한 경력이 없는 100% 지역법관이다. 서울 판사=경판(京判)이 아닌 향판(鄕判)이다.

문형배 판사는 2004년 2월부터 2007년 2월까지 3년 동안 창원지방법원에서 부장판사로서 제2형사부와 제3형사부를 맡은 적이 있다. 경남도민일보에서 내가 창원지법을 맡아 출입한 시기는 2005년 3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1년 10개월이다.

이 때 나는 문형배 판사의 재판 진행과 판결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고 관련 기사를 제법 많이 썼다. 경남도민일보 누리집에서 ‘김훤주’&‘창원지방법원’으로 검색하면 679개 기사가 뜬다. 김훤주가 쓴 기사 가운데 ‘창원지방법원’이 들어가는 글이 679개라는 말이다. 다시 ‘김훤주’&‘문형배’로 검색하면 252개가 나온다. 김훤주가 쓴 ‘문형배’ 관련 기사가 그만큼이라는 얘기다.

창원지법을 출입하고 나서야 문형배 판사를 알게 되었다. 출입기자였지만 공식 자리에서 소개를 받고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취재 목적으로 재판을 방청하려고 법정을 드나드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문형배는 창원지법 315호 대법정의 재판장이었다.

문형배는 다른 판사들과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다른 판사들은 말을 입 안에 넣고 웅얼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알아듣고 싶으면 알아듣고 알아듣지 못하겠거든 알아듣지 말라는 식이었다. 하도 심해서 변호사 단체에서 문제를 삼은 적이 있을 정도였다.

문형배는 그렇지 않았다. 또렷또렷하게 말했다. 어쩌다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알아듣지 못하면 한 번 더 또렷하게 일러주곤 했다.

또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검사·피고인·변호인한테 숨기지 않았다. 좋으면 좋은 감정을 싫으면 싫은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옳다고 말했고 틀렸다고 생각하면 틀렸다고 말했다.

다른 판사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았다. 옳다고 생각하는지 틀렸다고 생각하는지 나타내는 법이 없었다. 좋아도 좋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고 싫어도 싫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판사는 검사·피고인·변호인한테 자기 생각이나 감정이 드러나면 안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문형배는 일부러 그렇게 했다. 재판부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아야 피고인·변호인이 그에 걸맞게 소송을 준비하고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재판부의 생각과 감정도 피고인 등에게는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문형배의 판결에 지역사회는 환호했다. 경남도민일보 '바튼소리'.
문형배의 판결에 지역사회는 환호했다. 경남도민일보 ‘바튼소리’.

또 하나는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낱말과 사실을 법정에서 이야기한다는 점이었다. 객관 팩트만으로 생각과 감정은 배제한 채 재판을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던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삼아 역사의식까지 나름 갖추고 있는 법관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2005년 8월 마산 출신 당시 한나라동 소속 김정부 국회의원 아내의 유권자 매수 사건 재판이 대표적이다. 문형배는 1960년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싸운 3·15의거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징역형을 비롯하여 중형을 선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국가 권력이 시민사회를 압도하지 못하며 누구나 신변 위험 없이 비판을 할 수 있는 시대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희생이 있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섰던 3. 15의거 와중에 숨진 김주열‘님’이 대표적이다. 3. 15의거에는 또 (당시 고교생이던) 장애 시인 이선관‘님’도 참여했다. 3. 15시민회관 명칭 등 민주 성지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마산에서 사건이 터져 참 유감이다.”

“이번 사건은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기술적 한계 때문에 채택하고 있는 대의(代議)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주민 대표(국회의원)는 주권자의 뜻에 따라 선출되고 행동해야 한다는 원칙을 방해하는 중대 범죄다.”

당시 판사들은 대부분 자기 판단이나 감정을 숨겼다. 상식에 비추어 합당한 판단이나 감정도 그렇게 했다. 나아가 시대적·역사적·현실적 맥락 위에서 경중을 따지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대신 기계적으로 판단하거나 정실(情實; 사사로운 정이나 관계에 이끌림)에 따라서 선고하거나 했다.

뇌물 유권자 매수 등 부패 비리는 엄정 처벌

문형배는 창원지법에 있는 동안 이처럼 부패·비리 사건과 항소 사건 등을 주로 다루는 제3형사부 재판장을 맡았다. 금품선거나 뇌물 사건 등 공직자 관련으로는 대부분 엄정하게 판결하였다. 무거우냐 가벼우냐를 꼼꼼하게 가려내기를 한결 같이 했다.

2005년에는 의장 선거 과정에서 동료 의원들에게 돈을 뿌려 매수한 혐의로 당시 창원시의장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2006년에는 모래업자로부터 돈을 받아 챙긴 뇌물 혐의로 당시 창녕군수에게 징역 2년6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 때 문형배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 공직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하나를 끌어오기도 했다.

“염자(廉者) 목지본무(牧之本務) 만선지원(萬善之源) 제덕지근(諸德之根)이라.”

‘청렴은 목민관의 근본 의무로 온갖 착함의 근원이며 모든 덕행의 뿌리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전후하여 단체장과 시·군의원이 무더기로 기소되었을 때도 사안이 무거우면 반드시 징역형을 선고했다. 더욱이 유권자 매수를 위하여 금품을 뿌렸다든지 하면 금액이 아무리 적어도 당선 무효에 해당하는 벌금 100만 원 이상을 선고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지켰다.

문형배 경남도민일보

지방의원 선거에 나서면서 본인의 전과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후보자에게도 엄정한 판결을 내렸다. 일반인이 얼핏 보기에는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유권자를 속이는 기망(기만)행위라는 판단이었다. 도로교통법 위반·변호사법 위반 등 본인의 범죄 전력을 숨기는 허위정보공개를 한 피고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직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인 정직성을 의심하게 한다. 2005년 뇌물공여로 벌금형을 받은 적도 있는데 다시 유권자를 속였다. 피선거권을 장기간 제약하여 정치권의 신진대사를 촉진할 필요도 있다.”

그러면서 집행유예가 붙은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이렇게 되면 향후 10년 동안 공직선거에 나설 수 없게 된다. 2006년 10월 선고 당시 피고인의 나이가 69살이었다. 그러므로 벌금형이 아닌 집행유예형은 그 피고인에게는 다시는 공직을 맡을 수 없도록 중하게 책임을 물은 결과였다.

고의성이 없고 가벼운 사안은 과감하게 선처 판결을 했다. 음식을 대접하는 기부행위금지 위반이 사실로 인정되면 예외없이 벌금 100만 원 이상을 선고해 현직을 박탈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2006년 12월 유권자에게 술 밥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의원에게 현직이 유지되는 벌금 80만원을 선고했다.

“선거구 유권자 7명에게 19만 원 어치 음식을 제공한 사실은 인정된다. 하지만 피고인이 그동안 네 차례 선거에서 선거법을 어긴 적이 없고, 제공받은 사람이 선거사무실 직원과 자원봉사자 또는 그 친족으로 일반 유권자는 없었던 점을 참작했다.”

사회 약자 잘못에는 인간적 배려

반면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에게는 인간적으로 배려하는 판결을 많이 내렸다. 2007년 카드빚 때문에 자살하려고 자기가 묵고 있는 여관에 불을 질렀다가 구속된 피고인에게 문형배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10번 외어 보라”고 했다.

피고인이 “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을 되풀이한 다음 문형배는 이렇게 말했다.

“피고인이 읊은 ‘자살’이 우리에게는 ‘살자’로 들린다. 죽어야 할 이유를 살아야 할 이유로 새롭게 고쳐 생각해보라.”

이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면서 단행본 책자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를 선물하고 풀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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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살아오면서 성공하지 못한 일이 많겠지만, 그렇게 실패했다고 해서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미수에 그쳤으니 다행이지  자살이 성공했다면 이 자리에 설 수라도 있었겠느냐?”

비록 앞으로 또 실패를 하더라도 주저앉지는 말라는 취지였다.

처지를 비관해 집에 불을 지른 30대나 평범한 삶을 이어가다 한순간 실수로 도박에 빠져 교통사고를 낸 40대 등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재판 과정에서 어릴 때 헤어진 생모를 만난 20대에게는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시집을 선물했다.

2005년 9월 무면허 음주 운전으로 1심에서 징역 4월을 선고받은 24살 청년을 벌금형으로 풀어줄 때는 ‘갈치가운데토막론(論)’을 들먹였다.

갈치가 긴 것 같지만 머리 떼고 꼬리 자르면 얼마 안 남는다. 그조차 내장 덜어내면 정말 남는 것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얼핏 보면 길지만 이래저래 빼버리면 갈치가운데토막보다 더하다. 인생에서 가운데토막은 18~36살이다. 24살이니 12년이나 남았다 할지 모르지만 살아보면 아주 짧고 그 뒤에는 뭔가 새롭게 고쳐 살려 해도 그렇게 하기 참 어렵다. 젊은 한 때를 함부로 하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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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칼라범죄 엄벌 등 양형 기준 마련 주역

2006년 창원지법이 뇌물 등 부패·비리 등에 대한 양형 기준을 강화했을 때는 문형배는 그 한가운데 있었다. 공무원을 비롯한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온정적 판결이 국민으로 하여금 법원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며 새롭게 양형 기준을 마련하는 실무 전반을 추진했다.

창원지방법원 김종대 당시 법원장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나중에는 이렇게 마련한 강화된 양형기준을 전국 각급 법원에 퍼뜨리는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에는 법원 현실에 대한 문형배의 부끄러움이 있었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것이 법원이었다.

문형배를 비롯한 전국의 여러 지방법원의 1심 재판부가 뇌물이나 선거부정 사범에 대해 징역형이나 현직 박탈형을 선고해도 얼마 가지 않았다. 부산고등법원을 비롯한 상급 법원 항소심으로 넘어가면 집행유예가 붙거나 현직 유지형으로 감형된 선고가 부지기수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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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사안이고 다른 참작사유가 없는데도 법관에 따라 달리 판단하면 어떻게 국민들이 법원을 믿겠는가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문형배가 전국 어느 법원 어떤 법관에게도 일관되게 적용되는 양형 기준(물론 형량을 줄이거나 늘리는 법관 재량 부분도 포함된다.)이 필요하다고 본 근본 이유였다.

문형배의 생각은 이렇다.

“전체 판결의 1%밖에 안 되는 화이트칼라범죄에 대한 온정주의 판결이 법원 인상의 99%(불공정하다)를 결정했다. 믿음을 찾으려면 공무원·기업가 등 사회지도층 범죄를 엄단해야 한다.

법원의 이들에 대한 관대한 처벌은 성장 과정과 환경,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사법 당국의 온정적 태도에도 원인이 있다, 법관을 비롯한 법조인의 교제 범위가 화이트칼라에 편중돼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법조의 기업 친화적 분위기도 기업가를 범죄자로 처리하지 않는 데 일조한다.”

강자에게는 강하게 약자에게는 약하게

문형배에게는 판단 기준이 몇 개 있다. 첫째는 “무거운 것은 무겁게 가벼운 것은 가볍게”다. 중죄에는 중벌을 주고 경범죄는 가벼운 처벌을 한다는 얘기다. 둘째는 “강한 자에게는 강하게 약한 자에게는 약하게”다. 강한 자에게 숙이지 않고 약하다고 해서 깔보지 말자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하나도 새롭지 않고 당연한 기준이지만 이런 원칙을 세우고 지키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충분히 짐작된다.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어도 강자이면 가벼운 판결이 나오고, 지은 죄가 가벼워도 사회 약자한테는 무거운 판결이 나오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문형배의 판단 기준에는 ‘중책불벌(衆責不罰)’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처벌하지 않는다(또는 처벌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문형배가 인간적인 판결을 많이 내리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밤늦게 비가 내리는 1차로에서 시속 50km로 자동차를 몰다 한복판에 누워 있던 사람을 치어 중상을 입힌 혐의로 구속 기소된 피고인에게 문형배는 “그런 상황이면 판사인 나도 피할 도리가 없었겠다”며 2005년 6월 합의가 안됐는데도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법 판결 재판 판사 법원

판사들 거들먹거릴 것 없다는 문형배

창원지방법원 부장판사 문형배와 경남도민일보 법원 출입 기자 김훤주는 이 시절 이런 재판과 보도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어쩌다 한 번씩 전화도 주고받고 밥도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술은 물론 김훤주가 주로 마셨다. 둘이서 두런두런 주고받은 이야기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문형배 판사. 경남도민일보 사진.
문형배 판사. 경남도민일보 사진.

창원에 오기 전까지 문형배는 아내 자식과 함께 부산에서 살았다. 부산이 본거지인 셈이다. 창원지법 발령을 받으면서 창원으로 이사했다. 창원과 부산은 멀지 않다. 어쩌면 출퇴근을 할 수도 있는 거리다. 이사를 하면 아이 학교도 전학해야 하는 등 여러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른바 ‘아이들 교육 측면에서도’ 대도시인 부산에 그대로 눌러사는 편이 낫다고들 여기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내가 알기로는 법원뿐 아니라 지역 대학들 교수들 가운데도 본가를 부산에 두는 경우가 제법 많다.

그래서 왜 이사를 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지역 판사가 됐으면 지역에 대해 알아야 하고, 지역에 대해 알려면 지역에 들어가 살아야 하지 않느냐.” 

아, 이런 간단한 이치를 내가 가볍게 생각했구나. 이 사람은 단순히 법정 높은 법대에 앉아 법률이 정한 대로 판결만 내리는 사람이 아니구나, 자기 법정을 찾는 지역 주민들의 실상을 제대로 짐작하려고 나름 애쓰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판사들 거들먹거릴 것 없다는 말도 했다. 지금 만약 훌륭한 판결이 나오고 있다면 그것은 판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시대 상황이 좋아졌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법관들이 언제부터 권력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재판할 수 있게 되었나. 고작해야 1990년대부터다. 70년대 80년대에는 정권 입맛에 맞게 전해주는 쪽지대로 판결하는 그런 법원이 아니었냐. 민주주의를 위하여 자기 한 몸 바쳐온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이리 달라졌다.

법관들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한 일이 없다. 지금 법관들 대부분은 동료와 선배·후배들이 거리와 일터와 교실에서 민주화운동을 할 때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다. 판사들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저항 희망

대학 시절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저항했던 경험도 얘기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잠깐 나왔다 다시 들어가려니 경찰이 교문에서 불심검문을 했다. 법전은 까닭없는 마구잡이 불심검문은 불법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법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불법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항의를 했다.

가슴에는 오히려 하지 말자는 생각이 가득했다. 심장은 벌렁거렸고 가슴은 뛰었다. 연행되어 경찰서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훈방으로 풀려나왔다. 그렇게 잡혀가고 풀려난 학생이 수만 수십만 명이 되겠지. 그런 가운데 하나가 나였고. 자신의 소소한 저항을 떠올리며 문형배는 살짝 웃었다.

문형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학교 다니면서 제대로 성한 옷을 입은 적이 없다고 했다. 교복 바지 엉덩이가 너덜너덜 헤져서 누덕누덕 누벼 입은 얘기를 했다. 나도 학교 다닐 때 그랬다. 차마 나다니기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학교 갈 때나 돌아올 때 책가방으로 누빈 엉덩이 교복 부분을 가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려면 가방을 메는 것도 아니고 드는 것도 아니고 이상하게 위치시켜야 했다. 집에 와서도 체육복 말고는 달리 입을 옷이 없었다. 우리는 같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문형배 판사 블로그 '착한사람들을 위한 법 이야기' http://blog.daum.net/favor15
문형배 판사 블로그 ‘착한사람들을 위한 법 이야기’

“사회에 감사하라” 김장하 선생의 장학생 

경남 진주에 가면 지역사회에서 높임을 받는 어른이 한 분 계신다. 김장하 선생이다.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고, 남성문화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다. 일제 치하 진주 백정들의 인권해방운동을 기리는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도 맡았다. 명신고교를 설립 운영하다가 손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리를 잡자 국가에 헌납도 했다.

김장하 선생의 돈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똥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그래서 선생은 장학사업도 벌였다. 문형배도 선생에게서 장학금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김장하 선생을 찾아 인사를 올렸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감사드립니다.”

선생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아니었어도 자네는 오늘의 자네가 되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자네를 도운 게 있다면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사회에서 얻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었을 뿐이니 자네는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

문형배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앞에서 적은 문형배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보면 사회에 감사도 하고 보답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이런 대법관이 우리나라에 한 명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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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법관 출신 대법관은 씨가 마른 현실

하나만 더 얘기하고 싶다. 대법관 후보 면면을 보면 수도권 아닌 비수도권에서 줄곧 활동하는 인물은 문형배를 빼면 하나도 없다. 후보 가운데 판사 출신들은 서울에 있는 지방법원이나 고등법원 또는 법원행정처·법원도서관에서 근무했고 변호사·교수 출신도 마찬가지 서울이 근거지다.

게다가 지금 대법원에 남아 있는 다른 대법관 10명도 모두 서울 출신 일색이다. 만약 누군가 우리 사회 전체에서 지역=비수도권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나는 1만 개도 더 제출할 수 있다.

대법원 구성도 마찬가지다. 대법관에서 비수도권=지역법관 배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줄곧 이어져 왔다. 역대 대법관을 통틀어도 2004년 물러난 조무제가 처음이고 그 뒤로는 이번에 물러나게 되는 김신이 두 번째다. 70년 역사에 고작 2명이 전부다.

만약 이번에 지역법관 출신 후보가 대법관으로 임명되지 않으면 간헐적으로나마 유지되던 가느다란 흐름마저 끊어지고 만다. 문형배는 ‘서오남’(서울대 출신, 50대, 남자)이라는 굴레에 가두어지는 인물이 아니다. 기득권 주류에 휩쓸릴 사람이 아니다. 문형배가 이번에 대법관이 되면 좋은 또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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