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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가 영작문에 도움이 되는가’

이 질문을 받은 적이 여러 차례 있습니다. 쓰기 공부가 필요한데, 좋은 글을 골라서 그대로 베끼면 해당 필자의 문장력을 전수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나온 질문이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직관에 비추어 ‘된다’파와 ‘안된다’파로 갈라지기 일쑤지만, 이 질문에 좀 더 성실하게 답하기 위해서는 쓰기와 읽기, 그리고 필사에 수반되는 인지과정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이 글에서는 필사와 작문 실력 향상 간의 관계를 조금 긴 호흡으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그 쓰기가 그 쓰기가 아니거든요

Aaron Burden on Unsplash
Aaron Burden on Unsplash

필사[筆寫]의 사전적 의미는 ‘붓으로 베껴 쓰다’입니다. 현재 다양한 종류의 필기구가 붓을 대신하고 있기에 ‘볼펜이나 만년필 등의 필기구로 자신이 닮고자 하는 텍스트를 그대로 옮겨 쓰는 일’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필사의 정의에는 ‘쓰기’가 포함됩니다.

그런데 필사는 쓰기일까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필사를 통해서 작문능력 발달을 도모하려 한다면 필사가 쓰기여야 합니다. 쓰기가 아닌 걸 열심히 해서 쓰기를 잘하겠다는 건 굉장히 이상한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필사는 글쓰기와 사뭇 다른 행위입니다. 필사는 ‘copying’으로, 쓰기는 ‘writing’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둘의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카피하는 일과 글쓰는 일은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필사의 인지과정

그렇다면 필사(베끼기)와 작문(글쓰기)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요?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필사할 때 우리가 하는 행동을 하나씩 짚어 봅시다. 제 예를 들어 보도록 하죠. 지금 제 컴퓨터 스크린에는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쓴 칼럼 하나가 띄워져 있습니다. 책상에는 노트와 펜이 놓여 있습니다.

J. Kelly Brito on Unsplash
J. Kelly Brito on Unsplash

필사를 시작하기 위해 스크린을 바라봅니다. 제목을 읽습니다. 노트에 “The East Germans”라고 쓰고 다시 화면을 바라봅니다. “of the 21st Century”를 읽으며 펜 끝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제 앞의 종이 위에는 “The East Germans of the 21st Century”라는 제목이 쓰여 있습니다. 짧은 칼럼 제목의 필사(copying)가 완성되었습니다.

자 이번에는 필사 과정을 분해해 봅시다. 초간단 필사를 하며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특별히 어려운 단어는 없었습니다. 해석도 바로 되는 제목이었습니다. 바로 이해가 되었기에 막힘 없이 읽었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면, 성격상 지나치지 못하고 뜻을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

2. 짧은 제목이었지만, 두 번에 걸쳐 나누어 썼습니다. (저도 모르게 두 번에 걸쳐 썼는데, 아마도 정확성을 기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살짝 피곤해서 집중력이 모자란 탓도 있을 거고요.)

3. 순식간에 “The East Germans”를 읽고, 이를 저의 단기 기억(short-term memory)에 넣었다가 손끝을 통해 세상으로 내보냈습니다. 이를 더 분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화면에 떠있는 텍스트가 눈을 통해 시신경을 타고 뇌로 들어와 잠시 머물렀습니다.
• 뇌는 이 정보에 기반하여 근육운동을 ‘명령’했습니다.
• 이는 손의 움직임을 발생시켰고 펜 끝을 통해 글자로 종이 위에 새겨졌습니다.

4. “of the 21st Century”에 대해서도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습니다.

5. 이제 디지털 화면 속의 제목이 제 노트 위에 아날로그로 존재합니다.

6. 첫 문장 필사로 넘어갑니다.

데이비트 브룩스의 '옵에드' 칼럼 https://www.nytimes.com/2018/01/29/opinion/east-germany-immigration-usa.html
뉴욕타임스, 데이비드 브룩스의 칼럼 중에서

이와 같이 필사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베끼기 위해서는 읽어야, 그것도 꼼꼼히 읽어야 합니다. 눈으로 읽고, 머릿속에 잠깐 담고, 손을 움직여 쓰는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필사에는 짧은 읽기와 기억하기와 쓰기가 포함됩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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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 (짧은 표현 읽기 + 머리에 담기 + 펜으로 쓰기) ×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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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처음 보거나 철자가 굉장히 복잡한 단어가 나올 경우 이 프로세스가 중단될 수 있습니다. 모르는 단어를 사전을 찾아보거나, 복잡한 철자를 하나하나 베껴 쓰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셜 미디어를 확인하거나 웹툰을 보는 등의 딴짓은 언제나 가능하지요.

화면 속 텍스트가 종이 위로 자동 복제될 리가 없습니다.
텍스트와 종이 사이에는 늘 우리의 두뇌와 손, 그리고 펜이 있습니다.

쓰기의 인지과정

자 이번에는 쓰기 과정을 살펴봅시다. 사실 쓰기도 어떤 종류의 글을 어느 정도 길이로 쓰는가에 따라 다양한 과정을 거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필사와는 사뭇 다른 인지과정이 수반됩니다. 글의 주제가 필사이니만큼 쓰기 과정은 압축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일반적인 쓰기는 머리 속에 있는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됩니다. 아이디어를 글로 풀어내기 위해서 적절한 단어와 문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위에서 든 필사의 예에서처럼 누군가가 이미 써놓은 단어와 문장에서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무턱대고 쓰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쓸 내용에 대한 얼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지금 ‘(1) 필사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서 (2) 필사와 쓰기의 인지과정을 비교하고 (3) 이에 근거하여 필사의 효용과 한계를 밝혀야겠다’는 계획 하에 글을 써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사에는 이런 계획이 없습니다. 그저 저자가 써놓은 문장을 충실히 따라가며 베끼는 것입니다. 이 같이 쓰기의 과정은 문장을 정확히 옮겨 쓰는 필사 과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필사, 즉 '베껴+쓰기'는 쓰기보다는 베끼기에 가깝습니다.
필사, 즉 ‘베껴+쓰기’는 쓰기보다는 베끼기에 가깝습니다.

그럼 필사는 대체 어디에 쓰는 거지?

필사가 작문과 다른 과정을 수반한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그렇다고 필사가 쓰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느냐. 그건 또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사는 ‘베껴’ + ‘쓰기’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쓰기보다는 베끼기에 가까운 활동이지요. 베끼려면 잘 봐야 합니다. 대충 보아서는 정확히 옮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필사 과정에서의 읽기는 평상시의 읽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요소 하나 빠짐없이 꼼꼼히 읽어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구두점, 개별 단어, 문법 세 가지 영역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필사는 구두점에 주목하게 합니다.

평상시 글을 읽을 때라면 쉼표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필사를 위해서라면 쉼표 하나도 건너뛸 수 없습니다. 콜론이나 세미콜론 같은 구두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학술적인 글에서 콜론이나 세미콜론이 널리 쓰이지만 이들의 쓰임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들이 쓰인 문장을 필사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필사를 하다 보면 평상시에 그냥 넘기던 구두점까지 볼 수밖에 없다.
필사를 하다 보면 평상시에 그냥 넘기던 구두점까지 볼 수밖에 없다.

2. 필사는 개별 단어에 주목하게 합니다.

평상시 읽기 중에 영어 표현 ‘take a shot’(시도하다, ~해보다)을 처음 만났다고 해봅시다. 대개 문맥과 ‘shot’만 보고도 ‘take a shot’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사가 있어야 하니 ‘take’가 쓰이긴 했지만, 의미로 보면 ‘take’가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겁니다. 그래서 글을 읽고 나면 ‘have’가 쓰였는지, ‘get’이 쓰였는지, ‘take’가 쓰였는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필사에서는 ‘take’를 슬쩍 넘어가거나 아예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Take’를 베껴 써야 하기 때문에 단어를 읽고 머리 속에 잠깐 담았다가 손 끝으로 내보내게 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take’라는 단어가 기억될 확률이 높아지죠. 한 번 썼다고 완벽하게 기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평상시의 읽기 패턴을 사용했을 때보다 더 잘 기억하리라는 점은 자명합니다.

3. 필사는 문법요소에 주목하게 합니다.

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에는 특정한 자리에 a가 있는지 the가 있는지, 아니면 아예 없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논리와 정보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관사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내용은 파악되거든요. 그런데 정확히 쓰려면 관사를 안 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필사는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고 거기에 나오는 단어와 구두점, 나아가 문법 요소 하나하나를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평상시에 잘 보지 않던 요소들도 다시 한번 보게 되죠. 필사에서의 읽기와 평상시의 읽기가 사뭇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필사를 통해 글쓰기 실력이 일부분 향상될 수 있습니다.

필사가 하지 못하는 것

하지만 작문은 필사보다 훨씬 많은 요소들을 포함합니다. 필사한다고 글 전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흐름은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어디에 대화를 배치하고 어디에 묘사와 설명, 독백을 넣을 것인지 등을 단번에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글을 쓰려면 이 모든 것들을 잘 해내야 하지요.

도구 수단 연장

인지활동의 종류라는 관점에서 쓰기(writing)는 글을 쓰기 전의 대략적 계획에서부터 브레인스토밍, 전체의 판 짜기, 아이디어의 전개, 퇴고와 편집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에 비해 필사(copying)를 할 때는 보통 한 문장 안에서 비교적 단순한 활동이 반복됩니다.

또한, 필사자의 언어능력에 따라 한 번에 베낄 수 있는 텍스트의 양이 달라집니다. 우선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이라면 한국어 작품 필사 시 훨씬 긴 표현을 단번에 옮길 수 있습니다. 스페인어를 처음 배우는 학습자가 스페인어 텍스트를 필사할 경우와 비교해 보시면 이 점이 잘 이해되시리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어가 편한 학습자는 한 번에 비교적 긴 문장을 필사할 수 있지만, 한국어만큼은 못됩니다. 영어 초심자라면 긴 문장을 한꺼번에 베껴 쓸 엄두를 아예 내지 못하겠죠.

외국어 텍스트 필사의 경우 단어를 알아도 텍스트의 구조가 복잡해지면 한두 단어 수준의 베껴쓰기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야말로 ‘한 단어씩 받아쓰기(word-by-word dictation)’가 되는 것입니다. 아예 읽기 힘든 단어가 등장하면 ‘한 글자씩 받아쓰기(letter-by-letter dictation)’가 되어버리고요.

글쓰기라기보다는 깊이 읽기로서의 필사

이상에서 필사와 글쓰기의 차이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필사는 ‘베껴쓰기’지만, 쓰기(writing)라기보다 베끼기(copying)로 이해해야 한다.
  2. 베꼈을 때 쓰기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이는 글쓰기의 전체 과정에 수반되는 다양한 활동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3. 필사는 본격적인 습작보다는 꼼꼼히 읽기를 위해 적합한 활동이다.
  4. 따라서 ‘텍스트 깊이 읽기’에 목표를 둔다면 필사가 좋은 선택이지만 영작문 전반을 향상하기 위한 주요 전략(main strategy)으로 삼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삶을 위한 영어
필사는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필사를 통해 긴 호흡으로, 또 손끝으로 텍스트를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 향상을 위한 제 1의 훈련 방식이 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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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영어공부

언젠가 Claire Kramsch 선생님 수업에서 들은 이 한 마디가 여전히 제 심장에 남아있습니다. 너와 나를 가르고, 마음에 상처를 내며, 목을 뻣뻣이 세우는 영어가 아니라 성찰하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도록 만드는 영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 ²

  1. 외국어를 배우는 두 가지 목적
  2. 영어는 인풋? – 1. 자막, 넣고 볼까 빼고 볼까 
  3. 영어는 인풋? – 2. 크라센, 인풋 이론을 체계화하다
  4. 영어는 인풋? – 3. ‘학습’하지 말고 ‘습득’하라
  5. 필사, 영작문에 도움이 되나요?
  6. 영어는 인풋? – 4. 외국어 습득엔 ‘순서’가 있다?
  7. 영어 이름, 꼭 따로 필요할까?
  8. 한국식 영어 발음, 꼭 고쳐야 할까요?
  9. 영어교육과 홍익인간의 관계
  10. 쓰기의 마법: 생각과 글쓰기의 관계
  11. 언어는 습득하는 게 아니라고?
  12. 네이티브 이데올로기 그리고 네이티브의 윤리
  13. 영어는 인풋? – 5. 인풋 가설의 ‘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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