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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편(한국 웹툰, 소수의 희망과 다수의 불합리 사이에서)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만 읽어도 무방하지만, 1편을 먼저 읽으면 더 좋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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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웹툰을 다루기 전에 우선 출판만화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물론 심지어는 근래 데뷔한 작가 중에서도 만화잡지가 번성하던 시절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수두룩하다. [아이큐 점프]나 [이슈] 같이 계속 명맥을 유지하는 만화잡지가 있지만, 이들 잡지의 존재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이제 많지 않다.

심지어 서울문화사가 발행하는 [아이큐 점프]는, 자사 웹툰 플랫폼인 ‘빅툰’에 게재되는 작품들을 약간의 수정만 거쳐서 그대로 게재하는 등 사실상 국내외 작품을 단행본이 발매하기 전에 앞서서 공개하는 ‘카탈로그’로 전락한지 오래다.

1989년 창간된 이래 여전히 발행 중에 있는 서울문화사의 [아이큐 점프]의 2017년 7월 15일 발행호 표지. 그러나 작품의 수는 물론, 잡지 역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1989년 창간된 이래 여전히 발행 중에 있는 서울문화사의 [아이큐 점프]의 2017년 7월 15일 발행호 표지. 그러나 작품의 수는 물론, 잡지 역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웹툰’과 ‘출판만화’는 만화라는 공통점을 빼면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개별적인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웹툰의 성장은 출판만화와 불가분이었고, 둘은 지속적으로 상호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무엇보다 두 매체 모두 비슷한 명암을 지니면서 성장해왔다. 웹툰이 받는 찬사와 비판은 출판만화의 그것과 큰 틀에서는 비슷하다.

출판만화가 지나온 길을 반면교사로 삼아 웹툰이 나아갈 길을 모색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싹이 터 1990년대 중후반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불과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대다수 잡지가 사라지는 최악의 시기에 놓이고 만 출판만화, 그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만화잡지의 성장과 급격한 몰락

엄밀하게 따지면 한국 잡지만화의 첫 시작은 해방 직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당시 창간된 만화잡지들은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결국 1960년대 본격적으로 한국에 등장한 ‘대본소’에 자리를 내주면서 모두 폐간되었다.

물론 ‘잡지에 연재되는 만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1970-80년대를 추억하는 요소가 된 [새소년], [소년중앙], 그리고 [어깨동무] 같은 아동잡지의 별책부록들은 독립적인 형태의 만화잡지는 아니었지만, 이렇다 할 만화잡지가 없는 상황에서 톡톡히 만화잡지로서 기능을 수행했다.

이후 [어깨동무]를 발행하던 육영재단이 1982년 아동 대상 월간 만화잡지 [보물섬]을 발행하며 한동안 변칙적으로 유지되던 한국 만화잡지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1985년에는 전두환 정부의 유화 정책을 틈타 본격적으로 성인 남성을 주된 독자층으로 잡은 월간 만화잡지 [만화광장]이, 1988년에는 한국 최초의 본격 여성 만화잡지 [르네상스]가 창간되었다.

그리고 1989년, 여성잡지 [우먼센스]로 잡지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서울문화사가 일본식 만화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한 [아이큐 점프]를 창간하며 만화잡지는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오르게 된다.

육영재단 [보물섬]의 창간호 표지
육영재단 [보물섬]의 창간호 표지
애니메이션 회사로 활약하던 대원동화가 만화출판사 ‘도서출판 대원’(현, 대원씨아이)을 설립하고 [아이큐 점프]의 대항마로 [소년 챔프](현 [코믹 챔프])를 1990년에 창간했다. 뒤이어 1991년에는 육영재단의 [댕기], 1993년에는 도서출판 대원의 [터치]와 서울문화사의 [윙크]가 창간되며 여성 만화잡지의 붐이 일었다.

1994년에는 도서출판 대원과 서울문화사가 각각 [영 챔프]와 [영 점프]를 창간하며 청년 남성을 타깃으로 잡은 만화잡지를, 다시 도서출판 대원이 저연령 아동을 대상으로 한 [팡팡]을 창간하며 한국 만화잡지는 더욱 세분화되었다. 여기에 1995년에는 [미스터블루], [화이트], [트웬티 세븐], [빅점프] 등 이전의 [만화광장]을 계승하는 성인 만화잡지가 창간되며 만화잡지를 찾는 연령층이 다양해졌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런 붐은 오래가지 않았다. 만화잡지 자체는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 창간되었지만, 그 시기를 기점으로 창간되는 만화잡지보다 폐간되는 만화잡지 수가 더 많았다. 2000년 [빅 점프] 폐간을 시작으로 2002년 [나인]과 [화이트]가 폐간되었다. 대원씨아이의 계열사인 학산문화사가 야심차게 창간한 성인만화잡지 [웁스]는 창간 6개월도 채지나지 않아 청년~성인 여성 만화잡지 [쥬티]와 함께 폐간됐다.

다시 2003년에는 [영 점프]가 폐간되고, 2005 ~ 2006년에는 [아이큐 점프]와 [소년 챔프]가 주간에서 격주간으로, [이슈]가 격주간으로 월간으로 발간주기가 조정되었다. 그 이후로도 만화잡지들은 폐간되거나, 살아남는다고 해도 다른 잡지와 합치거나 발간주기를 더욱 늘리는 방식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리고 2017년 현재, 한국에 남은 만화잡지의 수는 단 9종에 불과하다.

  1. [아이큐 점프]
  2. [코믹 챔프]
  3. [이슈]
  4. [찬스 플러스]
  5. [파티]
  6. [코믹콘서트]
  7. [어린이 과학동아]
  8. [고래가 그랬어]
  9. [개똥이네 놀이터]

[우주사우나]나 QUANG 같이 독립출판물의 형태로 나오는 만화잡지들도 있으나, 일정한 간격을 지키지 못하고 무크 형식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만화잡지로 분류하기엔 다소 모호하다.

만화 단행본을 전문적으로 발간하는 출판사의 잡지들만으로 한정하면 6개 밖에 남지 않는다. 1990년대 출판만화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독자들과 만화계 인사들은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 끝없이 성장할 줄 알았던 출판만화가 초라한 모습을 맞이할 줄 예상이나 했었을까.

출판만화의 몰락과 책임론의 대두 

만화잡지와 출판만화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사실상 한국 만화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화잡지가 연이어 폐간하자 한국 만화 산업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 일었다. 동시에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던 한국 만화잡지가 왜, 무엇으로 인해 몰락했는지 그 책임 소재를 찾으려는 시도가 속속 등장했다. ‘책임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 청소년보호법 책임론 

우선, ‘청소년보호법’(이하 ‘청보법’) 책임론이 대두했다. 청보법 자체는 비교적 좋은 의도로 창설된 법이긴 했다. 청소년에 관련된 법령이 미성년자보호법, 식품위생법 등으로 다른 법들에 분산되었던 것은 물론 법마다 청소년과 관련된 기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청소년을 위한 법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90년대라는 여전히 권위주의적 관성이 지배했던 시대 환경은 ‘유해물’을 응징하겠다는 규제 중심의 법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 큰 문화적 부작용을 낳았다. 물론 청보법이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전에도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를 비롯한 몇몇 스포츠신문 연재만화가 미성년자보호법상 ‘불량만화’로 낙인 찍히고, 징벌 대상이 되는 등 한국 만화는 계속 정부 차원 탄압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1990년대 한국 만화의 탄압을 상징하는 만화가 된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초판본 표지. 현재 [천국의 신화]는 네이버 웹툰을 통해 다시 연재 중이다.
1990년대 한국 만화의 탄압을 상징하는 만화가 된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초판본 표지. 현재 [천국의 신화]는 네이버 웹툰을 통해 다시 연재 중이다.
게다가 1990년대 후반은 헌법재판소로부터 사전 검열이 위헌 판정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검열의 자장에서 한국 사회가 자유롭지 않던 시기였다. 공식적으로는 ‘검열’이 아닌 심의를 거쳐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분류된 매체들을 따로 분리해서 진열, 판매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만화에 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검열’과 큰 차이가 없는 생각으로 만화를 심의하던 이들은 조금만 폭력적이거나 성적인 묘사에도 ‘청소년 유해매체물’ 판정을 내리는 등 만화 판매에 제약을 가했다. 문방구나 서점들이 지레 겁을 먹어 한동안 만화 판매를 중단했던 시기도 청보법이 막 발효되었던 1997년 즈음의 일이다.

이러한 해프닝을 거치면서 청보법은 차츰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정부의 강압적이며 일방적인 규제가 만화 시장 전체에 영향을 끼쳤고, 심대한 후유증을 남겼다. 청보법이 발효된 1997년은 서점들도 만화 판매를 잠시 중단하고, [미스터 블루]나 [트웬티 세븐] 같은 성인 만화잡지가 폐간되었던 시기다.

정부는 검열적인 자세로 심의 체제를 운영했고, 그로 인해 많은 만화인이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자연스레 한국 만화가 겪는 모든 문제의 핵심 원인을 정부에 돌리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2. 대여점 책임론 

이어서 불거진 게 ‘대여점 책임론’이다. ‘청보법 책임론’이 정부 규제에 초점을 맞췄다면, ‘대여점 책임론’은 한국 만화 산업의 유통-소비 구조에 초점을 맞췄다. 대여점이 정가보다 훨씬 저렴한 값에 만화를 볼 수 있게 해 독자로 하여금 만화를 제값에 사서 보지 않게 했다는 게 대여점 책임론의 핵심이었다.

물론 한국 만화에서 대여점이 미치는 영향이 결코 적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 만화계 내부에서 맹위를 떨쳤던 ‘대본소’도 대본(貸本), 다시 말해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곳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만화책을 사서 읽는 대신 빌려 읽는 행위가 더 자연스러웠고, 그 시기는 오랫동안 지속됐다. 오죽하면 90년대 나온 만화잡지 일부에는 ‘이 책은 대여할 수 없습니다’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을까. 조금이라도 잡지와 단행본이 더 팔려야 이득인 출판사 입장에서는 대여점이 눈엣가시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사은 입장을 바꿨다. 대여점이 그저 독자에게 잡지나 단행본의 구매 의욕을 저하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아무리 잘 팔리지 않은 책일지라도 전국에 포진된 도서 대여점을 통해 고정적인 매출을 만들 수 있는 창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유의미한 수준으로 판매될지 의심스러운 온갖 일본 만화가 활발하게 라이센스 출판되었던 것도, 잡지 연재 없이 단행본으로 곧장 발행-판매되는 만화가 늘어난 것도 출판사와 대여점 사이의 미묘한 공생이 자리 잡힌 덕분이었다.

악수

출판사는 대여점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꿨지만, 작가가 대여점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단행본을 사는 독자보다는 대여점에서 더욱 싼 값에 빌려보길 원하는 독자가 많은 상황을 좋아할 작가가 얼마나 있었을까. 게다가 1997년 청소년보호법 논란으로 한 번 타격을 맞은 상황에서 1998년 IMF 경제위기까지 겹치면서 독자들은 단행본을 구매하기보다는 대여점에서 책을 빌려보는 것을 더욱 선호했다.

이전부터 작가들이 가졌던 대여점에 대한 좋지 않았던 감정은 출판만화의 본격적인 몰락과 함께 ‘책임론’으로 발전했다. 한국 만화가 몰락하고, 작가가 어려워지게 된 것은 독자에게 구매 의식을 제거한 도서 대여점의 책임이 되었던 것이다.

대여점 책임론을 주장하며 활발하게 활동한 단체가 바로 ‘자유의 검은 리본’(이하 자검댕)이었다. 현재는 일본에서 ‘Boichi’라는 필명으로 활동 중인 만화가 박무직이 주도한 자검댕은 한동안 강력한 만화 독자 단체였다. 자검댕은 청보법 폐지 의견을 내는 것은 물론이고, 대본소-도서대여점을 적극 비판했다. 독자로 하여금 주거지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만화 구매를 장려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만화가 박무직이 주도하여 결성된 ‘자유의 검은 리본’(자검댕)의 2002년 ACA 부스 사진. (출처: 두고보자)
만화가 박무직이 주도하여 결성된 ‘자유의 검은 리본’(자검댕)의 2002년 ACA 부스 사진. (출처: 두고보자)

자검댕 이전에도 PC통신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애니메이트나 ANC(앙끄) 같은 만화, 애니메이션 동아리가 있었지만 자검댕 만큼 팬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추동하던 단체는 그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 아마 그 이후에도 등장하긴 어려울 것이다.

책임론의 한계 

두 책임론이 일리가 없었던 건 아니다. 청보법이 만화계에 타격을 준 것은 분명했고, 대본소에서 도서대여점, 만화방으로 이어지는 문화가 만화 독자로 하여금 만화를 빌려보는 것을 더 익숙하게 한 건 사실이다.[footnote]여기에 어떤 대여점 책임론자들은 대여점으로 값싸게 만화를 보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던 문화가 초고속 인터넷망의 본격적인 보급으로 스캔본이 유통되며 더욱 독자의 구매 의식을 하락시켰다고 보기도 한다.[/footnote]

그러나 동시에 두 책임론은 모두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청보법이 문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사회는 애당초 1990년대 중후반 헌법재판소가 문화 콘텐츠에 대한 검열을 위헌으로 판결하기까지 정부 차원의 심의 (사실상 ‘검열’)행위가 어색하지 않은 사회였다.

문학은 물론 연극, 영화, 방송, 음악 모두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가뜩이나 ‘불량’의 상징으로 취급되던 만화에 대한 취급은 더욱 좋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만화잡지의 전성기로만 기억하던 1990년대 초중반은 청보법이 발효되던 시기보다 더욱 강도 높은 검열이 일상적으로 존재하던 시기였다.

대여점 책임론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은 만화잡지가 무척이나 뒤늦게 자리를 잡았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대본소나 도서 대여점이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1980년대 3저 호황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한국은 6.25 전쟁 등으로 인해 기반 산업 시설이 모조리 파괴된 국가였다. 대중문화는 제한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고, 책을 사보기 어려운 문화는 만화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책들도 전부 겪는 상황이었다.

또한, 1990년대 초중반에도 도서 대여점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앞서 1990년대 발행되던 일부 만화잡지에 ‘이 잡지는 대여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것은, 그 당시에도 도서 대여점들이 만화 출판사들이 경계 의식을 가질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전히 독자들이 만화를 빌려보는 문화가 익숙한 상황에서 1990년대 한국 만화는 다양한 잡지를 필두로 한 전성기를 맞이했었다. 도서 대여점이 한국 만화의 암적 존재였다면, 이러한 ‘암적 존재’가 위세를 발휘하는 상태에서 성장한 한국 만화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1990년대 말 한국 만화의 위기가 대여점 때문이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서울문화사 [윙크] 1995년 7월 1일 발행호의 표지. 오른쪽 상단에 ‘이 책은 대여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서울문화사 [윙크] 1995년 7월 1일 발행호의 표지. 오른쪽 상단에 ‘이 책은 대여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지워진 작가의 ‘자리’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1990년대 한국 만화를 차츰 몰락의 길로 걷게 한 것일까. 사람마다 견해는 다양하다. 1990년대, 한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했지만, 풍족해진 가계 살림에 비해 즐길만한 여흥거리가 없어서 한국 만화가 성장했다가 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으로 갈수록 컴퓨터 게임을 비롯해 다양한 여가 수단이 생기며 관심이 줄어든 것을 원인으로 보는 이도 있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로 본격적으로 일본 만화가 수입되며 한국 만화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1990년대의 호황기가 실은 겉으로 보기에만 호황기였을 뿐, 사실은 넓지 않은 풀에서 과열 경쟁하다 서로 한계를 드러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평가에서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존재가 있다. 바로 ‘만화가’다. 시장의 호황과 불황에는 관심이 있어도, 정부 검열과 규제로 인해 작가가 받는 피해를 말하는 사람은 있어도 정작 그 ‘만화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접근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마치 만화가가 한국 만화 불황기에 받았던 어려움들이 모두 외부적 요인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씁쓸하게도, 이를 현재 시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 만화는 1990년대 전성기 때에도 영세한 운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당시 한국 만화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자료가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만화가들과 나눈 인터뷰도 대다수는 작업 내용이나 자질구레한 신변잡기에 머물러 있을 뿐, 실제 그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 작업을 지속했는지 이렇다 할 자료를 찾기 쉽지 않다.

사람들은 시장의 호황과 불황을 이야기하고, 정부 규제를 비판하며 토론했지만, 정작 작가의 불합리한 처우와 구조적 모순에 대해선 별다른 관심을 쏟지 못했다.
사람들은 시장의 호황과 불황을 이야기하고, 정부 규제를 비판하며 토론했지만, 정작 작가의 불합리한 처우와 만화계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선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01년, 양여진과 박관형의 대화 

그나마 내가 제시할 수 있는 만화가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만화가 양여진이 2001년 6월 발행된 웹진 [두고보자] 4호에서 당시 [두고보자]의 필진 박관형(halim) [footnote] 박관형은 이후 여성만화잡지 [허브]의 편집장을 맡게 된다.[/footnote]과 나눈 인터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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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형: (중략) 단행본 계약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요. 만약 작가가 (다른 곳에서의 출간을 위해) 단행본출간을 거부하는 경우 불이익 같은 것이 있을까요?

양여진: 아직 단행본 계약을 정식으로 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약 3년 정도의 출판권이 출판사에게 주어지고 인세협약 등이 있습니다. 단행본을 타사에서 출판하려 하는 경우엔, 들어본 바에 의하면 약간의 트러블이 있은 후, 작가의 뜻에 따라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관형: 출판사가 허락해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겠지요. 상식적으로는…. 그런데, 계약을 정식으로 하신 적이 없다면…. 대부분의 경우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출판사에서 임의로 인세비율 등을 결정하여 진행해버린다는 뜻인지요. 이런 게 만화출판계의 관행처럼 되어 있다면 상당히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양여진: 네. 정식 계약서를 작성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인세로 10%를 받는다는 것 만 알고 있죠. 그게 관행이고, 저도 아무 생각 없이 따랐는데, 이번 일로 법적인 내용들을 남긴다는 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았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중략)

박관형: 출판계의 불황이 지속되면서 원고료와 인세 지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현재 어떤 상황입니까?

양여진: 서울문화사의 경우, 7월에 나오는 8월호의 고료는 8월 말쯤에 나오는 상황이고(사실 6월에 그린 원고죠), 인세는 정말 심각하게 늦게 지급되고 있습니다. 6개월 늦는 건 예사이니까요. 그 탓에 생활이 계획적이지 못하여 고민입니다. 카드값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될뻔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도 관행의 한 부분이 되가는 게 아닌가 우려됩니다. 내 친구들 쪽도 늦는 건 마찬가지거든요. 그냥… 출판계는 원래 ‘여유를 부려서 돈이 잘 돌 때 일괄지급…’, 그런 생각들이 지배하고 있는 듯한….

박관형: 보통 순정 작가들의 원고료가 소년지 작가들의 원고료보다 낮게 책정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현재 만화계의 상황(잡지판매량이라든가 독자들의 호응도)을 볼 때 현실과 맞지 않는 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양여진: 글쎄요. 지금까지는 출판사의 “순정만화는 내용상 독자층이 아직 좁을 수밖에 없어서….” 운운하는 설명에 고개만 끄덕여왔다고 해야겠지요. 지금은 독자층을 늘릴 수 있는 중성적인 만화 쪽으로 변화를 시도한 뒤 고료책정이 다시 되었으면 합니다. 클램프라든가… 일본에선 그런 식의 시도가 성공했다고 봅니다. 먼 옛날부터의 악습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남아 내려오지만, 빨리들 자각하여 고칠 건 고쳐야겠죠?

– 박관형(halim), [만화가에게 출판사는 어떤 존재인가… 아니면 출판사에게 만화가는…? – 컴온의 양여진 작가와 주고받은 이야기들], 웹진 [두고보자]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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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고보자]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이, 양여진은 1994년 육영재단의 [댕기]에서 처음 데뷔하였다. 이후 [작전타임]이나 [일루미나], [주희주리] 등의 작품으로 인기를 끌던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창 만화잡지 전성기 시절 데뷔해 활약했던 경력과 달리, 2001년 당시에도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지 못하고, 작품 활동을 했다는 증언은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순정만화를 그린다는 이유로 다른 작가들보다 원고료를 적게 지급한다는 증언에는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작가의 성별에 따라 심한 임금 격차가 발생한다’는 결과가 드러난 서울시의 문화예술 불공정 실태조사를 생각나게 한다.

2011년 원수연의 증언 

다른 하나는 내가 2011년 2월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된 만화진흥법 제정을 논의하는 공청회장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당시 공청회장에서는 한국 만화계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나와 만화진흥법의 필요성과 함께 자신들이 겪은 문제를 증언했다.

그때 [Let 다이], [풀 하우스] 등의 작품으로 일찌감치 명성을 받았던 만화가 원수연은 출판사와 작가의 관계가 여전히 비정상적임을 토로한 바 있다.

“잡지에 연재를 할 당시, (출판사에서) 창작자에 대한 재투자나 작가에 대한 보호는커녕 배려조차 없었다.

계약 문제로 인해 제대로 받지 못한 돈이 수두룩하다.”

원수연은 1987년 데뷔하였지만, 실질적인 작품 활동은 1990년대 이루어졌고, 2000년대 이후로는 잡지 연재를 중단했다. 원수연의 증언은 1990년대 한국 만화 ‘전성기’에 어떤 이면이 있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만화계 인사와 독자 대다수는 1990년대를 수많은 만화잡지들이 창간되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독자가 기억하는 명작이 연이어 나왔던 시기로 기억한다. 그리고 여전히 몇몇 이들은 ‘청보법’과 ‘대여점’만 아니었더라면 이 전성기가 더욱 오래갔으리라고 주장한다.

작가의 희생을 먹이 삼아 유지된 전성기였다면 

하지만 작가의 끊임없는 희생과 출판사의 불합리한 대우로 유지되는 전성기였다면, 청보법이나 대여점 같은 외부적 요인이 없었더라도, 얼마나 더 지속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작가의 삶과 현실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나마 [두고보자]에서 활동했던 필진 정도가 작가가 처한 만화계의 구조적 문제에 관해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던 이들이다.

작가의 희생과 절망을 '먹이' 삼아 이룬 전성기였다면, 그 전성기가 청보법, 대여소 같은 외부 요인이 없었더라도 길게 갈 수 있었을까.
작가의 희생과 절망을 ‘먹이’ 삼아 이룬 전성기였다면, 그 전성기가 청보법, 대여소 같은 외부 요인이 없었더라도 오래 지속할 수 있었을까.

끝으로 양여진의 인터뷰가 수록된 [두고보자] 4호에 수록된 (현재는 출판사 이미지프레임의 사장이기도 한) 원종우의 글을 살펴보자. 2001년에 쓴 글이니 약 20여 년 전 글이다. 하지만 여전히 1990년대 한국 만화의 상황을 핵심 정리해주고, 더불어 웹툰으로 상징되는 2010년대 한국 만화를 예견하는 것 같은 기시감을 준다. 최초로 전성기를 맞았던 90년대 한국 만화, 웹툰으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한 2010년대 한국 만화,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달라졌을까.

한국의 문화시장은 전반적으로 용량초과, 인력과다의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거기서 살아남는 방법은 내수시장에 대한 세련되고 전문적인 대처뿐 아니라, 결국에는 해외시장으로의 진출, 경쟁력일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만화출판사들은 인력과다의 특성을 착취수단으로 생각해온 것이 그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만화작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원고료는 작아도 되겠지.

쉴 새 없이 몰아붙여서 생산하게 하고, 소진된 작가는 버리고 신인을 또 끌어들이고, 그러다 아무도 안하겠다고 떨어져 나가면? 뭐, 그거야 시대가 그런 걸 어쩌겠어? 라는 발상…. 그게 바로 천민자본주의라는 거다. 만화를 죽이고 있는 것은 대여점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 원종우, [빌릴테면 빌려봐!! 만화대여점은 만화계의 수치인가: 한국만화시장, ‘빌려보는 시장’과 ‘사서 보는 시장’의 변주곡], 웹진 [두고보자] 4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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