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새 필드] 한국학이 활발한 영국 셰필드에서 대중문화를 공부한 필자와 함께 대중문화에 비친 우리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추가할 필드는 K드라마의 열정 노동.
좋은 드라마, 좋은 작품을 바라는 건 시청자나 제작사나 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좋은 드라마, 좋은 작품의 조건에 관해서는 아직 사회적 정의(定義)도 그 관심도 부족해 보인다. 어떤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인가,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 당신을 감동시킨 그 드라마가 누군가의 꿈을 짓밟고, 일터의 희망을 빼앗아 가는 노동 착취로 만들어진 드라마라면, 그때 그 드라마는 좋은 드라마인가.

스타 시스템과 착취 시스템의 공존
한국 드라마는 글로벌 OTT 드라마뿐만 아니라 한류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수출을 끌어 냈다. 그야말로 K 드라마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 하지만 언젠가부터 한국 드라마는 산업의 양극화를 함께 가져왔다. 그런 양극화를 대표하는 현상은 연일 연예면에서 기사화되는 스타의 막대한 출연료와 그 반대로 생계를 위협받으며 가끔씩 사회면에 등장하는 열정 노동자다. K 드라마에 어느새 그 양극단의 풍경이 공존하고 있다.
드라마 산업의 열정(으로 포장된 착취당하는) 노동자. 그 문제의 핵심은 방송사와 외주 제작사의 제작비와 저작권상 불공정 계약이다. 스타 배우의 출연료가 천정부지로 솟으면서 외주 제작사는 끊임없는 제작비 부족에 시달린다. 스타 배우가 제작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천차만별이지만, K 드라마에서 그 비중은 나날이 높아진다. 그리고 그 제작비 부족의 ‘해법’으로 탄생한 게 이 글에서는 주인공인 저소득 열정 노동자인 것이다.
가령 최근 방영된 디즈니+ 오리지날 [삼식이 삼촌]의 경우 총예산 400억 원에서 122억 원가량이 송강호의 출연료였다. 전체 제작비의 4분의 1 이상을 단 한 명의 출연자가 가져가는 구조는 확실히 ‘불균형’하다. 외주 제작사는 그렇게 드라마의 간판스타 출연료를 지급한 후에야 나머지 출연자들이나 스태프들에게 임금을 지급할 수 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작품에 투여하는 제작비는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양극화 구조는 K 드라마의 쇠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2020년 표준계약서… 하지만 착취 관행은 여전
정부가 지난 4월 ‘미디어콘텐츠산업융합발전위원회’를 만들어 K 미디어, 콘텐츠 강국의 육성을 내세웠지만 고질적인 방송 제작 노동자들의 불균형은 오히려 더욱 굳어지고 있을 뿐이다. 몇 날 며칠 이어지는 밤샘 촬영, 주 100시간이 넘는 노동시간,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된 근로 환경, 산재보험 등을 기대할 수 없는 계약 조건.
이런 열악한 드라마 제작 환경은 수십 년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된다. 그리고 그 전쟁터에서 일선 스태프들은 ‘열정 노동’. ‘열정 페이’를 강요받으며 오늘도 밤샘 작업 중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행을 없애기 위해 이미 지난 2020년 드라마 스태프의 노동시간 단축과 스태프 표준 근로 계약서 등과 같은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현장 스태프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노동권 보장은 기약이 없다.

꿈의 공장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
비극은 멈추지 않는다. 2016년, 한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방송 제작 현장의 열악한 환경을 고발하는 유서를 남겼다. 고 이한별 PD. 그뿐만 아니다. 지난 2020년 [화유기] (tvN 제작) 스태프가 제작 현장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조명 설치를 하던 스태프는 3m 높이에서 떨어졌다. 그 결과로 그는 하반신이 마비되는 부상을 입었다.
해외 스트리밍 서비스의 투자도 한국 드라마 제작 환경을 개선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에서 “넷플릭스의 한국 콘텐츠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 냈다”는 국내 보도가 쏟아졌지만, 대통령의 자화자찬이 담긴 민망한 기사에 노동 조건을 개선하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지난 6월12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방송 제작 현장의 임금체불이 누적 120명 이상 11억 원 이상이라고 밝혔다. 수개월간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했지만, 방송이 무산돼 임금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제작사들은 임금체불에도 지급하겠다는 약속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제작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뻔뻔하게도 드라마를 완성해야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핑계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댄다. 하지만 수개월에 걸친 임금체불로 인한 현장 스태프의 극심한 생활고는 드라마 완성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착취 위에 세워진 경쟁력과 매력?
넷플릭스 관계자는 한국 컨텐츠의 매력을 찬양한다. 그런데 그 매력과 경쟁력이 열정 노동자의 희생과 착취 위에 쌓여진 모래성이라면? 가령, 스타워즈 시리즈 중에 최초로 동양인이 출연하며 화제를 모음 ‘애콜라이트’ 총 8편 에피소드 제작비는 약 2479억 원이었다. 반면 앞서 언급했듯이 [삼식이 삼촌]의 경우 총제작비는 약 400억이었다. 세계적으로도 경쟁력을 입증한 K 드라마는 가성비 높은 투자처인 셈이다(물론 결과적으로 흥행에 참패했지만).

방송 작가는 기획 단계부터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만, 그 기획이 아예 무산되는 경우에는 최소한의 임금조차 받지 못한다. 연차가 낮은 방송 스태프는 100만 원 조금 넘는 월급을 받으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한다.
전태일이 스스로 산화하며 지켜달라고 했던 노동자의 권리. 전태일의 꿈은 넷플릭스 시대, 꿈의 공장에서 다시 짓밟힌다.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 ‘시다'(보조)는 2024년 넷플릭스 자본으로 만들어지는 드라마 제작팀의 막내 스태프들로 이어진다. 스태프들은 “일을 배우는 견습 시절로 생각하라”는 말을 듣는다. 70년대 평화시장 노동자와 2020년대 넷플릭스 드라마 노동자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이들 경력이 일천한 방송 스태프들은 옮겨갈 프로그램도 없기 때문에 오로지 방송 작가의 꿈 하나에 매달려 ‘열정 페이’를 감수하는 경우가 많다.
노동자의 꿈을 짓밟는 꿈의 공장
“인권의 시간은 우리 편”
더디지만 인권은 세월을 통과하며 전진한다는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 루스 긴즈버그의 말이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강제전역 조치를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변희수 하사. 변 하사에게 국방부는 “강제 전역 처분으로 발병한 우울증”이라고 순직을 인정했다. 유족은 현충원 이장을 요청했고, 보훈부는 이를 승인했다. 임태훈(군인권센터 소장)은 긴즈버그의 말을 인용했다.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변한다. 인권은 오늘도 조금씩 전진한다.

하지만 드라마 스태프들의 인권 시계는 거꾸로 간다. 말만 믿고 기다리기 힘든 꿈의 공장 노동자. 그들의 절규는 너무도 미약하고, 세상은 그 외침을 외면한다. 어디에도 그 소리는 닿지 못하는 것 같다.
대중예술은 부당한 현실에 대한 항체로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을 고민한다. 심지어는 막장 드라마마저도 그런 일말의 영혼을 그 안에 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마저 없다면 그 작품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아름다운 꿈의 작품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꿈을 담보로 그 꿈과 노동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 꿈의 공장 노동자의 꿈을 담보 삼아 그 꿈을 짓밟으며 만들어진 드라마. 그런 작품이 미국 아니 전 세계를 제패한다고 해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