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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50대 여자가 얼마 전 받은 건강검진의 결과를 듣기 위해 진료실로 들어온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사와 마주 앉는다. 의사는 먼저 여자의 근황을 물으며 인사를 나눈다. 잠시 후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검사 결과가 생각보다 좋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앞으로 6개월 정도 남으셨습니다.”

만약 당신의 삶이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느 날 병원에 갔더니 말로만 듣던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당신은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되는가.

집 천정 방 어둠 절망 희망 전구

뜻밖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자는 크게 당혹스러워한다. 의사는 몇 장의 종이를 반대편에서 읽기 편하도록 거꾸로 돌려서 여자 쪽으로 밀어주며, 한 번 읽어볼 것을 조심스레 권한다.

여자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본다. 건강검진 때 여자가 직접 작성한 문진표다. 당시 하나하나 답변을 적어냈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는 이런 질문들이 담겨있다.

  • 평소 퇴근 시간은 언제입니까?
  • 수면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 하루에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은 어느 정도입니까?

담담하게 문진표를 읽어가던 여자는 마지막 장을 펼친 순간 멈칫한다. 잠시 미동도 없이 멍하게 앉아있더니 이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물을 삼킨다. 그제야 ‘시한부 선고’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한부 6개월의 의미 

그녀에게 남았다는 ‘6개월’의 의미, 사실은 이렇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에서 여자가 문진표에 답한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 수면 시간, 밖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 등’을 모두 빼고 남은 시간이다. 달리 말하여, 그녀가 앞으로 가족들과 오롯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식탁 숟가락 가족 식사 가부장

이 이야기는 몇 년 전 어느 보험회사에서 내보냈던 광고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당시 이 광고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새로이 일깨웠기 때문이다.

당신은 죽음이 두렵다. 당신이란 존재가 사라진다는 게 너무나 생경하다. 당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부터 버겁기 그지없다.

나도 그렇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으면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은 후에 지금처럼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만약 생각할 수 없게 된다면 내가 나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주 오래된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때로는 밤이 늦도록 생각의 끈이 더 길어지는 경우도 있다. 점차 나 자신을 벗어나 주변의 사람들로 범위가 넓어진다. ‘생전에 나를 많이 아껴주시던 외할아버지는 지금쯤 어디에 계실까’, ‘죽은 후에 나의 가족들을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같은 깊은 상념이 이어진다.

인생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과 언젠가는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떤 면에서는 죽음 자체보다 헤어짐에서 오는 두려움이 더 크다.

요컨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때 그 뿌리를 헤아려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피할 수 없기에 생기는 두려움이다. 두 번째는 삶에서 인연을 맺은 소중한 사람들과의 헤어짐에서 비롯된 두려움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는 평생에 걸쳐 죽음이란 주제를 탐구해 왔다. 그는 자신의 책 [죽음은 두렵지 않다] [footnote]원제: 死はこわくない |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 전화윤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6년 11월 18일 출간[/footnote]에서 첫 번째, 즉 죽음 자체의 두려움을 다루는 법을 제시한다. 방광암과 심장병으로 두 차례의 대수술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75세에 이르러 비로소 얻은 답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다치바나 다카시, 2016)

앞서 말했듯, 당신은 실제로 죽기 전까지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죽음은 피할 수도 없다. 다치바나는 이것이 곧 죽음에 대해서 미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애초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관해 걱정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미리 알 수 없고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언뜻 궤변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근심 앞에서 이런 해법을 자주 사용한다.

예컨대 시험을 앞두고 실수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아이들에게 ‘미리 결과를 예상하며 걱정하지 말고 그저 지금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라’고 충고하는 것이 그렇다. 이런 접근법은 두려움을 걷어내는 데 적잖이 도움이 된다.

이렇게도 생각해보자. 당신은 오늘 당장 문을 열고 길을 나서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날 수 있다.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죽음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은, 평소에 그런 위험 자체를 잊고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미리 걱정하는 것이 득이 될 것 없다는 생각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아니 적어도 잊을 수는 있도록 한다.

두 번째 두려움 

그렇다면 이제 죽음의 두 번째 두려움이 남는다. 소중한 사람들과 헤어짐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첫 번째 두려움에 대해 다치바나가 길을 제시했다면, 나는 이 두 번째 두려움에 대해서 나름대로 고민한 결과를 나누고자 한다.

나는 병원에서 홀로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이들을 종종 지켜본다. 숨이 꺼져가는 순간 그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당신이 짐작과는 사뭇 다르다. 그간 지켜본 바를 되짚어 보면, 짐작건대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는 아닌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상상 이상으로 의연해진다. 때로 그들의 눈에서는 ‘이제 곧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마저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지난날 가족과 더 잘 지내지 못했다는 후회’이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이제는 그것을 ‘다시 되돌릴 기회마저 없다는 절망감’이다. 그 회한과 미련 때문에 그들은 마지막 떠나는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가족 부모 엄마 아빠

누구 하나 진정한 내 편이 아닌 이 험난한 세상에서, 변함없이 내 편이 되어주는 이들은 결국 가족뿐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가족은 삶의 시작이자 끝이다. 부모님은 당신의 삶이 시작할 때부터 이제껏 당신 곁에 있었다. 당신도 마찬가지로 자녀들의 삶이 시작할 때부터 줄곧 곁에 있었다. 배우자는 당신 인생의 가장 소중한 동반자다. 이들이 곧 당신의 삶이다.

이제 잠시 시선을 일상으로 돌려보자. 당신은 평소에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집 밖에서는 타인의 소소한 도움에도 고개 숙이며 고맙다고 하면서, 정작 당신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은 부모님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전한 적이 언제인가. 말로는 소중한 아이들이라고 하면서도, 당신의 소유물처럼 여기지는 않는가. 익숙하다는 이유로, 혹은 쑥스럽다는 이유로 남편과 아내에게 제멋대로 군 적은 없는가.

삶의 시작과 끝, 가족 

여기서 이 글을 읽는 것을 잠깐 멈추자. 그다음 당신의 부모님, 형제자매, 배우자, 자녀의 얼굴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올려보자.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꼭 그리 해보기를 권한다. 그들의 표정을 확인했다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그들은 당신을 보며 웃고 있는가. 아니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가. 만약 어두운 표정이라면, 혹시 당신 때문은 아닌가. 그렇다면 계속 그대로 둘 생각인가.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산다. 단지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를 모를 뿐이다. 죽음은 때로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당신에게 혹은 가족의 누군가에게 오늘이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일 수 있다.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다.

가족

지금은 당신 곁에 있는 가족이지만, 언젠가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될 이들이다. 아련한 기억의 조각으로만 추억할 수 있다. 실로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한 번 떠난 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다행히 아직 바로잡을 시간이 있다. 마치 오늘이 당신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가족을 향한 당신의 고마움을 전하자. 훗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결코, 쑥스러운 일이 아니다. 창피한 일도 아니다. 정말 창피한 것은 감사할 이에게 감사할 줄도 모르는 메마른 감정이다.

언제 어떻게 헤어져도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는 삶,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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