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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말 국정교과서를 둘러싼 파문이 일어났을 때 저는 사관의 심정으로 박 대통령께 공개편지를 썼습니다.

마치 전태일이 박정희 대통령께 간절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듯, 조롱하거나 비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디 간절히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대통령께서 가지고 계신 오해와 편견에 대한 이해를 구했습니다.

4·13총선이 끝난 후 대통령께서는 다시 한 번 국정교과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작년 바로 그때도 처음 입장만을 반복하며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려 했지요. 꽤 시간이 지난 이번에도 결국 대통령께서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그때와 같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독재자의 딸
‘독재자(strongman)의 딸’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타임] 표지를 장식한 박근혜 대통령. (2012년 12월 17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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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됐을 때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올바른 통일이 되어야지, 지금과 같은 교과서로 배우면 정통성이 오히려 북한에 있기 때문에 북한을 위한, 북한에 의한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 문제라는 것은 이만큼 중요하기도하고 잘못 나가면 위험하기도 하다. 예를 들면 어떤 문제가 있느냐. 교과서 기술을 하는 데 있어서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이라고 표현을 했다. 그런데 북한은 국가 수립이라고 했다. 그러면 정통성이 어디에 있느냐 이거다.”

– 박근혜, 청와대 출입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 2016년 4월 26일 (참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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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수많은 악의적 비방과 왜곡에 대해 맞서 진실을 알리려고 했던 그 수많은 노력이 청와대까지는 조금도 전달되지 못했다는 비통한 심정이 들 지경입니다. 기존 검인정 교과서를 보거나, 학계나 교육계에서 쓴 여러 논문, 제가 쓴 졸고 ‘역사전쟁(생각정원)’을 조금만 읽어봐도 대통령의 생각이 금방 바뀌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더불어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대통령은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국가의 주요 사안에 관해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는 중책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전문적인 과정은 학계와 교육계의 몫입니다. 그들이 이루어낸 연구 결과, 그들의 합의 결과에 따라서 이것들을 추인하며 정상적인 양질의 교육이 잘 진행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대통령의 역할입니다. 본질에서 한국사 교과서는 학계와 교육계의 산물입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지도자지만, 대통령이 역사 교과서에 대한 최종적인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정규직 과호보' 발언이 있었던 2014년 11월 25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박근혜 대통령 (출처: 청와대) http://www1.president.go.kr/activity/photo.php?srh%5Bpage%5D=2&srh%5Bview_mode%5D=detail&srh%5Bseq%5D=8569&srh%5Bdetail_no%5D=1004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정규직 과호보’ 발언이 있었던 2014년 11월 25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박근혜 대통령 (출처: 청와대)

조선 시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어느 시대 국왕이 함부로 사관의 사초를 건드리고, 실록의 내용에 대해 간섭했습니까. 물론 연산군이 그랬던 적이 있으나 그로 인하여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왕조사회에서도 국왕이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없는 영역이 있는데 대통령께서 언급하셨듯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대통령이 교과서의 내용을 판단하는 주체일 수 있습니까.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할 일은 역사학계의 연구 과정을 지원해주고, 그들이 치열하게 학문적 논쟁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며, 역으로 정치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는 학문적 사기꾼들의 발호를 제어하며, 역사 교사들의 교육적 역량을 존중하여 그들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이 합당한 역할입니다.

둘째, ‘혼’을 강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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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의 역사는 한 인간으로 말하면 혼이고, 그 나라의 국토는 한 인간으로 말하면 신체다’라는 얘기를 한 학자도 있는데 그만큼 역사 교육이라는 게 바르게, 또 자기 나라에 대해서 자긍심과 긍지를 갖도록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 박근혜, 청와대 출입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 2016년 4월 26일 (참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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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궁금합니다. 대통령께서 강조하는 ‘혼’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모든 역사책은 고유의 사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교한 학문적 입장과 실증적인 결과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집니다.

대통령께서 ‘혼’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과서의 중심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혼’이라는 단어는 막연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 그렇게 막연한 단어 하나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물음표 퀘스천
‘혼’이 뭐죠, 대통령님? (출처: Marco Bellucci, CC BY)

박은식 그럼에도 굳이 추론해봅니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민족주의 역사학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사진)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은식은 ‘국혼’을 강조하며 우리 민족의 특수성을 입증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정신이 신채호, 정인보, 문일평 등에 의해 계승됩니다.

아마도 학술적인 입장에서 ‘혼’이라고 하면 박은식의 ‘국혼’이라는 용어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바로 그 ‘혼’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을뿐더러 민족주의 사관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박은식이 주장한 ‘국혼’에 부합하는 교과서입니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께선 오히려 현행 교과서를 크게 칭찬하며 만족해야 합니다.

셋째,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 발전을 강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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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발전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발전에 있어서도 명암이 있겠죠. 그러나 하여튼 이 부분은 세계 여러 개발국에서도 모델로 배우려고 그러고 세계가 참 부러워하기도 하는 그런 경제발전 (에 대해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반노동적 (으로 쓰고 있다).”

– 박근혜, 청와대 출입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 2016년 4월 26일 (참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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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롭게 지적된 부분입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기존 한국사 교과서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 발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한국사 교과서의 마지막 단원명이 ‘경제와 사회의 발전’입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물론 2차, 3차까지도 모두 서술돼 있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권기의 경제 성장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돼 있습니다. 경부고속국도 개통, 포항제철 건립, 새마을운동의 성과까지. 심지어 유신 시절 100억 불 추술 달성에 대한 기록까지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찬란한 영광에 대해 모조리 서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경제 발전의 어두운 측면 역시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내용도 아닙니다. 전태일 분신사건으로 대표되는 노동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박정희 정권 때는 무역 수지가 적자였고, 새마을운동은 외형적 근대화의 한계를 지녔다 등 누가 봐도 상식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 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 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는 박정희 정권기의 경제 성장이라는 빛(명)뿐만 아니라 독재라는 그늘(암)도 균형 있게 서술돼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내용일까요? 뉴라이트 진영에서 항상 주장하듯 기존 교과서는 ‘명과 암’, ‘공과 과’가 균형 있게 서술돼 있습니다. 오직 ‘명과 공’만을 서술하는 것은 역사 왜곡일뿐더러 사실 현재의 교과서는 산업화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그다지 상술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과서는 산업화에 관하여, 경제성장에 관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긍정적인 것들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대통령의 뜻에 참으로 부합되는 책입니다.

학생이 역사에 자부심 느끼지 못하는 진짜 이유 

학생들은 대통령 말씀대로 역사 공부를 하면서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느끼지도 못하고, 긍지를 가지지도 못합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그 원인은 전혀 다릅니다. 교과서는 북한을 거의 다루지도 않으며 사실상 부정적인 내용 위주로 채웠기 때문에 통일은커녕 분단 조장 교과서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입니다. 문제는 이 지점이 아닙니다.

한국 역사 교육은 입시 교육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독한 암기 교육에 매여있기도 합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 암기에 기초한 방식. 이런 것들로 인해 초등학교 때부터 역사를 배우지만, 역사에 대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거나 고민하여 오늘 우리의 문제로 치환시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입 교육을 계속 진행하기 때문에 학생에게 역사교육이란 참으로 답답하며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학생 시간강사

대통령이 진짜 해야 할 일 

대통령께서 진심으로 역사교육의 변화를 원하신다면 바로 이러한 교육 현장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습니다. 학벌 위주의 입시 구조를 뜯어고쳐야 하고, 입시 위주의 학교 운영에 근본적인 전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사들은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의 중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토론해야 할 것이며 역사는 사유되고 고민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대통령께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교육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교과서는 결코 좌편향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은 1919년에 만들어습니다. 1948년 건국절은 학문적 기초가 없으며, 이승만은 도를 넘는 수준으로 미화가 되었습니다. 대통령께서 부디 여러 자료에 관해 객관적인 판단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경제 성장, 산업화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동시에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입니다. 대통령께서 강조하듯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하여 혁명을 일으켰고, 숱한 민주화운동을 벌였으며 기어코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1987년 6월 26일 서울역 주변에서 경찰과 대치 중인 학생과 시민들. (출처: 보도사진연감)
1987년 6월 26일 서울역 주변에서 경찰과 대치 중인 학생과 시민들. (출처: 보도사진연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구성원으로 누리는 자부심과 긍지는 바로 이러한 민주화 과정에 대한 각성에서 시작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주는 교과서임이 분명합니다.

제발 대통령께서 한국사 교과서를 향한 상식의 목소리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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