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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사를 위한 인지언어학: 언어와 공간지각능력

이번 연재에서는 찰스 퍼니휴(Charles Fernyhough) 저 [A Thousand Days of Wonder: A Scientist’s Chronicle of His Daughter’s Developing Mind]의 내용을 통해 언어가 사고, 그중에서도 공간지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논의해 봅니다.

A Thousand Days of Wonder 표지

언어와 공간지각능력: 한 가지 실험

아동발달 연구자 찰스 퍼니휴는 언어사용이 공간지각과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설계합니다. 직육면체 모양의 방 안에 쥐 한 마리를 넣습니다. 직육면체이니 바닥은 한 변이 다른 변보다 긴 직사각형입니다. 그런데 직육면체의 온 벽이 하얀색이어서 앞뒤를 구분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빙글빙글 몇 바퀴 정신없이 돌다가 보면 시작할 때 어느 벽을 마주 보고 있었는지 판단하기 힘들죠.

직육면체

이 방의 네 구석에는 먹을 것을 숨겨 놓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쥐는 방 한구석에 먹을 것이 숨겨지는 장면을 보고 나서 빙빙 돕니다. 한참을 그러다가 음식이 놓여 있던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바로 찾을 확률은 얼마일까요? 쥐가 긴 축과 짧은 축은 구분할 수 있으니, 찾을 확률은 50%가 됩니다.

한쪽 면이 파란 직육면체

자, 이번에는 실험 세팅이 바뀝니다. 다른 것은 모두 동일한데, 긴 벽 중에 하나를 푸른색으로 칠했습니다. 이 환경에서 쥐가 숨겨놓은 음식을 찾을 확률은 얼마일까요? 쥐가 색맹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하면 확률이 50%보다는 커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을까요? 다시 50% 정도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분명히 쥐는 색을 구별할 수 있고, 직육면체의 한쪽 벽면이 다른 색깔이라면 음식을 숨겨놓은 구석을 찾을 확률은 증가해야 되는데 말이죠. 쥐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일까요?

아기들의 공간지각능력은 쥐와 비슷?

3~5세 정도의 유아들을 데리고 똑같은 실험을 한다면 어떨까요? ‘애들이 지능이 낮아도 쥐보다는 낫겠지!’라고 생각하셨다면 저와 비슷한 예상을 하셨네요.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이 연령대의 아이들이 숨겨놓은 음식을 찾는 데 성공할 확률은 쥐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한쪽 벽면을 칠해 주었을 때도 먹을 것이 어느 구석에 숨겨져 있는지 찾아낼 확률은 우연에 의한 확률(50%)을 넘지 못했던 것이죠.

앉아있는 아이

그런데 놀랍게도 6세 정도가 되면 숨겨진 음식의 위치를 대부분 정확히 찾아냅니다. 도대체 5~6세 사이의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여섯 살이 되는 해에 지능이 급격히 상승하거나 후각이 발달한 것은 아닐 것 같은데 말이죠.

그 비밀은 바로 언어발달에 있다는 것이 찰스 퍼니휴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아이들은 만 2세만 되어도 꽤 많은 단어를 알게 되고, 4~5세 정도에 이르면 웬만한 이야기는 다 할 줄 알게 됩니다. 개념적으로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와의 일상적인 대화에 무리가 없죠. 이런 점을 볼 때 위의 실험에서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3~5세 아이들도 음식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예측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왜 6살쯤 되어야만 음식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는 것일까요?

언어가 공간지각능력의 발달을 이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언어사용능력의 발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6세 경이 되면 대개의 어린이가 “벽의 오른쪽(the right of the wall)”, “벽의 왼쪽(the left of the blue wall)” 등과 같이 공간 정보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5세 정도에도 “벽”, “왼쪽”, “푸른”, “구석” 등의 단어와 개념이 있습니다만, 이들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꿰어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죠. 다시 말해, 개별 단어에 해당하는 개념은 있지만, “푸른 벽의 왼쪽”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동의 수행 결과는 쥐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6세 정도의 나이가 되면서 특정한 개체(벽)와 개체의 속성(푸른) 그리고 다른 개체(상자)가 어떤 공간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언어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푸른 벽의 왼쪽 구석”을 표현하고 또 사고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 개념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주는 언어의 역할 덕분에 아동은 쥐보다 뛰어난 공간지각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먹을 것 찾기 실험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언어사용능력이 발달해서 공간지각능력이 좋아졌다고요? 그거 순서가 반대 아닌가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고, 공간지각능력이 발달하면서 “파란 벽의 왼편(the left of the blue wall)”

“긴 벽면 중에 하얀 벽면의 왼쪽”과 같은 언어 표현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이는 타당한 지적입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먼저 오고, 언어적인 표현은 그다음에 따라온다는 게 매우 자연스러운 원인-결과로 느껴지니 말입니다.

언어와 공간지각능력의 관계 검증하기

그래서 이번에는 언어와 공간지각능력이 충분히 발달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동일한 실험을 준비합니다. 다음 두 가설 중 하나의 손을 들어주기 위한 실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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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설 1. 만약 사고가 먼저 발달하고, 그 사고에 기반을 두어 언어가 발달하는 것이라면, 성인들의 경우에는 언어사용과 관련 없이 음식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가설 2. 만약 언어의 사용이 사고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면, 원활한 언어 사용을 억제했을 경우 음식의 위치를 찾을 확률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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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런 가설을 세우고 나니 실험의 난점이 생깁니다. 다 큰 성인들의 언어 능력을 어떻게 일시적으로 억제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입에 마스크를 씌우거나 물건을 꽉 물게 한다고 해서 머릿속 언어 이해 및 발화 과정을 멈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성인들의 언어 능력을 일시적으로 “끌”(turn off) 수 있을까요?

이럴 때 심리학자들이 자주 쓰는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언어에 쓸 수 있는 뇌의 자원을 다른 과업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위 실험에서는 그중에서도 쉐도잉(shadowing)이라는 기법을 썼습니다. 쉐도잉을 말 그대로 해석하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행동인데요. 심리언어학이나 언어교육 분야에서는 “듣는 대로 바로바로 소리를 내 따라 읽기” 정도의 의미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이 “따라 읽어 보세요.”라고 했을 때는, 선생님이 문장을 다 읽은 후 그 문장을 따라 합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쉐도잉의 예가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특정 단어가 들렸을 때 그 단어를 바로바로 따라 하게 된다면 쉐도잉의 예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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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인 따라 읽기

선생님: There was a big fire here in Seoul.
학생들: (선생님이 문장 전체 읽기를 마친 후에) There was a big fire here in Seoul.

(2) 쉐도잉

선생님: There was a big fire here in Seoul.
학생들: (바로) There was a big fire here i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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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사용을 차단한 성인의 공간지각능력

자, 이제 직육면체 안에 들어가 있는 성인들이 숨겨진 먹을 것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한쪽 벽이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고, 쉐도잉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룹은 음식의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방에서 쉐도잉을 해야 하는 그룹, 즉, 방 안에 들어갈 때부터 헤드폰을 끼고, 실험 내내 들려오는 문장들을 쉴 새 없이 따라 해야 하는 그룹의 경우, 음식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확률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연구자를 따르면 쉐도잉을 해야 되는 관계로 공간과 관련된 언어표현을 할 수 없게 된 그룹은 공간지각능력이 다시 6세 이전의 아이 수준과 비슷해져 버린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언어사용과 공간지각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결과네요.

이상의 논의를 통해 언어가 사고, 특히 공간지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어가 공간지각능력의 일부를 이룬다는 사실은 언어가 독립적 기능이 아니라 여타 인지기능과 활발히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음 연재에서는 언어와 사고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 Charles Fernyhough. (2010). [A Thousand Days of Wonder: A Scientist’s Chronicle of His Daughter’s Developing Mind]. Avery Trade.

[box type=”note”]* 책의 내용은 라디오 다큐멘터리 “Words”에 대화 형식으로 소개되었고, 필자는 이를 다시 에세이 형식으로 정리하였음을 밝힙니다. (필자)[/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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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새도우잉하는 과제가 공간지각-추론 과제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물론 단기기억에서는 그런 결과가 있지만 이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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