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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못하겠어요.”

“틀릴 것 같아요.”

수업을 하다 보면 이런 말을 많이 듣는다. 그때마다 나는 말한다. 뭐든 해야 ‘못하는 수준’이라도 된다고. 지금은 ‘못할 줄도 못하는’ 상태라고.

배움이 성취의 역사라고 착각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왔다. “이별하는 것이 힘들어서 사귈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봤다. 틀릴 것 같은 답은 절대 쓰지 않겠다는 태도가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이 ‘정지’ 외에 무엇이 있을까. 우리의 하루와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 존엄한 우리의 정체성은 두려움 때문에 부식한다.

[파이 이야기]의 주인공 ‘피신 물라토 파이 파텔’은 이름 중 일부가 ‘피신’인 탓에 ‘피싱'(오줌)이라 놀림받고 가는 곳마다 시달렸다. 이 아이의 이름은 결핍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핍을 나태의 핑계로 삼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결핍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있을까.
결핍이 정말 실패의 원인일까.

이안 감독이 영화화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얀 마텔이 2001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 [파이 이야기] (Life of Pi)를 원작으로 했다.
이안 감독이 영화화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얀 마텔이 2001년 발표한 동명 소설 [파이 이야기] (Life of Pi)를 원작으로 했다.
헤라클레스는 음악을 못했다. 재능이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그 사실에 화가 나서 짜증을 내다가 음악 선생님인 리누스를 때려 죽였다. 실수였다고 해도 원인은 그의 분노에 있었다. 못하는 것을 인정 못하는 어리석음. 뭐든지 잘하고 싶은 교만.

세월이 오래 흐른 어느 날, 술에 취해 처자식 찢어 죽이고, 그 값을 치르느라 아르고스 왕에게 수모를 당하던 시절, 시끄러운 까마귀를 쫓아내야 하는 과업이 주어진다. 신께 기도하고 받은 도구. 그의 손에 취어진 것은 (기교가 필요한) 팬플루트가 아닌 청동 꽹과리.

그는 (그의 강점인 힘이 아닌) 그의 약점인 박치를 이용해서 시끄러운 새들을 쫓아낸다. 그냥 가장 못하는 수준의 기술을 ‘실행’한다. 그는 음악을 못한다고 짜증을 내다가 스승을 죽였던 실수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인정했다. ‘잘해야만 하는 거’라는 교만을 부리지 않았다.

지혜로운 신이라면 음악이 약점인 인간에게 팬플루트를 주지는 않으신다. 못하는 기교를 억지로 요구하지 않는다. 신께선 그냥 받아들이고 나아가는지 보신 거다. 그것이 지혜의 신 아테네였다. ‘지혜’란 그런 거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사용할 줄 아는 것. 타인과 비교하며 자학하지 않는 것.

자신의 음악 선생님을 때려 죽이는 헤라클레스
자신의 음악 선생님을 때려 죽이는 헤라클레스.

성숙해지는 헤라클레스는 이제 자기가 못하는 것 때문에 남에게 화내지 않는다. 그는 끝까지 못할 줄 아는 겸손과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고수한다. 끊임없이 실수하고, 그 실수에 책임진다. 신들은 그를 신으로 인정한다.

오줌을 연상시키던 피신은 노력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의 화신 파이가 된다. 그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통해 내면의 리처드 파커(호랑이)를 살려냈다. 공포를 말로 표현함으로써 공포가 자신을 잠식하는 것을 막는다. 공포를 말의 빛으로 건조하여 바스러지게 한다.

이것을 말로 옮기기는 어렵다. 근본을 흔드는 공포, 생명의 끝에 다가가서 느끼는 진짜 공포는 욕창처럼 기억에 둥지를 튼다.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힘껏 싸워야 한다. 거기에 말의 빛이 비치도록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피하려 하고 심지어는 잊으려 하는 고요한 어둠으로 다가오면 우리는 더 심한 공포의 공격에 노출된다. 우리를 패배시킨 적과 진정으로 싸우지 않았으므로.

– [파이 이야기] 중에서

결핍도 존재의 일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내가 못하는 일도 포함된다. 못함을 실행하면 못할 줄 알게 된다. 하나의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결핍 없는 삶은 무료하다. 무료한 삶은 썩는다. 추상적 부식은 곧 구체화된다. 진짜 삶이 썩기 전에 우리는 싸워야 한다. 성취 압박은 공포심일 뿐, 삶의 빛이 아니다.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지능적으로 약하게 태어났다면 원래 나는 이런 모습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보다 약하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롭다.

사회적으로 열등한 동물이 주인과 사귀기 위해 가장 끈질기게 노력한다 .

– [파이 이야기] 중에서

위 서술은 매우 흥미롭다. 1차적으로 굴욕적으로 느껴지고, 2차적으로 허를 찌른다.

파이는 인도에서 살다가 캐나다로 이주하던 중 조난당한 소년이다. 그와 한 배를 탄 뱅골 호랑이가 리처드 파커. 파이는 신 앞에 열등한 사회적 존재였는가. 리처드 파커는 파이 앞에 열등한 동물로서 존재했던가. 두 존재는 하나이자 반영체로서 독립적이다. 둘 다 매우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열등감의 인식이 그들을 생존하게 만들며 박수받을 만하게 만든다는 역설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

사회적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도 소화하기 나름이다. 열등감을 느낀다고 열등한 것은 아니다. 약함을 인정한다고 지는 것도 아니다. 파이의 행복한 어린 시절에 대한 서술은 모두 태평양의 고난과 맞물리고 이것은 토론토에서 해피앤딩을 만들어가는 현재의 파이를 증명한다.

파이는 약함을 인정했다. 헤라클레스는 못하는 걸 잘하려고 한 적이 없다. 우리는 영웅 신화를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상상하고 믿고 핑계 댄다. 영웅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 실패의 역사. 자기 인식의 역사일 뿐이다.

약함에서 오는 열등감과 평가에 대한 공포와 싸우는 방법은 나의 실패를 인정하고, 찬사에 대한 열망을 무시하는 것. 잘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압박 때문에 정지를 택한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런데 왜 성취욕도 버리질 못하냐고.

나무늘보는 속도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동물계에서도 살아남는다. 느리기 때문에...
나무늘보는 속도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동물계에서도 살아남는다. 느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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