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연재 » 나는 시간강사다 » 나는 시간강사다: "잡일 돕는 아이"

나는 시간강사다: "잡일 돕는 아이"

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5. 연구소 조교 생활

다시 2008년 3월, 석사 1학기 때로 시계를 돌려 본다.

“너는 참 좋겠다” 

보통 연구소라고 하면 실험실과 백색 가운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건 공대의 경우이고, 인문대의 경우는 대개 “동양학민족연구소”, “한민족사회과학연구소”와 같은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그저 책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우리 학과에서도 작은 인문학 연구소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석사과정에 입학하며 마침 연구소 조교를 맡고 있던 선배가 논문 학기에 들어갔고, 내 지도교수가 연구소장을 맡게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내가 물망에 올랐다.

연구소 조교가 선임되는 과정에서 대학원생들의 의지가 반영될 여지는 당연히 없었다. 조교실장이 나를 불러 너는 오늘부터 학과조교와 연구소 조교를 함께 맡을 것이니 7층에 있는 “인문학 연구소”(가칭)에 올라가 인수인계를 받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참 좋겠다. 석사 1학기부터 벌써 공부할 공간도 생기고, 연구소엔 책이 많으니 또 논문 쓰기는 얼마나 좋아. 게다가 연구소 장학금도 나오잖아.”

그것이 나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는지 혹 정말로 내가 부러웠던 것인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나는 뭔가 좋은 기회가 온 게 아닌가 싶어 살짝 들떠 있었다.

망치로 책을 꺼내다 

인문학 연구소 조교는 다른 세부전공 선배인 J였다. 그는 내가 연구소에 들어오자 목장갑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는 지금부터 연구소의 모든 책을 빼서 다시 정리할 것인데, 엑셀 파일에 책의 서지와 개수를 모두 파악해 3일 내로 올리라고 했다.

연구소는 10평 남짓의 아담한 크기였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를 폐급 책장이 가득했고, 간신히 앉아 공부할 만한 크기의 책상이 두 개, 누군가를 응대할 작은 소파가 두 개 있었다. 책은 모든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자리가 없어 채 담지 못한 책들이 책장 위 박스에 가득 담겨 있었다.

3일간 모든 책을 책장에서 꺼내 각 책을 분류하고 다시 꼽았다. 중복되는 책을 골라 박스에 담아가며, 여러 학회지를 호별로 정리했다. 책의 목록번호는 대략 3천 번까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억지로 욱여넣다가 한 번은 책과 책 사이에 책이 끼었는데, 손으로 잡아빼다가 도저히 안 돼서 공구함에 있던 망치로 책을 꺼내기도 했다. 책의 잔해를 어찌할까 하다가 몰래 8층의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고 목록번호를 하나 지웠다.

연구소 매뉴얼 

그렇게 일이 끝나자 J는 연구소의 소파에 나를 앉히고 연구소에서 해야 할 매뉴얼을 알려주었다.

  • 근무 시간은 평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고, 공부하고 싶다면 퇴근 시간은 너의 자유이다.
  • 주말에 나와 공부해도 좋다.
  • 그런데 24시간 언제라도 지도교수에게 전화가 와서 뭘 찾거나 너를 호출할 수 있다.
  • 그때 만약 없어서 전화를 못 받았다면… 뭐, 네가 알아서 상상해라.
  •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학회지가 있는데, 그때마다 수백 권의 책을 정리하고 발송해야 한다.
  • 학회지는 1년에 4번 발행되고 간간이 발행하는 단행본이 있는데, 그건 랜덤이다. 단행본을 전국으로 발송하는 일 역시 너의 몫이다.
  • 연구소가 주최하는 학술회의가 있으면, 그것 역시 네가 처음부터 끝을 책임져야 한다.
  • 연구소 회의가 있으면 네가 참석해 서기의 역할을 해야 하고, 정리된 회의록을 교수님들의 식대 영수증에 첨부해 산학협력단에 제출해야 한다.
  • 연구소 평가는 1년에 1번 있는데 한 달쯤은 이걸로 밤을 새워야 할 거다.

6개월간 60만 원… 그러니까 한 달에 10만 원  

그가 말한 정말 굵직한 일들만 대략 정리해 봤다. 나는 학과 조교와 연구소 조교를 병행하게 되는데, 명목상 학과 사무실은 주 3.5일 정도, 연구소는 1.5일 정도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무실과 연구소를 쉴 새 없이 왕복했다. 여기에 9학점의 대학원 수업까지 생각하면, 석사 1학기는 내가 어딘가 뒤돌아볼 여유를 전혀 없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받게 되는 연구소 조교 장학금은 한 학기 동안 60만 원이 전부였다. 수업이 없는 방학에도 의무적으로 출근해야 했으니 6개월간 60만 원, 즉 한 달에 10만 원이었다. 추가 수당이나 보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국가장학금을 받는 학부생들은 100만 원가량을 받고 정확히 4달을 일했으니, 나보다 배 이상의 보수를 받았다. (그들 역시 최저 시급은 못 받았다.)

나는 인문학 연구소에 3년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구소장이 바뀌며 그만두게 되었다. 정말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생각나는 두 가지만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그냥 잡일 돕는 아이”

연구소 단위의 국가 프로젝트가 나오면 연구소 운영위원들이 모여 어떤 주제로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회의를 하게 된다. 내가 석사 1학기 때 나왔던 대형 프로젝트 때는 무려 10여 번의 회의가 있었다.

10명의 교수가 한마디씩만 해도 회의 시간은 대략 3시간 가까이 되었다. 회의록을 정리하며 참 답답했던 것은, 다들 말하는 바는 참 이상적이고 훌륭했지만, 이것을 대체 어떻게 보고서로 제출할 지 내 눈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회의가 5번쯤 거듭되었을 때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심정이었다. 결국, 떨어지고 남은 것은 100만 원에 이르는 식대 영수증과 의미 없는 회의록 더미가 전부였다.

지금도 종종 생각나는 어떤 장면이 있다. 첫 회의 때 모두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고 내가 남았는데, 저건 누구지 하는 표정을 몇몇 운영위원들이 지었다. 회의를 진행하려던 연구소장은 말했다.

“아, 저기는 그냥 연구소 잡일 돕는 아이입니다. 회의 시작합시다.”

잠시 호감의 눈빛을 보이던 운영위원들은 곧 ‘아, 그런 거였나’ 하는 표정으로 회의 자료를 들추었다. 그것으로 내 포지션은 확실히 정해진 셈이었다. “잡일 돕는 아이” 그것만큼 내 석사 시절을 잘 나타내는 표현도 없었다.

“참 대단해요, 허허” 

연구소 조교 3년 차가 되었을 때, 어느 학회와 연합한 큰 규모의 학술회의가 열렸다. 나는 발표자와 토론자에게 원고를 받아 그것을 자료집으로 만들고, 플래카드를 제작해 게시하고, 테이블과 다과를 세팅하고, 명패를 만들어 각 교수 앞에 놓고, 진행 중 사진을 찍고, 마이크를 하나하나 점검하고, 물컵을 채우고… 꽤 정신이 없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학술회의는 오후 5시에 끝났다. 학교 근처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고, 2차로 호프집, 3차로 노래방, 다시 4차… 선후배들은 대개 2차를 끝내고 돌아갔지만, 나는 연구소 조교였기에 언제나처럼 끝까지 남았다. 술자리에서는 내가 이 대학원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공부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노래방에서는 탬버린을 쳤다.

그날은 4차를 하던 새벽 2시쯤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였다. 나는 조용히 빠져나와 학교에 들어가 우산 4개를 마련했다. 다시 시내에 갔을 무렵에는 자리가 거의 끝나 있었다. 나는 지도교수께 우산 하나를 드리고 서열과 성별에 따라 3개의 우산을 나누어 드렸다.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기에 우산을 받은 교수들은 내게 무척 고마워했다.

비 구름 어두운 하늘 우울 슬픔 절망

나는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려 했는데 어떤 젊은 교수가 나를 슬쩍 부르더니 말했다.

“아니, 아직 과정생일 텐데 시작부터 끝까지 참 고생이 많네요, 참 대단해요. 허허.”

그는 내가 무척 존경하는 연구자였다. 좋은 단행본과 논문을 기계처럼 써냈고, 성과물의 피인용 지수가 높았다. 나 역시 그의 논문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가 ‘대단하다’고 표현한 것이 그때는 ‘그저 도와줘서 고마워’ 하는 식으로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 ‘대단함’의 의미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감히 말씀드린 적은 없지만…  

주말도 잘 거르지 않고 주5일 이상 꾸준히 출근했던 연구소에서 내가 3년간 받은 보수의 총액은 360만 원이 전부다. 그런 나를 무척 슬프게 했던 것은 언젠가 내 지도교수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는 어떤 술자리에서 내게 연구소 보수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한 학기에 60만 원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한 달에 60만 원이면 생활할 만했겠구나.” 했다. 나는 당황해서, “아니, 선생님 그게 아니고…” 하는데 그는 다른 교수의 말에 이미 응대하고 있었다.

선생님,

감히 말씀드린 적은 없지만… 쉽지 않은 3년이었어요. 

죄송합니다. (계속) 

좋은 기사 공유하고 알리기
슬로우뉴스에 커피 한잔의 여유를 후원해주세요. 필자 원고료와 최소한의 경비로 이용됩니다.

필자 소개

309동 1201호
초대필자. 대학강사

지방대 시간강사, 인문학 연구자.

작성 기사 수 : 35개
필자의 페이스북

©슬로우뉴스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슬로우뉴스 안내 | 제보/기고하기 | 제휴/광고문의
(유)슬로우미디어 | 전화: 070-4320-3690 | 등록번호: 경기, 아51089 | 등록일자 : 2014. 10. 27 | 제호: 슬로우뉴스 | 발행인: 김상인 | 편집인: 강성모
발행소: 경기 부천시 소사로 700번길 47 1동 506호 (원종동, 삼신) | 발행일자: 2012. 3. 26 | 개인정보관리/청소년보호책임자: 강성모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