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 ] 널리 알려진 사람과 사건, 그 유명세에 가려 우리가 놓쳤던 그림자,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상헌 박사의 ‘제네바에서 온 편지’에 담아 봅니다. [/box]
백범일지(白凡逸志)에 나오는 일화다.
백범이 한국인을 괴롭히던 일본인 하나를 살해하고 도망자 생활을 하던 때였다. 갈 때는 마땅치 않고 추격은 거세지니, 서둘러 남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하여 해남에서 양반 윤 씨 집에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조선이 점점 식민지 나락으로 빠져들 때니, 은신처를 제공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시절이었다.
그런데 양반 윤 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매일 아침 문안 인사 삼아 전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백범은 이 주인집 양반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가 데리고 있는 ‘상놈’의 품삯 문제 때문이었다. 사정은 이러했다.
밤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 백범은 주인 양반의 추상같은 호령 소리에 간간이 섞여 나오는 매질 소리를 들었다. 놀라서 바깥으로 나가 보니, 윤 씨는 어떤 사람을 묶어 두고 매질을 해대고 있었다. 하도 그 광경이 기괴해서 자세히 보니, 윤 씨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일꾼이 다른 양반의 집에서 일하면서 품삯을 더 받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잡아다 가혹한 형벌을 주고 있었다. 그 일꾼은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그저 잘못했다고 빌고만 있었다.
천하의 백범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윤 씨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이 정한 품삯은 얼마고, 저 일꾼은 얼마를 올려 받았소?”
윤 씨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올해에는 여자에게는 두 푼, 남자에게는 서 푼을 주기로 했는데, 글쎄 이놈이 남의 집에 가서 한 푼을 더 올려 받았지 않았겠소.”
백범은 놀랐다. 자신이 도망 다니면서 주막에서 먹던 거친 밥 한 끼 값도 안 되는 돈이었다.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것 보시오. 내가 다녀 보니, 주막에서 밥을 먹어도 다섯 푼이나 여섯 푼은 내야 하던데, 그 반도 안 되는 돈으로 이 사람과 그 식솔들이 어떻게 먹고산다는 말이오?”
불쌍한 처지를 어여삐 여겨 숙식을 제공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드는 백범에 어이없다는 표정은 지었을 주인장 윤 씨는 감정을 애써 삭히며 설명했다.
“이보시오. 세상 물정을 이렇게 모르오. 이놈이 혼자 살고 있소? 혼인해서 아내도 있지 않소. 그래서 이놈이 우리 집에서 일하는 날이면, 그 놈 아내도 와서 우리 집에서 밥을 먹는다네. 그 식솔도 와서 밥상을 차지하고 있는 날이 많소. 이놈이 일이 없을 때는, 그놈 아내가 우리 집 일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이 집 식구는 매일 우리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셈이오. 그러니 내가 품삯을 많이 줄 까닭이 어디 있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품삯이 지나치게 낮은 게 아닌가 하고 백범은 생각했다. 또 남의 집에서 가서 품삯을 조금 더 받았다고 매질은 무엇인가. 백범은 이렇게 따져 보려 했던 차에, 윤 씨는 틈을 주지 않고 몇 마디 더 붙였다.
“그리고 내가 품삯을 박하게 준다고 생각하시지 마시게. 혹 내가 품삯을 많이 준다고 해보세. 그리하면 이 일꾼의 의식주가 풍성해지지 않겠나. 먹고 사는 게 편안해지니 여유도 생길 걸세. 그렇게 되면 이놈이 우리 양반에게 공손치 않게 될 것 아니겠소. 이들이 양반에게 따지고 덤비면서, 품삯 주는 양반 고마운 줄 모르면, 어떡한다는 말이오. 이 세상이 어려워질 것 아니오. 내가 이런 것을 염려해서 품삯을 이같이 정해주는 것이라네.”
이쯤 되니, 백범은 할 말은 잃었다. 윤 씨의 멱살을 잡을 분위기는 아니었을 게다. 전후 맥락을 보아서는, 윤 씨의 항변에 질려 백범은 자리를 피한 듯하다. 이 일화의 마지막에 백범은 간단한 소회를 붙였다. 그동안 해주에서 상놈 천시한다고 한탄했는데, 여기 남도에 와서 보니 해주는 “상놈의 낙원”이었다는 것.
윤 씨 주장이 불편하다.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가? 또, 어떻게 논박할 것인가?
백범의 “품삯” 논쟁 분석
해묵은 백범의 일화를 새삼 꺼내는 것은 이 일화가 ‘오래된 지금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같이 한번 따져 보자.
1. 왜 양반 윤 씨는 화가 났을까
우선, 양반 윤 씨는 일하는 사람이 품삯을 마음대로 올리는 것이 못 마땅치 않다. 사람 데려다 쓰는 사람치고, 품삯 올라가는 걸 마냥 좋아할 이는 드물다. 이런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품삯 인상은 이 주인 양반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그가 주로 데리고 일하는 일꾼이 다른 데 가서 일할 때 거기서 품삯을 올려 받았기 때문이다. 양반 윤 씨의 돈주머니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일꾼을 묶어 두고 매질을 할 정도로 주인 양반 윤 씨가 화가 난 이유는 무엇일까?
당사자에게 확인할 방법은 없으니, 몇 가지 유추 정도를 해 볼 수 있겠다. 먼저, 품삯은 고용주인 자신이 정하는 것이고, 이렇게 정해진 것이 바로 공정한 품삯인데, 이러한 암묵적 규정을 일꾼이 위반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에 비추어 보면, 일종의 법률 위반이고,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고용주가 정한 ‘시장법칙’을 위반했다는 얘기겠다. 그래서 일꾼에 의한 일방적 품삯 인상은 징벌대상이 된다.
하지만 주인 양반이 화가 난 데는 경제적 이유도 컸을 것이다. 다른 고용주가 이미 품삯을 올려 지불했으니, 앞으로 이 일꾼을 부릴 때 자신도 품삯을 올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으리라. 그래서 일꾼을 매질로 징계하여 그 가능성을 원초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수요가 증가하여 임금이 증가하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이것이 주인 양반에는 말하자면 ‘불편한 진리’였던 셈이다.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시장법칙을 폭력적으로 저지하고자 한 것. 요컨대, 백범이 보기에 가혹한 형벌의 이면에는, 권위도 수호하고 경제적 이익도 지키고자 하는 주인 양반의 복잡한 계산이 깔려 있다.
2. 백범이 생각한 품삯을 올려야 할 이유
백범은 이런 전횡이 못마땅했다. 다혈질인 그였지만, 도망자의 처지고 은혜를 받는 입장이라, 양반 윤 씨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품삯을 올려야 할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나섰다.
우선 백범은 윤씨가 고용주로서 품삯을 결정한 권리는 있다 하더라도, 그 품삯이 일꾼이 먹고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 푼에서 너 푼으로 30% 이상 ‘파격적으로’ 인상된 품삯이라도 일꾼 혼자 살기도 빠듯한 돈인데,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기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재 품삯이 최저가족생계비에 못 미친다는 얘기다.
3. 양반 윤 씨의 반박
그러나 양반 주인 윤 씨는 백범의 주장을 두 가지 근거에서 반박한다.
첫째, 현재 품삯 수준이 최저가족생계비에 못 미치지만, 일꾼이 일할 때마다 가족들이 모두 와서 공짜로 식사를 해결하기 때문에 실제 품삯은 너 푼을 거뜬히 넘어선다. 현대 용어로 표현하자면, 음식 제공이라는 현물 임금 (in-kind payment)을 고려하면 일꾼의 총임금은 최저가족생계비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더 근본적이고 정치적이다. 양반 윤 씨는 품삯의 ‘지나친’ 상승이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로 보았다. 품삯이 상승하여 최저가족생계비도 넘어서서 일꾼의 가족들이 조금 여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면, 기존의 양반-상놈의 상하관계가 도전받을 위험성을 경계했다.
결론적으로 양반 윤씨가 생각하는 ‘공정한’ 품삯은 일꾼과 그 가족들이 생존이 겨우 가능할 만한 수준이었다. 일종의 생존임금 (subsistence wages)이다. 동시에 일꾼이 사회정치적 문제를 눈을 돌릴 여유를 주지 않을 정도로 빠듯한, 사회규율임금이겠다. 그 이상을 넘어서면 일종의 체제 저항적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그가 ‘공권력’을 행사하여 일꾼을 매질한 진짜 이유일 것이다.
누가 임금을 결정하는가?
이제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다. 임금은 누가 결정하는가?
윤 씨는 고용주인 자신이 정한다고 했다. 주는 대로 받는 게 임금이다. 일꾼이 나설 일이 아니다. 윤 씨는 임금을 ‘흥정 대상’으로 하면 사회경제질서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에도 그다지 낯설지 않다. 노동자가 생계비 보전을 위해 고용주와 협상에라도 나서려고 하면,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기업이 알아서 임금을 정해 줄 텐데, 노동자가 이를 믿지 않는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기업에 대한 정면 도전, 심지어는 국가 경제에 대한 해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백범의 일화에 나오는 일꾼의 경우처럼 마땅히 품삯을 올려 받아야 하는 상황에도, 일꾼에 돌아오는 것은 품삯 인상이 아니라 가혹한 매질이다. 임금인상 요구에 공권력의 매질이 돌아오는 상황과 별 다들 바 없다.
윤 씨는 노동자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것을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고임금은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다. ‘배부른 노동자’는 통제하기도 힘들고, 생산성도 떨어진다는 생각도 늘 잠복해 있다. 노동자는 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임금에 대해 야박해지기 마련이다.
천문학적인 이윤을 올린 기업이 주주에게 넉넉하게 이윤을 배당하고 최고위급 임원들에게 성과급을 나누어주는 것은 극히 정상적이라 생각하면서도, 일반 노동자의 성과 배분 요구에 대해서는 “과도한 임금 인상 요구”라는 비난이 돌아온다.
공정한 노동 대가란 무엇인가?
과연, 노동에 대한 공정한 대가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다양한 질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 이 억울한 일꾼에게 얼마를 주어야 정당한 대가인가?
- 양반 윤 씨의 품삯론이 본인의 경제적 이익을 늘리기 위한 합리화에 불과하다면, 이 매 맞는 일꾼이 내세워야 할 품삯론은 무엇일까?
- 백범은 식구 살림을 유지하는 정도는 되어야 최소한 공정한 대가라고 했는데, 그 수준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식구 수가 늘어나면 품삯도 늘어나야 하는가?
- 양반 윤 씨가 주장한 것처럼, 꼭 먹고 살만큼 주어야 하고, 이 이상을 주어서는 안 되는가?
- 일꾼이 윤 씨 집안에 생산적으로 기여한 것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따져 볼 게 많다.
게다가 한 가지 중요한 이슈가 빠졌다. 백범의 ‘품삯 논쟁’은 기본적으로 임금은 노동자의 생존 내지는 생활을 위해 기업이 지불하는 돈이라는 관념에 기초해 있다.
경제학의 태고 조상쯤 되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 마르크스는 이런 생각을 집대성한 양반이다. 당연히 반발이 없지 않았다. 경제학자들은 임금이란 노동자의 생산 기여에 대해 대가로서 기업이 지불한다는, “생산성 임금”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필요한 만큼 받는” 게 아니라 “일한 만큼 받는다”는 직관적으로 그럴 듯 주장이다. 뭔가 과학적인 분위기도 난다. 경영학도 이즈음부터 번성하기 시작했다. 임금의 과학적 관리도 그렇게 시작된다.
그러면 노동의 “기여”는 어떻게 측정하고 보상하는가? 혼자 일하고 버는 자영업자라면 간단하겠다. 그러나 일부는 돈을 대고, 대다수는 노동을 제공하며, 수많은 사람이 모여 같이 일하는 기업에서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고임금과 자율성이 오히려 효율적이다
프레더릭 테일러(F. Taylor)를 아시는가. 20세기 초반에 이른바 과학적 관리 기업을 도입한 경영학의 할아버지다. 그의 주저 [과학적 관리의 원리들]은 ‘공정 임금, 공정 노동량’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를 드디어 과학적으로 해결했다고 세상에 선포한 책이다.
테일러는 “적게 일하기 현상이 영국과 미국의 노동계층에게 최대의 악이다”라고 말하며, ‘노동자는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그의 책은 ‘편견’에서 출발한 과학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테일러의 편견에 사로잡힌 과학은 현대에 이르러 이론과 실증적 사례에 의해 부정된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 아컬로프(George Akerlof, 사진)는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을 주고,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노동자는 자유롭게 개인의 컨디션에 맞게 작업하고, 회사는 임금을 넉넉하게 지불하는 상호 신뢰가 정착하면, 결과적으로 노동자는 임금이 높아서 좋고, 회사는 생산성이 높아서 좋은, 상생의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아컬로프는 이를 ‘효율성 임금’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