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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보편문법에 반기를 들다

우선 이 새로운 이론이 기존의 언어학, 특히 촘스키의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형식언어학(Formal Linguistics)과 어떻게 다른지를 간략히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촘스키 ‘보편문법’의 탄생: 언어능력은 DNA에 새겨진다

20세기 초반 행동주의 심리학이 학계와 교육계를 휩쓸고 1930년대와 40년대에는 블룸필드(Bloomfield)를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이 구조주의 언어학(Structural Linguistics)의 꽃을 피웠습니다. 1950년대 후반 촘스키는 이에 반발하여 새로운 언어학을 주창하게 됩니다. 언어습득을 단순한 자극-반응이나 강화 메커니즘으로 본 기존 심리학의 관점을 깨고 언어를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구조적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넘어서려는 촘스키의 시도는 분명 큰 의미가 있었고 많은 이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변형생성문법'을 제안한 노엄 촘스키 (위키백과 공용)  http://ko.wikipedia.org/wiki/%EB%85%B8%EC%97%84_%EC%B4%98%EC%8A%A4%ED%82%A4
‘변형생성문법’을 제안한 노엄 촘스키 (사진: 위키백과 공용)

촘스키 언어학, 특히 그의 언어습득이론의 토대는 언어가 다른 인지기능과 분리되어 독립적인 모듈(module)을 형성하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를 보통 언어 기능의 단원성(modularity)이라고 부릅니다. 단원성을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들어 봅시다. 인간은 시각과 청각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두 시스템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상호 작용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 같은 경우 두 개의 시스템은 모듈로 존재하며 단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촘스키와 그의 언어관에 동의하는 학자들이 언어능력의 단원성을 믿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인간의 언어 습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속도, 엄청난 양의 언어적·비언어적 정보에서 언어의 규칙을 뽑아내는 능력,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모국어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 인간 언어의 창의성 등을 볼 때 “말 배우는 특별한 구조”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언어능력이 DNA에 존재하는 생물학적 기제라는 주장을 담은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 개념이 탄생합니다.

촘스키 언어관에 반기를 든 인지언어학 

언어기능의 생물학적 구조뿐 아니라 언어 시스템 내에서도 단원성이 존재합니다. 언어는 논리 형식(Logical Form), 음성 형식(Phonological Form), 통사(Syntax) 등의 모듈들을 포함하는 복합적 구조이지만, 이 형식들이 상호작용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각각의 형식들은 자기 내부에 구성요소와 법칙을 갖고 있지만, 다른 요소들과 직접 소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언어기능 자체도 단원적이고, 언어기능을 이루는 요소들도 단원적입니다.

하지만 인지언어학자들은 촘스키적 언어관에 반대하며 철학, 심리학, 신경과학, 컴퓨터공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들이 보여주는 복합적이며 다면적인 정신기능의 특징이 언어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즉, 언어는 인지과정, 뇌 영역들 간의 관계, 시청각 등의 지각체계, 심지어는 제스처나 동작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언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원적 개체가 아니라 수많은 기능과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기능이라는 논리입니다.

인지언어학의 중심 화두로 등장한 ‘의미’

이런 배경에서 인지언어학은 그동안 형식언어학이 간과해 왔던 의미의 문제를 언어학의 중심에 놓습니다.

촘스키 언어학의 중심은 통사부(syntax)였고, 언어현상의 기저에 대한 논의에서 의미 정보는 최대한 배제되었습니다. 이렇게 통사부가 의미부(semantics)와 관계없이 자신만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이론을 전개하였기에, 언어학의 중심 문제는 형식이지 의미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인지언어학자들은 이런 관점이 언어를 이해하는 데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언어현상을 꿰는 핵심은 인간이 의미를 만드는 존재라는 사실이고, 자연히 의미를 중심으로 언어의 형태가 발달한다고 봅니다. 물론 일단 만들어진 형식체계가 의미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부인하진 않습니다만, 형태와 의미 중에서 의미가 더 근원적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언어의 하위 기능들 (음성, 의미, 문법 등) 또한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들 사이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찾아내려고 노력합니다. 다의구조(polysemy)의 존재가 좋은 예입니다.

SVOC 형식의 예
[동사 + 목적어1 + 목적어2] 형태의 다양한 활용
단어 수준에서 다의어가 있듯이 형태소 수준에서 다의구조가 존재합니다. (3인칭 단수 s와 복수를 나타내는 s를 생각해 보십시오. 동명사와 현재분사의 ~ing는 또 다른 예입니다.) 문법에서도 [동사 + 목적어1 + 목적어2] 형태를 이중목적어 (He forgave me my sin.), 수여동사(He gave me the car.), 박탈의 의미를 나타내는 구문 (He denied me access to the system.) 등으로 사용합니다. 하나의 형태가 여러 의미를 나타내게 되는 이런 현상을 모두 묶어서 다의구조라 부를 수 있고, 이것은 형태소, 어휘, 문법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언어체계의 하위 구조들은 단원적이 아니라 인간 인지구조의 특성(위 경우에는 다의구조)에 따라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지언어학이 외국어 교육에 미친 영향 

인지언어학의 부상이 언어교육, 그중에서도 외국어교육에 대해 갖는 함의는 큽니다. 전통적인 보편문법의 틀에서 외국어 습득 연구는 문법성(grammaticality)의 획득에 초점을 맞춰왔습니다. 즉, 한 언어의 문법 체계를 넘어 다른 문법 체계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보편문법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지, 그 영향은 어느 정도인지 등이 주요 관심사가 되어 온 것입니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연구들은 개인적·문화적 경험, 생물학적 특성, 언어와 개념(concept)의 상호작용 등이 언어습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영어를 외국어로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해줄 말이 별로 없습니다.

외국어를 배워 본 사람이라면 제2언어학습이 단순한 언어적 경험을 넘어선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습니다. 이 말은 새 언어를 배우는 일이 언어 자체의 문제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것, 또 언어발달이 다른 인지적·정서적 발달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Hartwig HKD, CC BY ND
Hartwig HKD, CC BY ND

이러한 맥락에서 인지언어학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모국어로 이루어진 기존 개념체계의 토대 위에 새로운 문화적 개념체계를 쌓는 일이며,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문화가 사고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다양한 은유(metaphor)를 익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외국어 교수방법론은 학습자가 서로 다른 의미체계를 이해하며 문화적인 지평을 넓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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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촘스키 언어학과의 비교를 통해 인지언어학을 간단히 소개하였습니다. 앞으로의 연재를 통해서 인지언어학의 주요 영역들과 영어교육에 대한 함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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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댓글

  1. 글세요…두 개의 언어를 잘 쓸 수 있게 된 경험을 통해 궁금해진 것은 언어 습득에 관한 이론에 능통한 사람들은 과연 한 외국어라도 잘 쓸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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