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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문화의 과도기: 화면과 활자를 헤매는 좀비

대중문화의 익숙한 아이콘 좀비. 좀비는 과연 어떤 역사적인 배경에서 탄생하고 성장했을까요? 콜럼버스의 아이티 발견에서 대중문화 아이콘으로서의 좀비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조지 로메로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노모뎀 님이 파헤칩니다. (편집자)

누가 먼저 좀비에 방울을 달 것인가?

아이티 부두교 문화의 산물인 좀비가 우여곡절을 거쳐 윌리엄 시브룩의 책 마술의 섬을 통해 서구사회에 소개되고 이 책을 원작으로 한 할페린 형제의 영화 화이트 좀비가 제작되어 호평을 받게 되자, 좀비는 어느덧 인기몰이를 할 수 있는 유행 문화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마법의 섬(1926)의 삽화들과 이를 영화화한 [화이트 좀비](1932)의 한 장면

마술의 섬(1929)의 삽화들과 이를 영화화한 [화이트 좀비](1932)의 한 장면

그러던 중 1936년 할페린 형제들이 제작 발표한 후속 영화 [좀비들의 반란]이 전작 투자사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후속 좀비 영화를 만들었다’는 항목으로 기소되어 1만 달러가 넘는 벌금을 선고받았지만 동시에 ‘투자사의 전작과 상관없다면 누구나 좀비 영화를 만들어도 된다’는 판결이 내려졌으니,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들은 어떻게 좀비를 저마다의 영화 아이템으로 히트시킬 수 있을지를 궁리하면서도 엉뚱한 소송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은 조심스러운 상태이기도 했다.

많은 제작사 중 가장 먼저 빗장을 푼 곳은 법정 소동 3년 전에 할페린 형제의 [슈퍼내추럴]을 제작했던 계기로 좀비 영화 저작관계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추고 있던 파라마운트 픽처스였다.

여기서 잠시 옆길로 1930년대 이전의 영화들을 돌아보자.

침묵하는 화면에 소리를 불어넣은 유성영화시대의 개막

1920년대까지의 할리우드 극장 영화들 대부분은 무성영화, 즉 소리가 없는 영화 화면 사이에 자막 장면이 별도 삽입되어 영화 내용과 배우들의 대사를 설명해야 했다. 소리 없는 영화의 한계와 그를 극복하려던 시도들이 ‘화면만으로 모든 내용을 설명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으로 자리잡혀 있었기에, 1920년대 후반 나타난 유성영화들은 영화인에게 ‘소리가 없어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시각예술로서의 영화’에 굳이 불필요해 보이는 소리를 자꾸 넣는다며 심한 반발심을 일으켰다.

유성영화의 미래를 불길하게 예언하고, 혹평한 잭 워너(1892~1978, 좌)와 폴 로타(1907~1984)

유성영화의 미래를 불길하게 예언하고, 혹평한 잭 워너(1892~1978, 좌)와 폴 로타(1907~1984)

1926년 중견 영화 제작사 워너브러더스의 회장 잭 워너(Jack Warner)는 이렇게 예견했다.

“유성영화는 지금까지의 영화예술이 갖고 있는 외국어 소통의 불필요성과 관객 스스로 플롯과 배우연기를 대사로 이해하는 창의적 체험을 주지 못하기에 실패할 것이다.”

영국의 영화학자 폴 로타(Paul Rotha)는 1930년 [영화의 현재]라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혹평했다.

“음성과 음향이 시각적 표현과 섞여버린 화면은 영화가 가진 목적과 거리가 먼 것이며, 이러한 잘못된 영화제작시도는 영화의 본래 목적과 영화문화의 진정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  The Film Till Now: A Survey of the Cinema (London: Jonathan Cape, 1930)

같은 시기 유럽에서 유성영화를 선보이고 있던 알프레드 히치콕 같은 유명감독마저도 “무성영화는 영화의 순수한 형태”이며 “그에 비해 유성영화는 말하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일뿐이라고 했을 정도로 전 세계 영화인들은 영화의 예술적 가치라는 잣대로 볼 때, 소리가 없는 영화가 영화의 본질이며 소리를 입힌 영화는 형편없는 것으로 간주하기 일쑤였다.

그렇듯 멸시적인 어감으로 토킹 픽츄어스(Talking Pictures)를 줄여 토키(Talkie-) 라고 불리던 유성영화의 전성시대를 연 신호탄은 공교롭게도 유성영화의 미래를 가장 어둡게 바라보았던 워너브러더스사의 영화 돈 주안이었다.

돈 주앙(1926, 워너브라더스)

돈 주안 (1926)

유성영화의 장애물들 

사실 영화탄생의 초창기부터 영화에 소리를 입히려는 시도는 꾸준했으나, 이에는 몇 가지의 커다란 걸림돌이 있었다.

우선, 영상을 촬영할 때 현장에서 소리까지 녹음하려는 것은 기술적인 한계가 역력했다. 마이크 녹음기술이 개선된 뒤에도 영화 촬영 장비 소리가 너무 컸던 나머지, 현장 녹음을 재생해보면 정작 카메라에서 발생한 잡음이 배우 목소리를 포함한 모든 음향을 덮어버리곤 했다.

축음기 기술이 발달하여 원형판에 깨끗한 소리가 담기게 되자, 소위 ‘레코드판’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지만, 극장 상영용 화면 크기에 맞는 규모로 소리를 키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영상에 음향을 동기화하는 기술이 없던 탓에 유성영화를 만들기 어려웠다.

소리 없는 영화들의 전성시대에서 십수 년이 흐르자 드디어 영화 필름에 직접 음향까지 기록해 영상과 음성을 동시에 재생시킬 수 있도록 개발한 방식인 ‘사운드 온 필름'(Sound On Film)이 발표되어 새로운 영화산업의 가능성이 제시됐지만, 그보다 앞서 유성영화의 상업적인 성공을 보인 것은 워너 브러더스가 내놓은 ‘사운드 온 디스크'(Sound On Disc) 즉, 영상은 필름으로 음향은 레코드에서 재생하는 화면 따로 소리  따로 방식이었다.

기술적으로 진화한 '사운드 온 필름'(좌측) 방식은 시장성 문제로 빛을 보지 못했다. 우측은 '사운드 온 디스크' 방식(1930년대)

기술적으로 진화한 ‘사운드 온 필름'(좌측) 방식은 시장성 문제로 초기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 차츰 영화 기록 방식의 표준이 됐다(사진: 35mm 필름의 사운드트랙). 우측은 영상 따로 소리 따로인 ‘사운드 온 디스크’ 방식(1930년대)

‘사운드 온 필름’은 기술적으로 대단히 획기적이었다. 편집할 수 없었던 레코드판의 단점과 더불어 음향을 일일이 동기화해야 하는 ‘사운드 온 디스크’에 비해 여러가지로 우수했다. 그래서 결국 시간이 흐른 뒤 영화 기록 방식의 표준이 되었지만, 초창기에는 필름보다 레코드판에서 따로 재생되는 소리 쪽이 훨씬 음질이 좋은 데다 ‘사운드 온 필름’의  제작단가가 음질을 떠나 너무나 비쌌기에 산업적인 측면에서는 난항을 겪어야 했다.

비타폰 시스템, 유성영화의 장벽을 무너뜨리다 

그에 반해 발 빠르게 워너브러더스가  AT&T 와 합작 개발한 음향기술인 비타폰 시스템(Vitaphone System)으로 완성한 음악영화 [돈 주안]과  이듬해 이어 내놓은 더 본격적인 음악영화 재즈싱어가 유성영화산업의 흥행을 먼저 이끌어냈다.

워너브랃더스에서 만든 '비타폰' 시스템 로고 (1926)

워너브라더스의 ‘비타폰’ 시스템 로고 (1926)

비타폰 시스템을 시연하는 엔지어  E. B. 크래프트(E. B. Craft. 사진 좌측) http://en.wikipedia.org/wiki/Vitaphone#mediaviewer/File:VitaphoneDemo.jpg

비타폰 시스템을 시연하는 엔지어 E. B. 크래프트(E. B. Craft. 사진 좌측, 사진: 위키백과 공용, 1926년)

[재즈싱어] 개봉일, 유성영화는 잭 워너의 불길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워너브라더스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사진: Margaret Herrick Library)

[재즈싱어] 개봉일, 유성영화는 잭 워너의 불길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워너브라더스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사진: Margaret Herrick Library)

워너 브러더스의 한해 영화 매출만 당시 200만 달러에서 1400만 달러로 치솟았고, 때 마침 1929년에 일어난 세계 경제 대공황이 영화산업을 가라앉히기 시작했을 때는 도리어 유성영화가 영화산업 전체를 구원할 희망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배우들의 희비 쌍곡선, 목소리 그것이 문제로다

한편, 무성영화에서 활약해왔던 배우들은 상당한 고난을 맞이해야 했다.

소리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연기만 하면 되었던 배우들이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배역에서 잘리는가 하면, 연기력이나 외모보다 노래와 발성이 좋았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돌아오기도 했다.

현장에서 녹음하는 경우는 마이크 기술의 한계와 목소리를 쥐어짜 내야 하는 배우의 발성이 부딪혀 새로운 갈등을 자아냈고, 아무리 노력해도 매력적인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많은 배우들은 뛰어난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조기 은퇴를 고려하게 되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하는 193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목소리가 엉망인 여배우의 대역 배우와의 낭만적인 사랑을 묘사한 한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 Singin’ in the Rain](1952) 

이런 소동은 1935년 즈음 현상용 필름에 촬영 후 녹음이 가능한, 후녹음기술(After Recording Technology)의 대두로 성우와 가수들이 라디오에 이어 영화산업분야에 거꾸로 진출하게 되면서야 안정되었다.

필름에 영상과 음향을 같이 넣으려는 기술적인 시도들은 촬영된 장면들과 녹음된 소리를 제대로 동기화시키려는 근본적인 목적과 더불어 그때껏 초당 16장면 혹은 더 빠른 고속 재생으로 실제 사람들의 행동보다 몇 배 빠르게 움직이고 있던 영화 프레임의 표준을 초당 24장면으로 변경시키는데도 큰 역할을 하여, 드디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화면 속 배우들의 움직임에서 실제와 같은 느낌을 맛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무성영화로 인기를 끌었던 영화들이 유성영화 버전으로 새롭게 다시 제작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의외로 활발하게 투자가 이뤄진 쪽은 괴물과 유령이 코믹하게 등장하는 공포-코미디 영화 분야였다.

유성영화 리메이크 붐의 주역, 공포 코미디 영화들

괴물이나 유령의 모양새가 특징적이었던 공포영화는 유성영화의 혼란기와 별개로 누가 출연을 하든지 분장과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게 되니 배우의 연기력이나 외모는 큰 문제가 아니었는 데다, 경제공황 탓에 특정 관객보다 전체 연령가의 더 많은 관객이 들 수 있도록 기획한 코미디와의 결합은 무난한 흥행 보증수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유성영화 시대를 맞이한 할리우드 제작사들은 그런 잇점 때문에 1920년대 흥행했던 공포 코미디 영화들에 주목하였고, 유니버설 영화사가 1927년에 발표한 [고양이와 카나리아] 같은 작품은 그저 유성영화 버전으로 만들어 내놓기만 하면 누가 봐도 안정적인 성공이 될 것이 뻔해 보였다.

고양이와 카나리아 (1927)

고양이와 카나리아 (1927)

본래 연극으로 인기가 높았던 이 작품은, 백만장자이자 음산한 대저택의 소유자가 사망하며 자신의 전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을 유언으로 남기게 되자 그 유산을 욕심낸 친척들이 상속자인 주인공을 둘러싸고 대저택에서 벌이는 소동을 줄거리로 한 영화로, 무서운 부분과 우스운 부분이 균형 있게 표현된 공포 코미디였다.

1939년에 파라마운트가 같은 제목으로 리메이크해서 내놓은 [고양이와 카나리아]가 기대한 흥행 예상 수치를 뛰어넘어 큰 성공을 거두자, 파라마운트는 바로 영화의 후속편을 제작하기로 하면서 소재의 방향도 좀비로 바꿨다.

흥행 목적 때문에 우스워져야만 했던 좀비 영화

[고양이와 카나리아]에서 두각을 보였던 두 남녀 주연, 밥 호프와 폴렛 고다드를 그대로 기용한 후속작 고스트 브레이커스는 본래 좀비와 전혀 상관없이 공연되던 연극이 원작으로 1914년 1922년에 영화화가 두 번이나 이뤄진 인기작이었다.

작품에 본격적으로 좀비를 넣어보기로 한 파라마운트는 이 영화로 좀비 영화문화사에 나름의 전통을 만든 셈인데 그것은 ‘좀비의 코미디화’와 ‘좀비가 가족관계로 등장하는 인물구성’이라는 것이었다.

고스트 브레이커스 (1940)

고스트 브레이커스 (1940)

본의 아니게 쿠바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성에 고립된 두 남녀가 망령과 좀비를 물리치고 성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차지하게 된다는 내용의 [고스트 브레이커스]는 대(大) 좀비 시대를 열어젖힌 작품답게 이후 좀비 영화들의 전유물로 여겨지게 된 요소들이 등장하는 편이다.

비록 ‘좀비’를 감히 영화제목으로 넣지 않고, 출연 명단에 ‘좀비’와 ‘엄마 좀비’를 표기해 이후 다른 제작사들이 ‘좀비’를 마음대로 영상화할 수 있게끔 다리 역할을 했는가 하면 그 이듬해 중소 제작사 모노그램 픽처스가 이 영화를 본따서 미남 미녀 배우를 포스터에 강조하고 스토리까지 그대로 베껴 내놓은 아류작 좀비들의 왕의 산파 구실을 제대로 한 것이다.

좀비들의 왕 (1941)

좀비들의 왕 (1941)

그렇게 좀비가 영화흥행의 복판에서 여러 방향으로 활용되며 공포 영화의 장르로서 진화해가는 동안 좀비를 유행시킨 요람인 ‘문학’에서는 정작 반세기 가까이 좀비 소재가 환영받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좀비라는 이름이나 소재를 굳이 쓰지 않아도 시체가 되살아나는 이야기는 극장 영상 시대 이전부터 문학분야에서는 꽤 오랫동안 자리잡혀있던 고딕한 호러 문화였기에 ‘움직이는 시체’만으로는 영상분야에서 좀비가 보인 만큼 존재감이나 차별성이 드러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문학 세계에서는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이나 ‘드라큘라’ 같은 ‘흡혈귀’ 사이에서 ‘좀비’는 그 특징들이 차별화되지도 않았거니와 구분하려는 시도조차 굳이 하려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갔던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좀비 유행을 앞서간 H.P. 러브크래프트의 좀비 소설

공포문학의 거두, ‘환상문학에 톨킨의 빛이 있다면 공포문학에는 러브크래프트의 어둠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H. P. 러브크래프트(1890~1937)는 크툴루 라는 이름의 신화적 공포세계관의 구축을 이뤄 많은 소설가들에게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대작가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1890년~1937년)가 창조한 '크툴후' 신화 체계는 수많은 후세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1890년~1937년)는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가 창조한 ‘크툴후 신화’ 체계는 수많은 후세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다.

1920년대 미국의 작가이자 편집자 시인이었던 러브크래프트는 오늘날 알려진 그 이름값에 비해 그 활동시기에는 스스로 자신의 글이 팔리기는커녕 봐주는 독자도 없다며 한탄을 했을 정도였다. 출판본도 생전에는 단 한 권만 이뤄지는 등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불운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는 주로 쥘 베른(1828~1905)의 SF와 애드거 앨런 포(1809~1949)의 공포문학에 관심을 보이며 그 두 가지 세계를 융합한 문학을 내놓으려 노력했다.

쥘 베른과 애드거 앨런 포

러브크래프트는 쥘 베른(좌)의 SF와 애드거 앨런 포(우)의 공포를 융합하려고 시도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가들의 문장을 다듬고 인용하는 것을 좋아했던 러브크래프트의 재능은 ‘작품’이 아닌 ‘장르’를 만드는 쪽에서 더 빛을 발했다. 그중에서도 러브크래프트가 심취해 여러 단편으로 인용 풍자했던 프랑켄슈타인은 1921년 러브크래프트에 의해 어느날 ‘의학박사 허버트 웨스트가 시체를 되살아나게 만드는 약품을 발명하는 이야기’로 재탄생했고, 작품 속 인상적인 표현이었던 ‘리애니메이터’는 후일 1985년 스튜어트 고든 감독에 의해 좀비 영화 [리애니메이터]로 만들어졌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허버트 웨스트-리애니메이터](1921)를 그의 사후에 수록한 매거진 'Weird Tales'(1942) 표지와 그의 작품을 영화화한 스튜어트 고든의 [리애니메이터](1985)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허버트 웨스트-리애니메이터](1921)를 그의 사후에 수록한 매거진 ‘Weird Tales'(1942) 표지와 그의 작품을 영화화한 스튜어트 고든의 [리애니메이터](1985)

러브크래프트의 제때를 못 만난 불운한 단편들은 작가의 사후 여러 잡지에 반복해서 실리게 되었는데, 1950년대 만화잡지 위어드 사이언스에서 재창작되어 실린 이 좀비의 원형급 이야기는 당시의 잡지 구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인상을 주어, 그중 한 사람이 구상 중이던 뱀파이어 소설에 ‘죽은 시체가 약을 통해 다른 인격으로 되살아나는 구성’을 가미한 희대의 걸작을 발표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진정한 좀비 공포물의 전설 [나는 전설이다] 

리처드 매드슨(1926~2013)은 1950년대 초에 등단, SF와 공포를 현대적인 감각의 문체로 표현 구사하며 1940년대 이전부터 쓰여왔던 고전적인 소재들을 다양한 서스펜스로 융합했다. 그의 작품은 활자는 물론, 그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현되었을 때 더 탁월한 공포를 자아냈다. 매드슨은 미국의 안방극장을 지배해나갔다.

리차드 매드슨 (이미지: Kieran Guckian, CC BY)

리차드 매드슨 (일러스트: Kieran Guckian, CC BY)

리처드 매드슨이 1954년 출간한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전 세계를 뒤덮은 흡혈귀 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인간을 닮은 흡혈괴물로 변해 계속 타인을 감염시키고 세상을 황폐화하는 등, 현대 대중문화 속 좀비의 특징이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기에  ‘진정한 좀비 공포물의 시작’에 가까웠다.

소설 [나는 전설이다]가 품고 있는 그런 특징들이 던지는 충격을 너나 할 것 없이 영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제작자들에 의해 리처드 매드슨의 이 원작 소설은 1964년부터 2007년까지 세 편의 극장영화와 비디오로 만들어졌으며, 비록 그 흥행이나 비평에서 고른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활자문화와 영상문화의 양쪽에 좀비물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나는 전설이다]는 1964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지구 최후의 사나이]가 그랬듯 어디까지나 ‘뱀파이어 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는 데다 좀비물이 보이는 큰 특징 하나가 여전히 빠져있었기에 결국 이 완성(?)은 다시 활자가 아닌 영상으로 바통을 넘겨야했다. (‘큰 특징 하나’에 관한 설명은 다음 편을 기대하시라. – 편집자)

웃음기가 빠지기 시작한 좀비 영화

1960년대에 이르자 리처드 매드슨 같은 작가의 단편들을 저렴한 예산의 공포영화들로 만들어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던 회사가 여럿 있었다.

B급 영화의 황제 로저 코먼(1926년~현재) (사진: 위키백과 공용, 2006년)

B급 영화의 황제 로저 코먼(1926년~현재) (사진: 위키백과 공용, 2006년)

그중 가장 발군은 들인 예산에 비교해 배수의 흥행 수치를 기록해 업계의 모범답안으로 제시됐던 제작자 로저 코먼이다. 그는 글자 그대로 ‘B급영화’ 만들기의 달인 같은 사람이었다. 20세기폭스사에서 잡일을 도맡아하던 로저 코먼은 어깨너머로 각본구성을 배우고 독립해 1950년대 중반부터 SF 와 괴물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특히 시간분배가 적절치 않아 보이던 필름들을 동시 상영작으로 편집해서 동네극장들을 휘어잡아 꼬마들의 용돈을 효과적으로 갈취하는 데서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했는데, 그런 그가 1962년 내놓았던 [테일즈 오브 테러]는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 3개를 한 극장 필름에 편집해서 내놓은 작품이었고 좀비를 B급 영화의 세계에 어울리는 분위기로 조금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테일즈 오브 테러 ()

로저 코먼이 다양한 괴물들을 영상 속에 선보이며 조금씩 좀비를 향해 접근해가고 있던 시기, 멀리 떨어진 영국에서 같은 시기 저예산 공포영화를 빠르게 잘 만들어내 해당 동네 극장들을 점령하고 있던 해머 영화사 또한 좀비가 공포영화 장르로서 매우 좋은 수입원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브램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를 성공적으로 영화화한 이래 흡혈귀 공포물 쪽에서 일종의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던 해머 영화사와 존 글링 감독이 1966년 발표한 [플레이그 오브 더 좀비]는 당시 좀비에는 빠질 수 없다고 여겨진 ‘부두 마법으로서의 좀비 소생술’을 소재로서 여전히 취하고는 있었지만, ‘무덤에서 되살아나는 다수의 부패한 시체들’ + ‘전염병’ + ‘좀비라는 단어의 전면적인 활용’으로 좀비에 어울리는 ‘시체와 바이러스’라는 날개를 달아준 작품이 되었다.

프레이그 오브 더 좀비 ()

플레이그 오브 더 좀비 (1966)

이렇듯 문학과 영상을 오가면서 계속 쌓이던 좀비물의 특징들은 1968년 마침내 발표된 조지 로메로의 현대 공포 신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최종 완성을 이루게 된다.

보너스: [나는 전설이다]의 영화 버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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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구 최후의 사나이 (1964)

지구 최후의 사나이 (The Last Man on Earth, 1964)

지구 최후의 사나이 (The Last Man on Earth, 1964)

1964년에 제작된 첫 영화로 최근 공식적으로 저작권이 풀려 누구나 찾아보기 쉬운 형태로 인터넷에 공개된 상태다. 원작소설과 내용은 동일하게, 좀비들로 뒤덮인 세상에 홀로 남은 주인공이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주연 배우 빈센트 프라이스는 조연으로 연기생활을 시작해 저예산 공포영화 제작사 로저 코먼 사단의 간판급 주역이 된 배우로 다양한 공포영화에 출연해 팀 버튼 같은 감독이 말년에 자신의 영화에 그만을 위한 배역을 따로 만들어 모시는 등 시대의 전설이 된 배우다.

다양한 경력과 경험이 있는 빈센트 프라이스였지만 실제로 ‘지구 최후의 사나이’를 제작하는 현장에서는 스텝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서 많은 답답함을 느껴야 했는데, 로저 코먼이 비용절감을 위해 당시 다른 영화에 투입되어있던 베테랑 제작진 대신 미국에 정착한지 얼마 안 되는 이탈리아 출신의 영화 경력 제작진을 모셔와 서로 바디랭귀지로 호흡을 맞췄다 한다.

그 덕분인지 영화는 한껏 유럽풍의 고딕 영화에 가까운 분위기를 자아내게 되었는데, 직접 각본 작업에 참여하고도 현대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고성의 뱀파이어 같은 느낌에 반감을 품은 원작자 리처드 매드슨은 각본 크레디트에 자신의 이름을 필명으로 넣어달라고 고집하여 ‘로건 스완슨’ 이라는 필명으로 나갔다. 리처드 매드슨은 그 이후에도 자신의 각본이 영상화된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면 그 필명으로 써달라는 주문을 한다.

후일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공동 각본작업했던 존 루소는 시나리오 수정 과정에서 [지구 최후의 사나이]를 기초하게 되었고, 공동각본가이자 감독이었던 로메로는 이 영화를 통해 리처드 매드슨의 원작 소설을 읽게 된다.

2. 오메가 맨 (1971)

오메가 맨 (

오메가 맨 (The Omega Man, 1971)

1971년에 다시 영화화된 이 작품은 제목만으로는 액션 히어로 무비 같은 느낌을 주는데, 사실은 영화의 내용과 분위기 또한 액션성이 강조되고 있어서 제목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영화의 장르에 가까웠다.

전작과 비교하면 영화의 무대와 설정도 조금 더 미국 서부에 가까운 LA 로 옮겨지고, 인류가 망하게 되는 원인 또한 흡혈귀 전염현상이 아닌 세계대전에서 쓰인 생물병기의 영향으로 그리는 등 한층 더 미래적인 느낌을 살렸다.

이렇듯 바이러스라는 설정을 조금 더 ‘생물학적인 현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오메가 맨’은 영화 자체의 완성도보다 후일 다른 영화들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대니 보일 감독의 2002년 작 좀비 영화 [28일 후]는 바로 [오메가 맨]에서 보인 설정들 특히 ‘분노 바이러스로 인해 격렬하게 화내는 좀비들’의 모습을 구성하는데 꽤 많은 부분을 물려주게 되었다.

영화는 원작의 내용을 따라가지 않아, 리처드 매드슨의 팬들에게는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이 되었지만, 주연을 맡은 찰턴 헤스턴이 영화 각본을 참고하기보다 리처드 매드슨의 원작 소설을 심도있게 고찰해 연기했기 때문에, 되려 주인공만큼은 원작 소설의 주인공을 가장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3. 나는 전설이다 (2007)

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  2007)

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 2007)

2007년에 공개된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는 원작 제목을 그대로 쓴 영화제목에, 영화 속 등장무대도 다시 원작처럼 뉴욕으로 변경되는 등 여러모로 ‘원작의 진정한 영화화’를 표방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과학자이면서도 다양한 액션이 가능한 군인으로 주인공을 설정한 것부터 전반적인 짜임새는 원작이라기보다 전작 영화인 ‘오메가 맨’의 리메이크작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 초반 사람이 사라진 뉴욕을 질주하는 장면이 전작 [오메가맨]의 초반 LA 자동차 질주장면 오마주이기도 하다.

[나는 전설이다] 영화 초반 사람이 사라진 뉴욕을 질주하는 장면은 전작 [오메가 맨] 초반 LA 자동차 질주 장면에 관한 오마주다.

게다가 [나는 전설이다]라는 제목을 그대로 살린 만큼 원작소설에서처럼 해당 제목이 대사나 직접적인 내용으로 나오기를 기대한 관객들의 예상을 그대로 뒤엎고 전형적인 할리우드 히어로 무비의 결말로 완성돼 상당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세 편의 영화 중 가장 많은 흥행을 기록한 무난한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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