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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관한 모든 질문? 한국인에게 물어보세요! (Ask a Korean!)

한국에 관한 질문을 받고, 여기에 답하는 영어 블로그 ‘Ask a Korean!’(이하 ‘AAK!’) 운영자 @T.K. 님(이하 ‘티케이’)를 만났습니다. 티케이 님은 고등학교 시절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은 워싱턴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AAK!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널리 알려진 블로그입니다. 뉴욕타임스와 CNN을 비롯한 많은 외신이 AAK!를 통해 한국 소식을 확인했고, 티케이 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최근에는 유명 작가 말콤 그래드웰과 이른바 ‘키배'(온라인 논쟁)를 벌이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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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뉴스 필자이기도 한 티케이 님써머즈 님과 함께 인터뷰했습니다.

  • 일시: 2014년 7월 9일 오후
  • 장소: 서울 강남역 인근 식당과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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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k a Korean!
Ask a Korean!

– 자기 소개 부탁.

‘티케이 박’이다.

TK 티케이
티케이 박

AAK!에 관해 궁금한 두세 가지 것들

– 블로그는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

로스쿨 다닐 때 너무 할 일이 없어서 시작했다.

– 왜 하필 블로그였나.

구스타보 아레야노
구스타보 아레야노

당시 LA 지역에 ‘멕시코에 관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컨셉으로 사이트를 운영하는 구스타보 아레야노(Gustavo Arellano)라는 사람이 있었다. 멕시코에 관한 모든 질문에 간단히 답하는 사이트였는데, 아주 재밌었다. 글이 유머가 7이면 정보 3인 그런 칼럼식 글이었다. 지금은 어떤 매체에 팔렸다고 안다. 나도 그런 걸 해보자고 해서 ‘Ask a Korean!’를 시작했다.

– 필명이 ‘티케이’다. 무슨 뜻인가.

“더 코리안”(The Korean)의 약자다. 다소 위악스러운 느낌도 드는데, 앞서 말한 구스타보 아레야노가 자기 스스로 ‘더 멕시칸’이라고 호칭했다. 그래서 나도 ‘더 코리안’이라고 했다.

구스타보 아레야노
AAK에 영감을 제공한 구스타보 아레야노의 사이트

– 티케이는 지역성을 대표하는 정치적 약어이기도 한데.

트위터하기 전에는 한국어 블로깅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영어 블로그를 보면 내 신상이 다 나오기 때문에. 하지만 아무리 위악이라고해도 ‘더 코리안’이라고 필명을 쓰긴 좀 남사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티케이’라고 필명을 쓰게 됐다. ‘티케이 박’이 필명이다.

– 결혼한 것으로 안다. 와이프는 블로그 좋아하나?

예술(음악)하는 사람이라서 IT와 친하지 않고, 글 쓰는 데도 큰 관심은 없다. 하지만 내 블로깅에 관해선 “취존”(취향 존중)하는 편이다.

– 블로깅은 시간의 기회비용인 것 같다.

다른 취미가 있었는데, 다른 취미가 점점 더 사라지더라. 드라마도 많이 봤는데, 일 년에 한두 편 본다.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사라진다.

– 취재도 하나.

예전엔 그냥 아는 걸 생각나는대로 썼는데, 요즘은 책이라도 한 권 더 읽자는 다짐을 한다. 종종 현장 취재도 한다. 휴가 내서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취재하기도 했다.

– 스포츠를 좋아하는 걸로 아는데, 일하느라 블로깅하느라 시간이 안 나겠다.

예전에는 야구, 농구, 풋볼 다 봤는데. 요즘은 시간이 없어서 야구는 안 본다. 하지만 농구는 여전히 본다. LA에서 농구는 특별한 스포츠다. 지역적으로 농구에 관해 감정적인 유대랄까, 그런 게 있다. LA는 농구의 도시고, LA 레이커스의 도시다.

LA 레이커스
LA 레이커스

– LA에는 류현진이 뛰는 다저스도 있지 않나.

도시마다 시민들이 감정적인 연대를 느끼는 스포츠가 좀 다른 것 같다. LA는 다저스도 있지만 역시 농구다. 필라델피아에 출장을 간 적 있다. 택시기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택시기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LA는 풋볼팀이 없는데 뭘 보고 사십니까?”

그 기사 머릿속에 풋볼밖에 없는 것 같았다.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웃음) 필라델피아 시민들이 감정적인 연대를 느끼는 스포츠는 풋볼이라서 그렇다.

가령 시카고는 그야말로 스포츠 도시다. 그중에서도 풋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풋볼은 시즌상 겨울 스포츠(9월~1월)인데, 시카고는 겨울이 참 춥다. 체감온도가 영하 40도를 넘기도 한다. 그런데 시카고의 풋볼 경기장은 ‘돔’이 아니라 야외 경기장이다. 하지만 한 겨울에 덜덜 떨면서 본다. 그러면서 다른 지역 돔 경기장 팬들을 비웃으면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

‘겨우 영하 30도가 춥다고 돔 경기장이나 짓고 말이야.’

뉴욕과 보스턴은 뭐니 뭐니 해도 야구다. 보스턴 셀틱스가 아무리 NBA에서 우승해도 보스턴은 레스삭스의 도시고, 뉴욕은 양키스의 도시다.

– 심심해서 블로그 했다고 했다. 왜 하필 주제가 ‘한국’이었나.

결정적으로 일상적으로 한국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주변 미국 친구들, 교포들, 심지어 이민 2세들도 나에게 한국에 관해 물어본다.

물론 미국 사회에서 ‘한국 출신’이라는 게 일상생활에서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 정도만 서로 알고 살아도 사는 데 별로 지장 없다. 인종차별이 인종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라면, 그 반대편 속성은 뭐냐면 아예 ‘터치’하지 않는 무관심이다. 대부분 출신 지역이 어디인지에 관해 무관심하다.

하지만 나는 주변에서 한국에 관한 질문을 일상적으로 자주 받는 편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부모님은 어떻게 미국 생활을 하고 계실까. 나 자신과 주변을 향해 그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또 하나. 미국에서 생활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나는 영어를 꽤 깔끔하게 잘하는 축에 속한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한국에 관한 질문이 들어온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그래서 ‘그냥 쓰면 되겠네!’라고 생각했다.

– 처음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는 어땠나. 

속으로 ‘어디 질문이 들어오나 보자’ 그랬다. 처음 한두 달 정도는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질문 없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하고 그랬다.

– 블로그 초기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있다면.

한 번은 야구를 보는데, 유명한 야구 선수 ‘프린스 필더’ 목에 있는 한글 문신을 봤다(프린스 필더의 목에는 ‘왕자’라는 한글 문신이 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썼다(2007년 5월). 의외로 미국인들 중에 한국어 문신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영어로 쓴 한국어 문신에 관한 콘텐츠는 거의 없다.

프린스 필더
프린스 필더의 문신 “왕자” (출처 불명)

내가 쓴 프린스 필더 이야기는 반응이 아주 좋았다. 구글 검색에서도 ‘프린스 필더 문신’으로 검색하면 가장 먼저 올라와 있다. 그러다가 2010년에 뉴욕타임스 메트로 섹션에 나가는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뒤로는 질문이 폭주했다.

– 일주일 기준으로 블로깅하는 데 얼마나 시간을 쓰나.

10시간 정도 쓰는 것 같다. 토픽이 있으면 책도 보고, 연구도 한다. 전에는 대충 썼는데, 요즘엔 책이라도 한번 읽고 제대로 쓰려고 노력한다.

– 답글을 꽤 성실하게 다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어떤 이유든 답글을 달지 않는 블로거도 있다.

‘키배’를 좋아하기 때문에. (웃음) 처음에는 댓글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그런 걸 좋아했다. 하지만 이 짓도 근 10년 가까이 하니까 어느 정도 해탈한 것 같다. 가끔은 댓글을 통해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중요한 포인트가  새롭게 되살아나기도 하고, 대화의 맥락과 깊이도 생긴다. 그런 댓글에는 다시 한 번 답글 달고 그런다.

– 가장 인상적인 피드백은 뭐였나.

아무래도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말콤 그래드웰. 그래드웰과의 ‘키배’가 가장 인상적이다. 그래드웰도 내가 쓴 글이 워낙 ‘떴기’ 때문에 반응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한국에 관한 질문은 ‘세 가지’ 유형

– AAK!에 들어온 질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질문은 뭔가.

너무 많다. 정기적으로 오는 질문 유형들이 있다. 가장 인상적인 질문은 한국에서 온 입양인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왜 질문이 많이 오냐면, 내가 한국 이름에 관한 이야기, 가령 항렬(行列)과 돌림자의 관계 같은 이야기를 많이 썼다. 우선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블로그에 자주 오는 질문 유형에 관해 설명하면 좋겠다.

– 좋다. AAK!에 오는 질문은 어떤 유형이 있나.

크게 누가 질문하느냐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유형은 한류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이다. 이게 1/3 정도를 차지한다. 가령 ‘한국 드라마를 봤는데 이 장면의 이 행동은 무슨 의미냐’ 이런 질문이다.

한 번은 한국 문화에서 ‘목’이 중요하냐는 질문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다시 물어봤다. 질문자의 설명은 아이돌 콘서트 실황을 보면, 목을 보여주면 관중이 열광한다는 거다. 궁금해서 그 동영상이 도대체 어떤 동영상이냐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 확인했다.

해당 동영상을 보니까 뒤돌아서서 셔츠를 젖히면서 목과 어깨만 살짝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냥 평범한 장면이었다. 한참 웃었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서 목이 무슨 특별한 성적인 의미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셔츠를 젖히고, 목과 어깨를 노출해서 관중들이 열광한 거다’고 답해줬다. 드라마 ‘너목들’(너의 목소리가 들려)이 유행할 때는 한국의 사법제도에 관한 질문이 아주 많았다. 군대에 관한 질문도 많았고.

그리고 두 번째 유형은 한국에 사는 영어 강사 등 미국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이다. 한국 사정을 설명해달라는 질문들이 많다. 이런 질문도 1/3 정도를 차지한다.

– 그럼 남은 마지막 질문 유형은 ‘입양인’의 질문이라는 건가. 

그렇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 온 입양인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미국에 입양 온 사람들을 한국과 묶어주는 끈은 서류 한 장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다못해 그 서류에 적힌 자기 한글 이름이 무슨 뜻인지 라도 알고 싶다고 질문하곤 한다.

“뿌리의 집”이라고 홍대에 있는 입양인 시민단체가 있다. ‘뿌리의 집’을 통해 입양인들의 교류가 아주 활발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입양인의 문의가 오면 ‘뿌리의 집’을 자주 연결해주기도 한다.

뿌리의 집
뿌리의 집

– 블로깅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였나.

입양인에게 도움을 줄 때다. 이걸 ‘보람’이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한 번은 미국에 사는 한 입양인이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것 같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한국에 가려면 우선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말해주고,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우선 배워야 할 것들에 관해 조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한국인을 입양한 양부모에게서 편지가 왔다. 우리 아들이 입양아인데 아마도 한국에 가지 않았나 싶다는 편지였다. 어디에 물어볼 데가 없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설명이었다. 기억을 떠올려보니 1년 전에 바로 ‘한국에 가고 싶다’는 문의를 했던 그 입양인의 양부모였다.

그래서 부랴부랴 ‘뿌리의 집’에 연락했다. 1년 전 한국행을 문의한 입양인에게 한국에 가면 ‘뿌리의 집’에서 도움을 구하라고 답했으니까. 다행히도 그 입양인은 ‘뿌리의 집’에 연락했고, ‘뿌리의 집’ 활동가 설명으로는 지금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 사는 양부모와 연락하는 건 ‘본인 선택’이라서 터치하고 싶지 않다는 게 ‘뿌리의 집’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 양부모에게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대신 알려줬다.

보람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아주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책임감이 생긴달까.

‘김치워리어’스러운 한국 소개 영어 컨텐츠 

-외국(인) 시각에서는 한국의 정확한 사정을 대변하는 영어 컨텐츠가 적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물리적으론 영어로 쓴 한국 컨텐츠는 많다. 하지만 촌스럽다. ‘김치워리어’스럽다. 너무 구리고, 너무 웃기다.

김치워리어
김치워리어 공식 포스터

– ‘김치워리어’가 뭔가.

세금 1억 5천만 원이 투입된 ‘괴작’ 애니메이션이다.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미국 인터넷 한구석에선 ‘이 미친 작품은 뭐냐’는 글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서경덕 교수반크(VANK)가 하는 게 그런 김치워리어 수준인 것 같다. 그런 영어 컨텐츠는 많지만, 너무 촌스러운 ‘프로파간다'(선동)에 머물고 있다. 어느 하나 한국에 관한 제대로 된 설명에 도움이 안 된다.

– 블로깅하면서 전과 다르게 느끼는 게 있다면.

사람 사는 모습은 다 같다. 한국에 관한 질문에 답하면서 생긴 철학이랄까. 그때 그때의 상황과 조건에 사람이 반응하면서 그게 쌓이면 문화가 된다. 문화가 먼저고, 그런 문화 속에서 어떤 행동이 나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콤 그래드웰과의 ‘키배’도 그런 맥락이다.

(말콤 그래드웰은 한국 국적의 비행기 추락사고에 관해 한국의 권위주의적인 문화, 즉 기장과 부기장의 수직적인 위계관계, 커뮤니케이션의 장애가 사고의 한 원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 편집자)

– AAK!가 ‘김치워리어’류 컨텐츠와 구별되는 특징은 무엇이라고 보나.

내 블로그가 사람들에게 먹히는 이유는 이런 거라고 본다. 나는 ‘한국 사람은 이렇다’, ‘한국 사람은 이런 성향이 있다’에서 끝내지 않는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사회적 역사적 경제적 배경을 이야기한다. 그 배경을 깔아 놓으면 읽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람은 이러저러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삶의 조건을 풍부하게 설명하면 독자는 이해할 뿐만 아니라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독자에게는 자주 이렇게 질문한다. ‘니가 이 상황에 살아봐라.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다른 블로그와 차별성이 있다면 그런 것이라고 보고, 그런 점에서 소구력이 있다고 본다.

장황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역사적인 배경, 경제적인 조건들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캡콜드 님 말씀을 빌리자면, ‘어글리하더라도 디테일하게.’

– ‘어글리하더라도 디테일하게’라는 방법론을 채택한 계기라도.

쓰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깨닫는 것 같다. ‘한국 문화가 원래 이렇다’고 써버리면, 거기서 끝나버린다. (외국) 사람과 (한국) 사람 사이의 이해와 공감이 끊겨 버린다. 자동차 고칠 때 가장 열 받는 말 있지 않나.

‘이 차는 원래 그래요’

이 차는 원래 그렇다니. (웃음)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 한국에 살다가 미국사회에 이방인으로 편입하면서 한국적 배경에 관해 질문받고, 설명하면서 그런 게 습관이 된 것 같기도 한데.

그런 측면도 있다.

학생들 ‘조지는’ 한국식 암기 학습법에도 장점은 있다

– 이민은 왜 간 건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내가 일학년 때 한 선배가 뛰어내렸다. 이민을 간 건 교육 때문이다. 이민 가는 분들, 열이면 아홉은 그렇겠지만, 없는 기회를 만들어서 갔다.

– 적응은 잘 했나.

미국에서 고등학교 2년 반을 다녔는데, 미국 학교에서도 딴 걸 할 수 없으니까 외워서 시험보고, 성적 잘 나오고, 선생님도 칭찬하고, 대학도 잘 들어가고 그랬다. (웃음) 한 번은 스페인어 수업을 들었는데, 그 스페인 선생님과는 아주 친했다. 지금도 그 학교에 가면 날 알아보신다. 대학 추천서도 그 선생님께서 써주셨는데, 내용이 대충 이렇다.

‘이 학생은 처음엔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 학생이 왜 스페인 수업에 들어왔나 의아했죠. 하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 영어도 잘하고, 스페인어도 가장 잘하는 학생이 됐습니다.”

– 한국식 외우기 공부법이 통한 건가.

외우는 건 자신이 있었고, 공부의 기초체력이랄까. 그런 게 있었다. 그때 생각으로는 이런 게 효과가 있지 않았나 싶다.

공부
scui3asteveo, CC BY

– 한국 교육의 특징인 ‘주입식 암기’ 공부법은 여기저기서 비판대상인데.

한국 교육법은 분명히 효과가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대개는 강하게 반론한다. 이런 식이다.

‘한국교육이 효과가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사람이 하는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거다. 한국 교육이 이렇게 학생 조지고, 잡는 건, 그게 효과적이고 이유가 있어서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다.

– 한국 교육을 비판하는 쪽은 한국 교육의 ‘효능’에는 눈 감은 반쪽 비판이라는 건가. 한국식 주입 교육도 경쟁력이 있다?

그렇다. 말하는 것만 봐도 정말 차이가 난다. 내겐 24명의 다양한 나이와 직업, 교육 수준을 가진 사촌들이 있다. 일종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24명과 이야기하면 미국 사회의 평균보다는 훨씬 더 수준 높은 이야기가 가능하다.

한국 사회 누구를 잡고 이야기를 해도 상당히 수준 높은 이야기가 가능하다. 미국 사회에서 식자층은 돼야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다. 기본 교육이 망가지면 그런 것 같다. 한국은 이에 비하면 훨씬 수준이 높다. 이게 다른 데서 나온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조져가면서’ 교육하고, 논술 책 읽히고…. 그런 게 훈련이 돼서 그런 것 같다.

– 독특한 해석이다.

서구 교육이념에는 ‘리버럴 에듀케이션'(Liberal Education)이라는 게 있다. 모든 사람이 모든 분야에 어느 정도의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하자는 이상이다. 영미식 교육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인생을 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기본적인 소양은 알아야 한다는 교육 철학이다.

여기에 반대하는 개념이 특화된 지식만 알고 있으면 되지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명박 식으로 말하면, ‘축구선수가 공만 잘 차면 되지’라는 사고방식이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반대편 사고방식이다. 내가 보기엔 ‘리버럴 에듀케이션’이 잘되어 있으면,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기초를 위한 리버럴 에듀케이션을 위해선 (역설적이지만) ‘조지면서’ 하는 게 효과가 있다.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
하버드 대학교 중앙 도서관. 하버드 대학교는 2007년 학부 교육과정을 개편하면서 “하버드의 교육 목적은 리버럴 에듀케이션을 실현하는 것”에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사진: John Phelan, 위키백과 공용)

한국의 높은 시민의식, 그런데 왜 정치는 개판인가?

– 한국 사회의 시민의식(민도)이 미국 사회의 그것보다는 높다고 말했다.

항상 강조하는 이야기다. 확실히 그렇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한민국을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데, 너무 가까이에서 보니까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민도가 높은 나라에선 변화에 대해서도 적응이 빠르다.

– 그런데 민도 높은 우리나라 정치는 왜 이렇게 개판인가.

87년 체제가 이제 겨우 30년이 아직 안 됐다. 아직 “민주적 습관”이 정착하진 못한 것 같다. 장기적으로 문명과 제도는 습관이 쌓여야 하니까. 단기적 충격 사이를 뚫고 가는 것 같다. 국민 전체의 교육 수준이 높고, 변화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되니까.

– 우리가 ‘이성적’이라는 데는 좀 이견이 있다. 가령 최근 6.4 지방선거를 보자. ‘세월호를 잊지 말자’ vs. ‘박근혜를 지키자’가 붙었다. 결과적으로 비합리적이며 감정적인 프레임(박근혜를 지키자)이 선거 전략상 승리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민도가 높다는 것과 사람이 이성적인 것과는 꼭 결부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주세요
2014년 6월 4일 지방선거 선거기간에 등장한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주세요”라는 플래카드. 여당의 지방선거 전략은 정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박근혜 지키기”에 올인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세월호 사건과 박근혜 정부 책임론은 불가분이지 않았나.

내가 일종의 데블스 애드버킷(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해보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박근혜 정부에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반드시 성립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령 세월호 시국에서 김시곤 한국방송공사 보도국장이 이야기한 “교통사고” 이야기도 말을 “이쁘게 하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당시 김시곤은 직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세월호 사고는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를 생각하면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 편집자)

한국 주재 외국 강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다.

“나는 길 건널 때마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 씩 죽을 것 같은데. 이런 나라에서 세월호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이게 틀린 말이 아니다. 안전불감증이 꼭 박근혜 정부의 탓이냐, 이렇게 보면, 박근혜 정부 전에도 이런 안전불감증은 내내 지속하고 있던 문제였다. 하루 이틀 있던 문제가 아니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악화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 침몰 자체는 그렇다 쳐도 초동 대응과 그 이후의 대응이 계속 개판이지 않았나. 헌법적인 가치로도 대통령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이 국민의 생명권과 재산권 아닌가.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트랜잭션”(transaction; 거래, 가령 돈 주면 물건 받는 그런 관계)한 자리는 아니다. 사람들이 대통령을 보는 시각이 자판기를 보는 시선과는 다르지 않나. 자판기에는 천 원 넣고, 버튼 누르면 음료수가 나와야 하지만, 대통령은 좀 다르다.

자판기
“대통령은 자판기가 아니다.”(T.K.) (사진: midorisyu, CC BY)

대통령이 수호해야 하는 국민의 생명, 헌법적 의무…… 그건 좀 대통령을 자판기 처럼 보는 시각 같다. 물론 그 시각이 꼭 틀린 것은 아니다. 대통령을 ‘기능성’의 관점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 대통령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은 어떤 거라고 보나.

대통령을 기능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표상하는 상징으로서 대통령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나의 자아를 표상하는 상징이 대통령인 거다.

내 학부 때 대학 전공은 정치학이었고, 세부 전공은 선거전략이었는데, 선거 단위가 높아질수록 – 대통령 선거가 아주 전형적인데, ‘표현적 투표’ 경향이 높아진다. 즉, 자신의 자아를 표상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대통령을 바라본다. 기능적으로 어떤 일을 해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대신하는 표상으로 보는 거다.

– 대통령이 하는 ‘일'(업적)이 아니라 대통령 그 자체의 ‘이미지'(표상)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가 대통령을 기억하는 방식을 떠올려보자. 그 대통령의 구체적인 업적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상징성 그 자체로 기억된다. 노무현도 대통령 시절의 업적보다는 5공 청문회의 열정 어린 이미지, 인권변호사, 비운의 자살 이런 압도적인 이미지로 기억하지 않나. 박정희도 폐허 속에서 나라를 일으킨 그런 이미지를 기억하는 거고.

5공 청문회 노무현
1988년 11월 5공 청문회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 박근혜도 그런 상징성이 강한 인물이다? 

그렇다. 박근혜도 아주 상징성이 강한 인물이다. 박근혜 이후에 이만큼 상징성이 강한 정치인은 또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가령, 김문수를 보고, 나와 내 시대를 상징한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야당 쪽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세월호 국면에서도 박근혜에 자아를 투영하는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로 더 큰 피해가 있었다고 해도 자신의 지지를 꺾지 않았을 거다. 박근혜 대통령을 옹호할 수 있는 조그마한 빌미와 틈새만 생기면, 박근혜를 정당화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거다.

이런 맥락에서 세월호 국면시 ‘박근혜 하야’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서  ‘왜 이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심판론이 득세하지 못한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박근혜 독재자의 딸
‘독재자의 딸’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타임 표지를 장식한 박근혜 대통령. (2012년 12월 17일 자)

한국과 미국: 상식과 공정함

–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를 (삶의 시계로 보면) 정확히 절반씩 체험했다. 양 사회가 서로 배울 점이 있을 것 같다. 부족한 덕목이랄까. 어떤 걸까.

한국은 시간이 더 있어야 한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 않나.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슬로건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머릿속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습관이다. 내재화된 습관이다. 박근혜식으로 말하면 인간 개조, 인격 개조, 국가 개조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관행이 쌓이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이지, 지금부터 30일 안에 바꿉시다, 이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다.

– 한국 사회에 필요한 건 ‘상식’ 혹은 ‘합리성’이라고 지적했는데, 미국 사회의 밑바닥에는 어떤 철학이 존재한다고 보나.

미국이 아직은 전 세계적으로 소구력이 있는 이유는 미국 문화 저변에 있는 감정적인 코어랄까. 그건 ‘페어니스'(fairness), ‘공정함’이다. ‘평등'(equality)이 아니라 ‘페어'(fair)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시작부터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산 나라라서, 당시는 종교만 해도 영국 국교회, 청교도, 퀘이커 등이 서로 이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데 모여 살았다. 종족만 해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와 언어도 통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하나의 나라로 사회를 운영한 원동력은 ‘공정함’이다. 서로 공정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그거였다.

– 미국 사회의 기저에는 ‘공정함’이 있다는 건가.

영화 [대부]를 봤을 거다. 공정함이란 무엇인가를 한 문장으로 집약한다면 [대부]의 바로 이 대사일 거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I’m going to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YouTube 동영상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이 대사야말로 공정함의 집약이다. 왜 미국사회에 왜 영화 [대부]가 반향이 컸는지를 생각해보면, 바로 이 대사에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고 본다. 소설을 보면 뉴욕의 여섯 개 구에 각각의  마피아 패밀리들이 본거지로 삼고 있다. 마피아 패밀리의 암투에서도 거래할 때는 언제나 ‘공정함’을 가장 강조한다. 공정하지 않으면 서로 죽이니까. 내가 죽고, 상대방을 죽여야 하니까.

이것이 미국 사회에 깔린 정수다. 미국이 시작한 그 순간부터 상대방을 공정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 이런 공정함이 미국식 정의감과도 연계되는 것 같다. 상대가 그 누구더라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했다.

현대 사회가 모르는 사람들끼리, 연관 없는 사람들끼리 만나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살아야 하는 사회라면, 미국은 그런 측면에선 가장 먼저 현대에 진입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모르는 사람들끼리 시작했으니까.

한국도 결국은 그렇게 되겠지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정함이 별것 아니라 바로 상식이 통하는 사회다. ‘페어니스’의 사회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다.

– 미국 사회야말로 양극화가 심한 사회이고, 게임의 규칙 자체가 불공정해지고 있지 않나.

존 스타인벡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는 결코 미국에서 뿌리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을 학대받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곤궁한 백만장자로 보기 때문이다.”

“Socialism never took root in America because the poor see themselves not as an exploited proletariat but as temporarily embarrassed millionaires.”

– 존 스타인벡 (John Steinbeck, 1902 ~1968)

미국 사회의 경제적 모순 속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노동자의 삶을 다룬 스타인벡이 이런 말을 한 취지와는 별개로(이 문장은 노동자의 자기 기만적 현실 인식을 비판하려는 취지가 강하다. – 편집자), 이 문장이야말로 ‘공정함’의 또 다른 발로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지금은 가난하지만, 언젠가는 부자가 될 거라는 희망이랄까. 그러니까 ‘내 돈을 건드리지 마!’라는 의지인 거다.

물론 공정함으로 상징할 수 있는 미국의 정신, 모두에게 기회가 있다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이상은 점점 더 무너지고 있다. ‘지금 이게 페어한 사회인가.’ 많은 미국의 시민과 정치인이 근심한다. 공정한 시스템과 토대는 점점 더 무너지고 있고, 그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다.

질문과 화두

–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한국 사회는 점점 더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는 것 같다.

이런 말이 있지 않나.

‘대학 나오면 시키는 일은 할 수 있고, 석사가 되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리고 박사가 되어야 비로소 어떤 질문을 해야 할 지 안다.’

지식의 깊이가 있어야 좋은 질문이 나오는 것 같다.

물음표 느낌표
Horia Varlan, CC BY

– 질문하는 습관 속에서 좋은 질문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질문은 질문하는 습성과는 다른 것 같다. 서양 애들은 자주 질문하고, 진취적이잖아!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참 멍청한 질문을 많이 한다. 세상에 멍청한 질문이 없다고 하지만, 멍청한 질문은 있다. 미련한 질문이라도 거리낌 없이 계속 하는 습관이 붙으면 질문에 깊이를 줄까? 그렇지 않다.

– 아는 만큼 보인다?

그렇다. 많이 배우고, 생각해야 깊이 있는 질문이 나온다. 인식의 지도를 그린달까. 그런 지도를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질문이 나온다.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어떤 맥락 속에 있는지를 알아야 정확한 질문이 나오고, 질문이 정확해야 정확한 답이 나온다.

– 지금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 화두는 무엇인가.

문화와 행동. 그 양자의 관계다.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행동을 ‘드라이브’하는가. 문화가 과연 사람의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나는 이 입장에 반대한다. 사람들의 행동이 축적되어 문화가 형성할 뿐이고, 문화적 차이 때문에 사람들이 같은 상황과 조건에서 전혀 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 보통은 문화적 차이가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들 생각하지 않나. 

그래서 내 입장에 많은 이들이 죽자고 덤빈다. 문화가 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다르니까, 궁극적으로 동양인과 서양인의 행동이 다르다는 입장이다. 그러니까 같은 상황을 줘도 동양인과 서양인은 서로 다른 판단과 서로 다른 행동을 한다고 믿는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들도 있긴 하다. 유명한 연구 중에 ‘소’, ‘돼지’, ‘풀’을 놓고 연관된 걸 묶으라고 하면, 서양인은 소와 돼지를 묶고, 동양인은 소와 풀을 묶는다. 동양인은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다.

– 오리엔탈리즘이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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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은 서구가 자신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해 만든 ‘타자’로서의 ‘동양’, 그 타자화한 이미지를 동양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모든 담론의 생산과 관리, 유통의 총체를 의미한다.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가 그의 책 [오리엔탈리즘](1978년)에서 정립했다. – 편집자 [/box]

문화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 내러티브는 과장된 측면이 많다.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진실과는 멀어진다.

내가 그래드웰을 가장 강하게 비판한 측면은 이렇다. 한국 국적을 가진 비행기 추락사건에서 말콤 그래드웰의 주장이 뭐냐면, 파일럿이 서로 존대말 쓰고, 부기장이 감히 기장에게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권위적인 문화라서 비행기기 추락했다는 주장인데, 나는 이렇게 반문했다.

“너(그래드웰)는 정말로 한국 사람들이 자기(파일럿)가 죽고, 자기 승객이 다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예의를 갖추면서 행동한다는 그 이야기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즉, 그래드웰 주장의 맹점은 자신의 주장을 동양인을 대상으로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왜 그 주장을 미국의 대형사고에 대해서는 하지 않는 걸까? 그래드웰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는데, 그런 주장을 미국사람에 대해서 전혀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가령 아시아나 추락 사고 직후에 유럽에서 연이어 대형 열차 사건이 몇 개월 간격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유럽의 문화가 열차 사고를 일으켰다는 질문을 그 누구도, 말콤 그래드웰도 던지지 않았다.

-말콤 그래드웰과 같은 관점은 2013년 아시아나기 추락 사고에서 한국 언론에 의해 역수입되기도 했다. 

그런 걸 보고 아주 미치는 거다. 한국 스스로 자신을 타자화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소수자는 항상 ‘남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 자기 눈으로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

아시아나 추락사고
2013년 아시아나기 추락사고 원인을 ‘한국문화’라고 한 미 언론의 관점을 역수입한 우리나라 기사들

– 말콤 그래드웰 식의 문화결정론(cultural determinism)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는 뭐라고 보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도 일본의 상명하복 문화 때문에 대처가 늦어졌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런데 재난은 후쿠시마에만 있는 건 아니다. 가령 ‘카트리나’(2005년 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미국 남부 지역이 침수한 사건. 2만 명 실종.)  때는 재난 대처가 정말 엉망이었다. 그런데 그때 전 세계에 단 한 명이라도 ‘미국 문화가 카트리나 재앙을 초래했는가?’라고 질문한 사람이 있나. 없다.

2013년 아시아나 추락 사고 직후에 JFK 공항에서 화물기가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 누구도 미국문화 때문에 화물기가 충돌했는지를 묻지 않는다. 이 지점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문화적 힘이 그토록 중요하고,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그토록 중요한 요소라면 왜 이 모든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가.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과는 별개로, 오리엔탈리즘과 정확하게 연결된 문제인데, 이런 문화적인 차이로 설명되는 존재는 언제나 ‘이방인’과 ‘소수자’라는 점이 중요하다. ‘주체’를 획득한 존재에게는 절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즉, 자기 자신에게는 절대로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슬로우 바이트 티케이 왜 남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가

– 공감한다. 오늘 긴 인터뷰 고맙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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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댓글

  1. 좋은 질문은 질문하는 습성과는 다른 것 같다. 서양 애들은 자주 질문하고, 진취적이잖아!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참 멍청한 질문을 많이 한다. 세상에 멍청한 질문이 없다고 하지만, 멍청한 질문은 있다. 미련한 질문이라도 거리낌 없이 계속 하는 습관이 붙으면 질문에 깊이를 줄까? 그렇지 않다.

    공감한다

  2. TK라는 분이 좋은 일을 하고 계시는 군요. 그러나, 너무 학문적인 입장에서 한국문화를 설명하려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말콤 글래웰과의 논쟁에서 보면 한국 문화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군요..미국 이민사회의 한국문화과 “한국”의 조직문화는 큰 차이가 있는데..
    저는 대한항공 괌 추락 사고에 관한 그의 주장에 큰 공감을 얻었는데 말이지요. 우리 문화 안에 있는 윗사람에 대한 존중의 문화의 무게와 이 무게로 인해 얼마나 많은 폐해가 있는지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는게 아닌가, 너무 우리를 방어하려는 입장에서 오히려 종종 공정함을 잃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물론 저 블로그를 쭈욱 읽어보아야 판단이 가능하겠지만요.

  3. 비행기가 추락해서 당장 죽을 지경인데 존댓말 때문에 어쩌고 하는 건 정말 한국인을 미개하게 보는 것 아닌가. 그 미개함은 그 생각을 한 한국인이지 한국인 일반으로 확대하는 것이 너무 우습다.

  4. 아주 별볼일 없고 바보같은 기자의 질문에 무척 똑똑하고 균형잡힌 대답이다.
    이런 친구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부족한 점이 합리성이라는데 엄청 공감하면서, 이게 기자(편집장?)에게도 하는 말인줄 알았을까?

  5. 공감한다. 그러나 문화가 실제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판단해서 질문하지 않는 건지, 질문할 필요가 없는 주체의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았던 것인지에 대해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카트리나 재해 대처에 있어서 미국문화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묻지 않는 것은, 문화 결정론이 소수자와 이방인에게만 그 잣대를 들이대는 특성이 있어 미국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걸 수도 있지만, 정말 실제로 그 사안에 대해 큰 영향을 미친 미국 문화의 요소가 있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를들어 아시아나기 문제에 대해 짚는 것은 “상명하복”식 한국 문화이지 모든 한국 문화가 아니다.)

    단순히 소수자와 이방인에 대한 권력관계 문제로 치환하고 끝내기엔 좀 아쉽다. 좀 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한 듯.

    그리고 어떤 사고에 대해 문화적 결정론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 문화권 내부에서 잘 시작되지 않는다. 이유를 분석할 능력은 없으나, 아무래도 자신의 문화가 문제 있다는 관점은 자기부정으로 연결되어 내부에 배척당하기 쉽다. (제도나 관행과는 다른 문제다. 문화가 사고를 불러왔다고 하는 건 내부에서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의 경우에서 미국 기사의 관점이 역수입된 이유도, 우리나라 사람들 스스로 그 질문을 안 했기 때문에 역수입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인터뷰이가 미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서구권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문화 결정론 관점의 질문제기를 접하기 힘들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6. 대체 어떤 점에서??

    이런식으로 리플을 남긴 이유가 짐작가는 점이 있긴하다. 아주 뻔해서 글로 남기기도 기운빠지지만.

  7. 세심한 조언 고맙습니다.
    위 문구는 “예시”(그런데 있었던 과거의 사실)이라서, 정확하게 “-던지”(과거, 있었던 사실의 뒷받침), ”
    -든지”(어떤 것을 선택해도 무방한 경우) 모두 이 경우에 적당한 표현이 아니라고 봐서 새롭게 표현을 보완했습니다. 굳이 쓴다면 조언해주신 것처럼 “든지/든가”로 쓰는 것이 좀 더 합당해 보이긴 합니다. 조언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8. LA 사는 사람입니다. 역시 인터뷰이처럼 미국에 사는거죠.
    해당 인터뷰이께서 미국 동부에 사셔서 그런지, 솔직히 서부에 관해서는 지식이 좀 얕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네요.
    가령 농구의 도시라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이미 축구의 도시로 바뀐지 오래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LA의 압도적인 히스패닉 인구로 인해 축구를 접하지 않을래야 않을수 없는데 그걸 제껴놓고 농구의 도시라고 하니 솔직히 당황스럽네요. 농구도 그 열풍이 거의 식었습니다. 옛날에 코비 브라이언트가 날라다닐때만 해도 레이커스가 미식축구 결승전인 슈퍼볼만큼의 인기를 누렸는데,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최근 끝난 월드컵에 대해 관심도 상당해졌고 공원만 가더라도 발로 드리블하는 히스패닉들, 그리고 백인도 많습니다.

    인터뷰이도, 그리고 인터뷰어도 조금 사실 확인에 신경을 더 써주셨으면 좋겠네요. 저분의 동부 중심으로 미국이라는 그 큰나라를 일반화하려는 관점도 사실은 좀 불편합니다.

    더 추가하자면 미국에 사시는 변호사라는 분께서 자신이 느낀 바보다는 너무 우회적으로 말하시는 것같네요. 윗분께서 말씀하셨듯 미국생활을 현실적이 아닌 학문적으로 접근하시는 것같아, 지극히 노동자이며 아직 학생에 불과한 저로서는 그렇게 공감을 하기 힘듭니다.

  9. 근데 대부에 나오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은 공포와 위협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말 머리를 잘라서 침대 안에 넣었죠), 이것이 “공정함”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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