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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안젤루(Maya Angelou). 지난 2014년 5월 28일 타계한 이 미국 문화의 큰 별은 ‘수필가’나 ‘시인’ 같은 한 단어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열 명의 삶을 살다간 사람

향년 86세. 천수를 누렸지만, 그가 살았던 삶의 밀도를 생각하면 안젤루는 열 명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안젤루는 수필가이자 시인이었으며, 시낭송 앨범으로 그래미상을 세 번 수상했었고, 식당 조리사, 오페라 수석 무용수, 전차 운전기사, 작곡가, 시사잡지 편집인, 비서, 인권운동가, 마담뚜, 토니상에 노미네이트된 뮤지컬 배우, 스트립 댄서, 문학 교수, 자동차 정비공이자 TV 드라마 [뿌리](Roots, 1977)에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한 탤런트이기도 했다.

마야 안젤루의 사진들
마야 안젤루 (Maya Angelou, 1928~2014) (사진: mayaangelou.com)

마틴 루터 킹 목사, 말콤 X, 피델 카스트로와 교우를 나누며 중동과 아프리카를 종횡무진했고, 그의 글에 담긴 목소리는 전 세계의 유산이 되었다. 그가 자란 1930년대 미국 남부 아칸소의 차별과 압제를 초월하기 위해선, 그렇게 부활에 부활을 거듭하는 삶을 살았어야 했는지 모를 일이다.

나의 여동생(Mya sister)

마거리트 존슨은 1928년 4월 4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마야”라는 별명은 언제나 안젤루를 ‘나의 여동생(Mya sister)’이라고 불렀던 오빠가 어린 시절 붙여주었다. 세 살배기 안젤루는,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아칸소주 스탬스라는 소도시로 이사가 할머니와 살게 됐다.

미국의 흑인들이 남북전쟁 이후 어떠한 압제하에서 살았는지 한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노예해방이란 잠깐의 자유에 뒤따른 무시무시한 인종차별과 폭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1800년대 미국 사회의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1800년대 미국 흑인 노예의 모습을 담은 그림 (출처: civilwar-pictures.com)

1863년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 이후 100년이 넘도록 미국의 흑인은, 일제시대 하의 한국인의 삶보다 더 지난하게 살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수탈은 법제화되었으며, 테러리즘이나 마찬가지인 폭력은 전혀 규제되지 않았고, 법의 보호는 흑인사회까지 미치지 않았다.

경찰견으로 흑인 시민을 폭력적으로 검문하는 백인 경찰의 모습 (1960년대 미국) (사진: 출처 미상)
경찰견이 흑인 시민을 향해 뛰어들자 이를 저지하는 백인 경찰의 모습 (1960년대 미국) (사진: 출처 미상)

7살 아이, 거대한 폭력과 침묵을 만나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할머니 덕택에 안젤루는 비교적 여유 있는 유년기를 보냈으나, 시련은 곧 찾아왔다. 7세 때 어머니의 남자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었다. 범인은 잡혔고 재판을 받았으나, 형을 살기 전에 안젤루의 삼촌들에게 살해당한다.

이 사건은 어린 안젤루에게, 자신이 말을 했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두려움을 불어넣었다. 안젤루는 이후 몇 년간 실어증에 시달렸으며, 문학에 대한 애정을 키워나가면서 서서히 한 마디씩 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언어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것은 대문호의 필수요건이겠으나, 그 대가는 끔찍했다.

Fulla T, CC BY NC https://www.flickr.com/photos/topaz-mcnumpty/3612002348/in
Fulla T, CC BY NC

운전기사에서 싱글맘으로 그리고 무용수로

이후 14살의 안젤루는 어머니를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청소년기를 보낸다. 키가 무려 183cm였고 무용에 소질을 보였던 안젤루는 자신감이 넘쳤다. 16세에 안젤루가 샌프란시스코의 첫 흑인 여성 전차 운전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안젤루의 진취성을 보여준다. 안젤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들을 낳아 싱글맘이 되었고, 캘리포니아를 전전하며 궂은일을 하며 아들을 키웠다.

그러나 무용의 꿈은 포기하지 않아, 그 기간 동안 계속 현대무용을 배우며 전문 무용수로 데뷔한다.


“마야 안젤루”라는 예명도 이때 지었다. 안젤루는 무용수로 성공하여 전 세계를 투어하는 오페라 무용수로 성공했으며, 자신이 작곡한 음악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등단 그리고 흑인 인권운동과의 조우 

1959년, 안젤루는 문학계에 등단하면서 뉴욕으로 이주한다. 뉴욕에서 안젤루는 흑인 인권 운동의 영웅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만나, 점점 속도를 올리고 있었던 인권운동에 지도자 역할로 동참하게 된다. 인권운동 과정에서 안젤루는 남아공의 인권운동가 부숨지 마케와 사랑에 빠져, 마케와 함께 이집트 카이로로 이주하여 아랍권 뉴스를 제공하는 영문 매체의 부편집장이 된다.

마야 안젤루가 쓴 책들
마야 안젤루가 쓴 책들 (사진: mayaangelou.com)

마케와 결별한 후 안젤루는 가나 아크라로 이주하여, 마침 중동과 아프리카를 연계하는 전략을 펼치려 아크라에 장기 체류한 말콤 X와 막역한 사이가 된다. 안젤루는 말콤 X의 활동을 보조하려 1965년에 미국으로 귀환했으나, 말콤 X는 다음 해에 암살당하고 만다. 낙심한 안젤루는 하와이, LA를 떠돌며 노래를 부르고, 무용하며 글을 썼다.

말콤X와 마야
말콤 X와 함께 한 마야 (아프리카 가나, 1964) (사진: mayaangelou.com)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1969)

그리고 1969년, 안젤루는 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인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I Know Why the Caged Bird Sings, 이하 ‘새장’)를 출간한다. ‘새장’은 모든 면에서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마야 안젤루의 자전적 기록, '나는 새장 속의 새가 왜 노래하는지 아네'
마야 안젤루의 자전적 기록,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

형식상으로 볼 때는 마야 안젤루가 17세가 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쓴 자서전이다. 그러나 여느 자서전과는 달리, 소설의 기법을 사용하여 인물을 구성했고, 대화를 설정했으며 테마의 선을 따라 서사를 펼쳤다. (그런 점 때문에 ‘자전적 소설’로 분류되기도 한다.)

안젤루는 ‘새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나 나레이션을 담당하는 어른의 목소리와 어린 시절의 ‘마야’를 같지만 서로 다른 인물로 설정했다. 어른인 안젤루와 어린 마야를 책에서 종종 ‘우리’라는 대명사로 지칭한다. 자서전은 자기중심적으로 흐르기가 쉬우나, 안젤루는 이러한 기법으로 자아를 형성하는 여러 갈래의 실타래를 자연스럽게 하나로 엮었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객관화했고, 결과적으로 더 큰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흑인 여성이 쓴 자서전, 인종차별 민낯 드러내다

내용 면에서도  획기적이었다. 그때까지는 전 세계적으로도 여성의 자서전은 드물었다. 당연하게도 미국 흑인 여성이 쓴 자서전은 전무했다. 안젤루는 ‘새장’에서 그가 처했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마야가 그 현실 속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를 서술함으로써, ‘흑인’, 그리고 ‘여성’이란 집단 이름의 무게를 뛰어넘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흑인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선보였다.

마야가 겪은 삶은 당시 흑인여성에게 흔한 삶이었으나, 미국 사회에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인종차별의 민낯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치사하고 악독했다.

유색인종과 백인종으로 분리된 식수대
유색인종과 백인종으로 분리된 식수대 (사진: 출처 미상)

순전히 자신만의 노력으로 가겟방 하나를 낸 할머니를, 그만큼도 이뤄내지 못한 ‘가난한 백인 쓰레기’들은 경멸하고 모독했다. 동네에 유일한 치과의사였던 백인은, 대공황 때 할머니의 돈을 빌려 파산을 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야의 삭은 이를 고쳐주지 않는다. KKK의 무차별적인 흑인 살해를 피하려 마야의 삼촌은 수시로 야채를 담는 들통 안에 숨어야 했다.

하지만 흑인들은 고난 속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선해지지 않았으며, 그 소사회의 약자 – 즉, 마야 같은 어린 소녀 – 는 성폭력에 노출된다. 마야는 실어증에 걸리지만, 문학과 이야기의 힘으로 점차 제 목소리를 찾아가며, 지난한 현실을 존엄을 가지고 맞서는 자아를 계발한다.

‘새장’에 대한 폭발적 반응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새장’은 출간 후 2년간 뉴욕타임즈 논픽션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기재되어, 최장기 베스트셀러의 기록을 세운다. 그리고 미국 고등학생들의 필독 교재가 되었으며, 생생한 폭력과 성범죄의 묘사가 부담스럽다는 보수적인 학부모들이 오랫동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필독서로 읽히고 있다.

마야 안젤루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를 한창 출판하던 때인 197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은 사진 (사진: mayaangelou.com)
‘새장’의 힘, 마야 안젤루의 호소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 힘은 개인과 그 개인이 소속한 집단에 대한 관계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연대’라는 아름다운 개념이 그 소수자들 내부의 권력관계를 거치면서 뒤틀어져, 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들이 (특히, 주로 여성이) 더 극심한 억압과 차별을 받는 경우는 70년 전 미국이 아니라 현재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새장’ 속의 삶과 현실을 극복하고 어루만지다 

‘새장’ 속의 현실은 단순하지 않다. 백인은 흑인을 억압하지만, 흑인 남성은 흑인 여성을 억압하고, 흑인 어른은 흑인 아이를 강간한다. 선악이 모호한 이 난관을 타개하는 방법은, 새장 속에서도 노래하는 새처럼, 현실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강한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마야의 삶에서 보듯, 그러한 자아 형성의 길은 순탄하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을 통해 형성된 자아는, 굴곡 없는 삶을 통해 형성된 자아보다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지닌다.

노년의 마야 안젤루는 그렇게 만들어진 깊은 울림으로 여러 사람의 삶을 어루만지는데 힘썼다. 명문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에서, 문학뿐 아니라 연극, 철학, 윤리, 신학 또한 가르쳤다.

미국인들을 하나로 묶은 ‘어른’

터프한 랩퍼 투팍(Tupac)이 무서운 게 없이 날뛰던 시절, 안젤루의 몇 마디 말이 투팍을 아이처럼 울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웨슬리 스나입스가 출연한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안젤루는 취임식에서 자신의 시를 낭송하여 케네디 이후로 32년 만에 취임식에서 시를 낭송한 시인이 됐다.

2011년, 미국 정부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마야 안젤루에게 수여한다.

마야 안젤루에게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목에 걸고 있는 버락 오바마(2011, 사진: 퍼블릭 도메인)
마야 안젤루에게 대통령 자유 메달을 걸어주는 버락 오바마(2011, 사진: 퍼블릭 도메인)

단지 개별적인 개체의 모음일 뿐 사회로서 작동하지 않을 때가 많은 미국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 깊고 큰 울림을 지난 사회적 상징으로서 마야 안젤루는 미국인들을 하나로 묶는 큰 어른의 역할을 맡았다. 안젤루가 타계한 후 한 미국 언론의 추모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마야 안젤루 수준의 거인이 영면했을 때, 우리는 마야 안젤루가 그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주길 기다렸다.”

안젤루 없이 이제 누가 미국 사회에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줄 것인가? 미국 역사에서 이처럼 드높은 상찬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은 어쩌면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야 안젤루의 1993년 당시 모습
왜 당신이 그렇게 춤추고, 노래하며, 기록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고마워요. 마야, 안녕…… (사진: 1993년 당시 마야 안젤루,  mayaangelo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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