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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 페인, “Babe Ruth Retires No. 3” (1948년 6월 13일)
페인은 이 사진으로 1949년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1948년 6월 13일, 위대한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는 자신의 등번호를 영구결번하는 행사에 참여합니다. 모두가 이 영웅의 멋진 얼굴을 클로즈업하기 위해 일찍부터 나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전성기 홈런을 쳤을 때처럼 카메라를 향해 웃어달라구!” 하지만 그 날 찍은 사진 중 가장 오랫동안 회자된 작품은 남다른 위치에서 영웅을 바라보았던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나다니엘 페인(Nathaniel Fein)의 손에서 나왔죠. 이날 단 한 명의 사진기자만이 이 영웅의 쓸쓸한 뒷모습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한때 영광을 거머쥐었던 늙은 영웅의 뒷모습과 그에게 열광하며 인사하는 건강한 관중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역사의 별이 반짝이며 등장했다가 이내 소멸하는 아름답고도 슬픈 장면을 너무나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베이브 루스는 이 행사에 참석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납니다.

좋은 사진이란 게 뭘까?

과연 좋은 사진이란 게 무엇이냐, 좋은 사진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저는 좋은 사진은 그 사진을 찍은 사람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이든 반성이든 어떤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차피 평가는 주관적이지만, 만약 여러 사람이 좋은 사진이라고 얘기하는 게 있다면 아마도 그런 사진을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게 ‘사진가의 시선’이라고 생각해요. 카메라의 화질,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순발력과 인내, 빛을 다루는 능력, 심도와 화각을 고려한 렌즈 선택, 적절한 프레이밍과 구도, 주제를 부각시키는 후보정 등등 역시 모두 중요하지요. 그러나 하나만 선택하라면, 저는 역시 피사체를 사진으로 담는 사진가의 시선이야말로 사진을 만드는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사체 그 자체에 다가가기

그리고 이 시선과 관련하여 적어도 저에게 가장 합리적이고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해석이 있습니다. 오늘날 의미 있고 좋은 사진이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는 어느 다큐 사진이 아니라는 겁니다. 혹은 피사체 자체를 부정하고 형태나 선의 미학적 측면만을 탐구하여 오직 ‘해체’에만 관심을 두는 포스트모던한 작가주의 또한 좋은 사진은 아니죠. 우리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찍혀진 사진이 무엇에 관해 거짓말하는지 민감하게 검토할 수 있어야 합니다만, 동시에 베이브 루스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에서 사진가의 폭력적 언어, 내 맘대로 작가주의를 배제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진에서 사진가의 표현뿐만 아니라 베이브 루스 자체를 만나야죠. 그 자신에게 아직도 남아있으나 그동안 그 자신에게조차 간과되었던 고유한 피사체 그 자체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사진작가가 사진을 맘대로 구성하고 만드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관념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돌멩이를 걷어차는 심정으로 피사체를 긍정하고 있는 그대로 믿는 믿음으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시선’ (point of view)

나다니엘 페인은 도대체 앞모습 찍기도 아깝고 바쁜 상황에서, 쓸 데도 없을 뒷모습을 찍으러 뒤로 기어들어 갈 생각을 했을까요? 적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비싼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기다렸다가 연사를 잽싸게 갈긴다고 해서, 적정 노출을 잘 계산했다고 해서, 망원렌즈와 광각렌즈를 모두 준비했다고 해서, 삼분할 구도를 잘 지킨다고 해서, 버닝(burning)과 닷징(dodging)을 통해 후보정을 예술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해서 베이브 루스의 뒷모습을 찍을 수 있었던 건 아니라는 겁니다.

또한, 남들이 얘기하는 가장 사진 잘 나오는 자리를 잡으려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함도 좋은 사진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몰라요. 소위 밴티지 포인트(vantage point)가 아니라, 시선(point of view)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오직 떠나는 늙은 영웅에게서 과거의 영광을 바라보고 싶어하는 관중의 관점이 아니라, 저무는 역사의 한편에서 지난 영광을 떠올리는 베이브 루스 자신의 시선으로 옮겨가고자 했던 그 동감하는 마음만이 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이유였죠. 이토록 사진은 피사체에 육박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찍히는 사람이나 대상의 마음을 느끼는 것. 찍히는 대상에서 발견한 어떤 것을 그대로 옮겨 담아주고 싶은 사진가의 마음.

바로 이것이 자동카메라의 시대에 사진이 이제 아무나 찍는 것이 되었지만, 아직도 ‘좋은 사진’을 아무나 찍지 못하는 이유일 겁니다.

좋은 사진을 위한 제1원칙

그래서 제1원칙: 좋은 사진은 사랑이 많은 사람, 대상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찍는다.

마음과 시선을 닦고 배워 피상적인 이해에서 더 넓고 풍부한 이해로 나아가자. 이것이 제가 가장 배우고 싶고, 또 카메라에 관심 있는 모두에게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미지가, 에드워드 웨스턴의 말처럼 “사물 그 자체”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으면 사진가는 실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사진가는 단지 자아를 기준으로만 이미지를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이건 내가 느낀 방식이다.” 라고요. 머지않아 이런 태도는 아주 진부하고 피상적인 작품들을 정당화하려는 헛된 노력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번쇄한 정신분석 작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데이비드 헌(매그넘), “사진가론(On Being a Photographer)”, 캔로그웰닷컴, 1997.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피사체에게 다가갑니까?

보유: 시선이 돋보이는 사진들

로버트 프랭크, 정치집회 (시카고, 1955~56)
로버트 프랭크, 퍼레이드 (뉴저지, 1955~56)
제임스 낙트웨이, "에이즈에 감염된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남아프리카, 2000)
제임스 낙트웨이, “에이즈에 감염된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남아프리카,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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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댓글

  1. 카메라 감독이 되고 싶은 한 사람입니다. 잦은 시험낙방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오게 됐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글을 쓰실 때 도움이 될만한 책들이나 자료는 어떤 걸 보면 좋을까요? 사진노트를 보면서 여러모로 깨닫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 안녕하세요? 카메라 감독을 꿈꾸는 분에게 본업과 관계 없이 카메라로 장난치는 제가 무슨 조언을 하겠습니까? 꿈 잃지 말라고 힘내시라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사진/영상 관련 시각 미디어 관련한 이론, 강좌, 모범은 너무나 넓게 흩어져있어서 모든 예술 분야가 그렇듯 이것부터 보라고 권장하는 행위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길을 걷다가 마음을 쿵! 하고 움직인 어떤 사진 한 장을 보았다면 그것을 시작으로 병적으로 집착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누가 찍었을까, 그 사람은 어쩌다가 사진을 찍고 있는가? 그 사람의 사진을 어떻게 해설하고들 있는가.. 방학 때 도서관에서 그러면서 여러 날을 보내는 그 시간이 제게는 참 좋은 경험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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