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셜서비스 타임라인에 아이들 사진이 부쩍 올라온다. 결혼한 친구들이 어느덧 애 엄마, 애 아빠가 된 것이다. 사진을 넘기다 문득 궁금해진다. 나를 닮은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날 닮은 아이를 보는 기분은 어떨까. “욕심 같아선 줄줄이 낳고 싶지만, 혼자 키울 것도 아니니”라고 말은 하면서 이름은 넉넉히 생각해뒀다.
‘윤봄, 윤여름, 윤가을, 윤겨울.’
대충 떨이로 지은 이름 같아도 나름 오랫동안 고민했다. 성과 어울리는 순 한글에 영어로도 쓰기 쉽게, 계절이 지나가듯 별일 없이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다섯째 아이]의 부모 데이비드와 해리엇 역시 아이 욕심으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아이를 적어도 여덟은 낳을 것이라고 결혼 전부터 호언장담하는 이 부부. 심지어 데이비드는 걱정하는 부모에게 모성애라곤 찾아보기 힘든 자기 엄마와 아내 해리엇은 애초부터 다르다고 당돌하게 이야기할 정도다. ‘불굴의 모성애’를 지닌 해리엇과 함께라면 무엇이 걱정이랴. 그들이 그토록 꿈꿔왔던 화목한 가정 그리고 행복은,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꿈만 야무지고 대책이라곤 없는 두 사람. 시부모의 금전적인 지원과 친정엄마의 헌신으로 그럭저럭 가정을 꾸려나간다.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느끼면서도 그들이 일궈낼 미래를 생각하며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팔 남매 프로젝트’ 역시 첫째 루크를 시작으로 헬렌, 제인, 폴까지 거칠 것이 없다.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벤은 ‘특별한’ 아이다. 배 속에서부터 무자비한 발길질로 엄마 해리엇을 지독하게 괴롭히더니 (고통을 잊기 위해 진통제를 삼키고 부푼 배를 안은 채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하는 임산부를 상상해보라), 일찍 세상에 나와선 엄마 가슴을 뜯어 삼킬 듯이 난폭하게 젖을 빨고, 걷기가 무섭게 개를 목 졸라 죽이며 온 가족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문명을 거부하는 흉측한 괴물, 다섯째 아이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2.
2014년 7월, 여느 때와 다름없던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다섯째 아이]에 서성이는 불길함 때문에 왠지 모르게 심란했다. 책을 덮고 뉴스를 확인하니 사건, 사고 소식이 즐비했다. 광주에선 소방 헬기, 유럽에선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추락했고, 팔레스타인에선 무고한 아이들이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희생됐다. 오늘이 태안 해병대 캠프 참사 1주기라고도 했다. 안산에서 국회로 도보 행진을 하는 세월호 생존 학생들의 모습도 생중계됐다. 너희가 무슨 죄라고. 답답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 이메일을 확인하니 새벽 5시 17분, 우리 회사 CEO가 전 직원에게 보낸 메일이 와 있었다. 소문으로만 돌던 구조 조정 관련 내용이었다. 만팔천 명이라니. 6년 전 입사할 즈음 금융 위기를 핑계로 정리되었던 숫자보다도 많다. 곧이어 내가 속해있는 운영체제 그룹의 대장도 메일을 보냈다. 오전 11시까지 개별로 연락이 갈 것이라 했다. 덤덤한 듯 썼지만 미안함이 느껴졌다. 그를 좋아하는 나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회사로 출근하여 평소와 다름없이 일했다.
오후 두 시가 다 돼서야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식사 후 메일을 확인하니 매니저가 갑작스럽게 팀 미팅을 잡아 놓았다. 서둘러 가본 회의실은 평소의 웃음기라곤 싹 빠진 무거운 공기로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속한 개발팀은 괜찮지만, 테스트팀의 절반 이상이 해고되었다. 미팅을 나와 그동안 함께 일하던 한국인 형님부터 찾아뵀다. 항상 고단해 보이셨는데 오늘 오히려 홀가분한 모습. 코드 리뷰 보낼 게 있었는데 안 해도 돼서 좋다며 웃어 보이셨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3.
십여 년 전 셋째 고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전날 근처에 볼일이 있어 인사드리고 갈까 하다가 다음에 뵙지, 하고 말았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생전 처음 가본 빈소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촌 누나를 마주했다. 손을 잡고 뭐라 말을 하려던 것이 누나의 얼굴을 보고 콱 막혀버렸다. 겨우, “힘내세요, 누나” 하고 말을 건네곤 위로를 한답시고 멍청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죽음이 아니었기에 괜찮으시겠지,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했다. 안일한 내가.
“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더 노력해야 된다는 말이었어요.” (이자영)
“지금 당신을 가장 절망케 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창근 씨의 아내 이자영 씨가 대답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소소한 행복, 일상이란 게 얼마나 얄팍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지. 견고하게 쌓는다고 쌓았는데 거센 바람 앞에 어찌 그리 맥없이 무너지고 마는지. 감당할 수 없는 무력감에 저항할 의지마저 꺾여버린 채, 사는 게 아닌 그저 살아지는 일상. 있는 힘껏 발버둥 치면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쳇바퀴 돌 듯 어김없이 바닥을 치는 일상 아닌 일상.
4월 16일 이후 세월호 유가족들의 ‘일상’은 오죽할까. 304명이라는 숫자에 가려져 있는 한 명, 한 명을 들출 때마다 아프지 않은 이름이 없다. 아이를 떠올리며 힘겹게 말을 잇는 유가족의 모습이 때론 불편하지만, 잠자코 듣는다. 그들은 그저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니까.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를 토해내지 못하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없으니까. 내 일상을 떼어 주는 게 뭐 얼마나 힘든 일이라고. 날마다 날마다 장례식인 삶에 비하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4.
아주 오래전에 아버지께서 나와 내 동생 사주를 보고 오신 적이 있다. 그분 말씀이 내 동생은 무척 운이 좋은데, 나는 운이 별로 없다고 하셨단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똑같이 치토스를 사 먹어도 꼭 동생 것에만 들어있던 ‘한 봉지 더’. 어린 마음에 부럽다는 생각부터 들던 중 아버지가 한마디 덧붙이셨다. 대신 나는 노력을 하면 그만큼 이뤄진다, 했다고.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노력만큼 돌려받는, 아니 노력할 여력이 있는 삶도 얼마나 운이 좋은 것인지를.
어떤 이들은 쉽게 이야기한다. 나태해지지 말라고, 남 탓 말고 불평불만 늘어놓지 말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내가 성공한 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잘난) 내가 부지런히 노력한 덕분이라고. 내가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것도 아마, 그런 자신감 혹은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해보니까 되더라 싶은, 노력이 날 배신한 적이 없는, 때때론 노력 이상으로 풀리던 삶이었으니까. 치명적인 불운 한번 겪어 보지 않은 평탄한 삶.
세월호 유가족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2014년 4월 16일 이전까진 그러했을 것이다. 녹록하진 않지만 그래도 근근이 기쁨을 주던, 살아갈 이유가 있던 삶.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남들한테 피해 안 주고 내 할 일 하면서 살면 될 줄 알았다고.
우리 삶에도 언제든지 ‘다섯째 아이’가 끼어들 수 있다.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 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아무리 인간의 문명이 발달한들 틈새는 있기 마련일 테니까. 문명을 거부하는, 문명으로 길들지 않는 야만은 어떻게든 우리 안에, 우리 곁에 남아있을 테니까.
그렇게 문명이 닿지 않는 곳에 사람이, 닿아야 한다고 믿는다.
[다섯째 아이]를 읽던 밤,
세월호 생존 학생과 유가족들이
안산에서 서울광장까지
꼬박 하루를 걸어갈 때
길거리에 점점이 서서
생면부지의 그들을 안아주고
곁에서 함께 눈물 흘리던
‘우리’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