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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자살: 드러난 자살과 감춰진 살인

식물인간 아들과 동반자살 ‘안타까운 부정’
식물인간 아들과 동반자살 선택한 아버지의 눈물
‘아들아 미안하다’…25년 돌보던 식물인간 아들과 동반자살
식물인간 아들 25년 병 수발 50대 아버지 동반자살
25년째 식물인간 아들 돌보던 아버지 안타까운 동반자살
식물인간 아들 25년 돌본 父…불 질러 동반자살
수십년째 식물인간 아들 돌보던 부정 결국엔 ‘동반자살’

어제(2013년 11월 18일) 충남에서 있었던 안타까운 소식이다. 기사 제목만으로도 그 안타까움은 그대로 전해진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을 전달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언론들은 이들의 죽음을 ‘동반자살’이라고 부른다.

‘동반자살’은 없다 

자살은 자신을 죽이는 행위다. ‘동반’의 사전적 의미는 “일을 하거나 길을 가는 따위의 행동을 할 때 함께 짝을 함”이다. 기사에서 아버지는 자살한 게 맞다. 하지만 식물인간인 아들은 자살하지 않았다. 자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없다. 그런데 동반자살이라니. 말이 안 된다.

누군가의 자살을 용이하도록 방조할 수도 있고, 피해자가 승낙한 승낙 살인도 가능하다. 하지만 동반자살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살은 자신의 일신에 전속한 생명에 관한 처분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인이 함께 죽음을 결심하고 이를 함께 실행하는 ‘동반자살’은 엄밀하게 말해서 자신에 대해선 자실이지만, 상대방(들)에 대해선 ‘자살방조’에 불과하다.

아들이란 ‘물건’을 처분할 수 있는 아버지란 존재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자살할 때 이를 ‘동반자살’이라고 표현하는 건 더욱 기만적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동반자살’이라는 말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들린다. 언론에서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쓰고, 또 사람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위 충남의 ‘동반자살’ 기사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식물인간 아들을 25년째 돌보던 아버지가 집에 불을 질러 아들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중략…) 경찰은 평소 김씨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말을 자주 했다는 유족들의 진술 등으로 미뤄 김씨가 집에 불을 질러 아들과 함께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 연합뉴스, ‘아들아 미안하다’…식물인간 아들과 동반자살, 2013년 11월 18일 

아들의 생명과 아버지의 목숨은 서로 별개다. 이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기사에서 아버지의 목숨과 아들의 생명은 마치 하나의 쌍처럼 취급된다. 아들은 “함께”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아버지의 소유물, 마치 물건 같다. 기사 속에서 식물인간 아들은 ‘물건’처럼 묘사되고, 아버지는 이 ‘물건’을 처분할 수 있는 비극적인 주체로 묘사된다. 물론 기사의 주어는 아버지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가족관계를 구성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 이 복수의 죽음을 이 기사에서처럼 ‘동반자살’이라고 표현하는 건 유교적인 정서가 여전히 잔존하는 영역, 즉 가족이라는 단위에서 부모가 자식을 소유한다는 관념을 정당화한다. 거기에 더해 이 표현은 자식의 목숨을 부모가 처분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강하게 암시한다. 상식적으로 찬찬히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지만, ‘동반자살’이라고 표현하면 뭔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그 표현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말의 힘: 말이 숨기는 부조리 

말은 그저 피상적인 관념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다.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의식과 욕구, 그리고 그 말을 널리 인정하는 사회의 의식을 그 말은 담는다. 그렇게 그 말은 실체적인 행위와 그 행위의 잠재적 실현 가능성까지를 내포한다. 즉, 말은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행위)의 잠재적인 실현을 예비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이 갖는 비도덕성과 비합리성, 더 나아가 반사회성은 아주 분명해진다.

누구도 자기 아닌 자의 죽음을 ‘동반’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아무리 자식의 불행한 미래를 예측해 그 미래를 막아보려는 부모일지라도 말이다. 더불어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사회적인 책임을 위장하고 숨기는 이데올로기로써 작용한다. 사회의 부조리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아비(혹은 어미)의 안타까운 부정(모정)’으로 둔갑시키는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휴머니즘을 뒤집어쓴 기만적인 표현이다.

사회 전체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죽음은 이제 한 남자의 ‘동반자살’이라는 개인적인 비극으로 위장된다. 그리고 그 개인적인 비극을 그저 안타깝게 동정하는 것으로 이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는 끝나버린다. 이 남자가 아들을 ‘살해’하는 행위에 개입한 사회적 무관심과 공적 시스템의 부재는 그 비극 속에 묻힌다.

시마바라 성당에 있는 조각상  (사진: 빛=사랑)

시마바라 성당에 있는 조각상
(사진: 빛=사랑)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이 숨기는 ‘살인’

앞서 적은 이유로, 나는 ‘동반자살’이라는 제목으로 충남에서 있었던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론은 제목에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사 속 아버지는 아들을 살해하고,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비정하게도 그건 “동반” 자살이 아니라, 하나의 자살과 또 다른 하나의 살인이다. 그래서 기사 제목이 담아야 하는 사실은 ‘한 남자가 자식을 살해하고, 스스로 자살하다’이다. 그 사실의 한계 속에서 얼마든지 표제를 정하면 된다.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을 대체할 다른 표현을 찾을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문화적으로 ‘발명’된 표현일 뿐이고, 그 표현이 갖는 의미는 앞서 설명했듯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반사회적이기 때문이다. 그저 한 남자가 다른 한 남자를 죽이고, 스스로 자살했다. 사실로서의 죽음은 그뿐이다. 그렇게 표현하면 된다.

드러난 자살과 감춰진 살인 그리고 사라진 ‘책임’ 

나는 기사 속 ‘아버지’를 비난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는 아들을 죽이고, 자신마저 자신을 죽인 저 기사 속 ‘아버지’를 동정하고,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죽음보다 더한 삶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식물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삶을 끝내는 방식이 ‘피살’이어도 괜찮은 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아마도 자식을 살해한 아버지를 차마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 공감하고, 그를 연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비정한 아버지는 훨씬 더 비정한 국가와 사회로부터 살인을 강요 받은 힘없고, 지친 노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에게 살인이라는 형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다만, 그 책임을 져야 할 아버지는 죽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버지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동시에 국가와 사회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그 아버지에게 무엇을 했는지 물어야 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사회의 공적 시스템에 우리는 눈길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비극이 단지 그 아버지에게 닥쳤을 뿐이니까. 그래서 언론은 마땅히 그 부실한 공적 시스템을 비판하고, 저 아버지와 같은 불행한 존재가 더는 생기지 않도록 구체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지금 언론이 써야 하는 건 육하원칙으로 기록된 어떤 죽음의 메마른 서사만은 아니다. ‘동반자살’이라는 기만적인 언어로 관습적 휴머니즘에 편승해 구조적인 모순을 한 가정의 개인적인 비극으로 포장하는 일도 아니다.

그 죽음, 하나의 드러난 자살과 또 하나의 감춰진 살인 속에 있는 부조리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일, 언론이 정말 해야 하는 일은 바로 그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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