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A 씨가 이 글을 읽기를 원하면서, 또 동시에 A 씨가 이 글을 읽을 수 없기를 바란다. 나에게 상처를 준 A. 나는 성범죄의 피해자고, 성희롱의 피해자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마음일까. 잊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무거운 짐처럼 혹은 보이지 않는 낙인처럼 짊어지고 사는 여성은 이 땅에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뉘우치는 가해자를 너무 과도하게 악마화하는 것은 아닐지, 인간적인 연민과 함께 걱정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건 내 탓이잖아…
사람들은 내가 당차고, 자신감이 충만하다고들 한다. 그리고 친한 지인들은 ‘무대포’, ‘오지라퍼’라고 내 적극성을 친근하게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나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배우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대부분 나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연장자들이었다.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고, 나보다 조금 어린 자녀가 있는 남성들도 많았다.
그들 중 일부는 나에게 스승이자 삶의 지표였다. 이들 중 몇몇은 나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입밖에 꺼내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혼자서 속앓이하고,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렸다. 난 당당히 나서지 못했다. 그렇게 존경받는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여전히 무대포인 나에게도 너무 두려운 일이었다.
왜 말하지 못했냐고? 왜 당당하게 공론화하지 못했냐고? 그건 내가 투사가 되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내가 투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에서 투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속물이다.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견에 휩싸여 2차, 3차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일인지 나도 조금은 안다.
내 길을 밝혀줄 것 같았던 A 씨
이 글을 쓸 때 제일 먼저 떠오른 A라는 분이 있다. 그는 권력관계가 아니었다면 내가 만나지도 않았을 사람이다. 내가 막연하게나마 지향하는 사회적 실천의 길에 그가 있었다. 그가 내게 손 내밀었을 때 난 정말 고마웠다. 그 길로 나를 인도해주리라 생각했다. 나는 A처럼 훌륭한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게 행운이라 생각했다. 연줄도 전혀 없고, 가난하고 못 배운 평범한 부모님 자식으로 태어난 나에게 그는 이상향 그 자체였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인자한 얼굴의 그. 하지만 그는 참 무례했다. 나이도 지위도 나보다 한참 위의 그가 나에게 이상한 말들을 내뱉었을 때, 나는 나를 시험하는 거라고 애써 위로했다. 그 다음, 다음, 점점 더 이상한 요구를 했다. 하지만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높은 지위였으니까. 내가 정확하게 “싫어!”라고 말하지 못했던 건, 그가 나에게 거절당했다는 것 때문에 위해를 가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겨우 잡은 이 기회를 놓치게 될까 두려웠다.
겁쟁이라고 말해도 나는 목포에서 태어나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부모 밑에서 겨우겨우 깡다구 하나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기에 그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자리’가 너무도 간절했다. 내가 그에게 정확하게 싫어! 라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성인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을 정도로 거절 의사를 표했다. 예를 들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정색하며 웃는) 하하하” 등 내 나름으로 그의 ‘이상한 호의’를 거절하는 의사를 소극적으로 표현했다.
난 무서웠다. 내가 그의 행위를 대외적으로 표명하면 나를 위해 싸워 줄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다.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맞을 거로 생각한다. 내 이야기를 알고도 다들 ‘그 분’ 앞에선 작아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와 똑같진 않지만, 비슷한 일을 당한 아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으니까.
내가 투사가 될 수 없는 이유
예전에 어떤 대기업에서 일어난 성희롱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본 적이 있다. 피해자도 사람이고, 가해자도 사람이다. 서로에게 허물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사건이 생기면 가해자는 오히려 억울한 희생자인 양 바라보고, 피해자에게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이 쏟아지는 것 같다.
“그 여자 억세다더라..” , “그 여자가 그렇게 꼬리 치고 다닌다며”. “그 여자 돈 받으려고 그런 거래” 라는 등 무책임한 풍문들이 떠돌아다니기 일쑤다. 이런 풍문의 포화에 맞서 당당히 싸울 수 있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 그럴수록 용기를 내야 한다고? 그런 용기를 왜 가해자 남성의 친구들에게는 요청하지 않나. 난 그래서 더 투사가 될 수 없었다.
이처럼 성희롱 사건에서 거대한 기업에 맞서 싸우고, 온갖 소송을 끝끝내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녀(삼성전기 이은의 씨)처럼 더 커다란 세상의 불의와 비합리에 맞서 싸우고자 로스쿨에 진학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질 수 있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침묵의 동조자들
다시 A 씨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A를 따르는 사람들이 A의 습관화된 성희롱에 문제 제기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 분들 역시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분들이고, 소위 전문가들이며, 대개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다. 세칭 아주 좋은 분들이다.
그들의 침묵이 ‘나’라는 아이를 싫어해서는 아닐 거다. 본인의 삶, 본인의 가족,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다. 조직에 들어가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그 조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가 중요하니까.
나도 내가 조금 참으면 될 거로 생각했고, 꾹 참고 또 참고 살았다. 단지 불편함일 거라 생각했다. 꾹 참을 때에도 인권계에 돌아가 작은 주춧돌이 될 날만을 간절히 바랐고 지금도 그러하다. 어릴 적부터 인권운동에 투신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소리 내고 싶었고, 지금도 그 꿈은 마음 한편에 여전하다. 하지만 나도 결국은 침묵을 선택했다.
페이스북에서 고은태 씨 사건에 관한 의견을 남겼고, 댓글 대화가 이어졌다. 어떤 이는 나에게 투사가 되길 요구한다. 내가 사회적으로 의제를 공론화하길 바란다. 하지만 내가 왜?

투사가 된다는 건 어떤 걸까
투사가 되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검증’ 절차가 뒤따를 거다. 내 과거 사생활을 마치 공적인 검증절차인양 들쑤실 것이다. 남자친구와 한 사적인 행동들, 술자리에서 한 말과 행동, 내가 평소 입는 옷차림 모두가 마치 정의를 추구하는 듯한 그들에 의해 싸구려 농담으로 이야기될 것이 뻔해 보인다.
내가 투사가 되면 당신은 처음엔 나를 응원하겠지만 내 과거 사생활 하나하나를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이건 좀 짠데, 저건 좀 매운데, 이건 좀 질기지 않아, 마치 식도락이라도 즐기는 양 호사가로서의 뒷이야기를 즐길 것이다. 그리고 결국, ‘당해도 싸네!’라는 반응을 보이게 될 거라는거, 난, 그냥, 안다. 그렇게 내가 돌 맞는 막달라 마리아가 될 것을 나는 안다. 난 단지 나에게 가해지는 부당함을 호소한 것인데, 약자로서의 나를 도와달라 말한 것뿐인데……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끝까지 응원할 거에요’? 그러면 나는 묻고 싶다. 그동안 상처받을 우리 가족, 내 친구, 내 자존심, 내 사생활은 어떻게 지켜내 줄건대?
당해도 싼 여자? 섹드립치면 희롱당해도 되는가

고은태 사건의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트위터에서 신 나게 떠든 일명 ‘섹드립’ 때문에 당해도 싼 여자로 찍혔기 때문이다. 묻는다. 돈으로 도배해 옷 입고 다니는 사람의 돈을 뺏을 권리가 존재하는가? 돈 뺏길만한가? 당신이 집 자랑하는 사진을 올리면 사람들은 그걸 훔칠 권리가 있는가? 당신이 맥북 샀다고 자랑하는 사진을 올렸기 때문에 누군가 당신 맥북을 훔쳐도 정당화되는가?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다.
성에 전혀 관심 없는 순수 무결하게 순결한 여성에게만 성희롱을 인정하겠다는 당신들 때문에 나는 투사가 될 수 없었다. 참았다. 그래서 성범죄자를 고발하지 못했다. 다 내 탓이다. 비겁한 내 탓이다. 나는 투사가 되지 못했고, 여전히 투사가 될 생각이 없다. 단지 나는 불편 신고를 했을 뿐인데, 나에게 세상의 모든 불합리한 것을 고쳐내라고 주문한다. 무언가 고장 났을 때, 그것을 일단 고치는 것이 우선이지 그것을 만들어낸 회사를 뒤흔들 생각부터 하는 것 같다. 이건 아니지 않은가.
“그저 작은 깃발 하나를 올리는 일”(링컨)
나는 오늘 또다시 깨달았다.

말도 안되는 트윗에 대해 항의하는 글을 썼더니 나름 배운 어느 “외주제작사” 피디님께서는 나에게 지겹다고 한다. 그리고 주목받고 싶어서 부추긴고도 한다.


오늘도 사람들은 힘없는 일반 여성인 내게 묻는다. 여성이 제대로 ‘안돼! NO!’라고 외치지 않아서 그렇단다.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일단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더 큰 것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링컨의 말이 떠오른다.
“제가 할 일은 깃발을 올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깃발이 올라가고 나면, 그걸 유지하는 건 국민의 몫입니다.”
– 링컨
작은 깃발이라도 올려보고자 쓴 글을 여기에서 마무리한다.
참고로, 현행법상 “성희롱이란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해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 또는 성적 언동이나 그밖에 요구에 따르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행위”이며 성희롱 사건 발생 장소 1위는 기업체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법률이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하고 제재하는 것은 성차별적 편견이나 권력관계에 근거해 직장에서 직간접적으로 이루어진 성적 언동이 피해자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고 고용 관계에 있어 위축되거나 배제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데 있다”고 밝힌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권력 관계를 이용해 본인의 호감을 표시하는 경우 여성이 거절하지 않는다 하여 그것이 그 여성이 동의했다고 느끼는 다수 남성들이 있는데, 그것은 불복했을 때 뒤따르는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이지 당신이 맘에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좀 알아주면 좋겠다.
나는 사람주의자다.
사람으로서 정당하게 살 권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일 뿐이다.
내가 이런 글을 썼다고 또 나를 갑자기 투사로 바라볼 분들에게 미리 밝혀 둔다.
그러지 마요.
나도 사람이에요.
나도 예쁜 거 좋아하고, 돈 좋아하고, 넓은 집에서 살고 싶고, 좋은 차 타고 싶어요.
그래서 열심히 닭강정 팔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