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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의 신뢰도는 집계 이래 계속해서 세계 꼴찌 수준이다.

왜 이 모양일까. 4월24일 자유언론실천재단 주최로 열렸던 토론회에서 박진우(건국대 교수)는 질문을 뒤집어 마이클 셧슨의 말로 되물었다.

“사람들이 언론을 신뢰한 적이 있기는 했을까? 간단한 대답은 ‘아니다’다.”

왼쪽에 한겨레부터 오른쪽에 조선일보까지 통으로 묶어서 언론의 신뢰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가. 한국에는 등록된 정기간행물이 2만3000개가 넘는다. 누군가는 여기에 유튜브 채널을 몇 개 손에 꼽을 것이고 애초에 어디까지 언론이고 어디서부터 언론이 아닌지 경계도 모호하다.

한국에서 “언론을 신뢰하십니까”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30%나 된다는 게 오히려 놀라울 정도다. (아래 그래프는 모두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와 언론진흥재단의 공동 조사 보고서 가운데 발췌한 것들이다. 단위는 %)

먼저 언론의 신뢰도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이야기해야 한다.

박진우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특정 언론사에 대한 선호도신뢰도란 개념을 섞어서 쓴다. 좋아하는 언론이 없으니 믿을 만한 언론이 없다고 말한다는 이야기다.

최근 일련의 조사와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독자들은 저널리즘 원칙이나 규범을 근거로 언론을 신뢰하거나 불신하는 게 아니다. 저널리즘 원칙과 규범을 지키는 건 당연하지만 독자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그것만으로 떠났던 독자들을 돌아오게 만들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스스로의 이념적 지향에 따라 언론을 선택하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고 편향성을 엄격하게 따지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신뢰 주체(독자)와 신뢰 객체(언론)의 가치 지향 합치성(value congreunce)이 신뢰도의 중요한 변수라는 지적도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내 생각과 같은 언론을 믿고 아닌 언론을 불신한다는 의미다. 이런 현상을 ‘지각된 정파적 편향(perceived partisan bia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독자들은 언론의 성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사실 관계를 소홀히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할 때 강한 반발과 불신을 드러낸다. 결국 특정 언론인과 특정 언론사에서 출발한 불신이 언론 전반으로 확산되고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박진우는 “신뢰도 문제는 오랜 기간에 형성된 확신에 가깝다”면서 “삶의 이력 속에서 특정 언론사나 특정 매체와의 친화적 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것이 특정 언론인에 대한 신뢰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며, 반대로 특정 언론인에 대한 불신이 특정 언론사에 대한 불신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진화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이 언론을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건 언론이 편향적이거나 정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언론을 굳이 신뢰할 이유가 없고 신뢰를 쌓을 경험이나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나와 같은 관점의 뉴스를 선호한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조사에서 “나와 같은 관점의 뉴스를 선호한다”는 답변이 44%로 조사 대상 나라 가운데 가장 높게 나타난 것도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은 37%, 일본은 17%였다. 스스로를 진보 또는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편향이 더욱 높게 나타났다. “매우 보수”라는 사람들은 66%, “매우 진보”라는 사람들은 55%였다.

독자와 언론의 인식의 격차도 크다. 박진우는 “대중은 항상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뉴스를 원한다고 답변하는 경향이 있는데 언론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수준 이하의 뉴스가 포털에 넘쳐 나는 건 그게 그들이 원하는 뉴스이기 때문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언론인 입장에서 보면 독자들이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 건 그들이 좋아하는 기사를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이런 인식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미국신문협회의 연구에 따르면 언론의 신뢰 위기는 사람들의 정치적 태도 보다 도덕적 가치가 더 큰 변수다. “수용자 대중의 더 우연적이고 도덕적 정서적(moral) 계기들에 주목하고, 그 속에서 대중들에게 신뢰를 주는 뉴스 생산(기사 선택, 프레이밍의 방식 등)의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고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단순히 언론의 정파성 때문에 독자들이 떠난 게 아니라 전달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박진우는 언론인들이 테크놀로지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스스로 신뢰의 위기를 촉발시켰다고 본다. 클릭 수 중심의 뉴스 가치 판단과 소셜 미디어와 플랫폼에 의존하는 관행이 대표적이다. 박진우는 “한국 언론의 신뢰도 추락은 이미 1990년대부터 장기적으로 진행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현상”이라면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데도 한국 언론은 이같은 장기적인 평판을 역전시킬 별다른 수단이나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언론의 신뢰도 회복을 위한 박진우의 다섯 가지 제안이다.

첫째, 뉴스 퀄리티 못지 않게 뉴스 브랜드의 향상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도덕성에 대한 요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박진우는 정보 전달의 정확성이나 공정성, 정치적 편향성 논란이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고 본다. 결정적으로 신뢰를 깎아 먹는 건 이런 사건들이다.

  • 취재 윤리와 절차를 위반한 과잉 취재와 인권 침해.
  • 장충기 문자.
  • 조선일보 등의 발행 부수 조작.
  • 연합뉴스의 기사형 광고.
  • 김만배.
  • 세월호 보도.
  • 포털 뉴스의 공정성을 둘러싼 시비 등.

셋째, 어차피 독자들은 언론이 정치적 경향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차별적으로 소비한다. 상상 속의 독자들(imagined audience)에 의존하지 말고 공정성에 대한 지나친 강박을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다.

넷째, 언론인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다음과 같은 뉴스룸의 관행을 극복해야 한다.

  • 성과 위주의 조직 문화,
  • 단발적 정치 뉴스나 폭로 성격의 특종 위주로 구성되는 뉴스 가치 판단에 대한 구성원들 간의 인식 차이,
  • 문화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
  • 디지털 전환과 포털 의존적인 구조가 야기하는 관행 등.

다섯째, 언론 현장의 일상을 개선하고 대중에게 알려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념과 관행, 실천의 양상을 전체적으로 다시 검토할 필요성과 용기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진우는 “‘언론에 대한 불신’과 ‘대중에 대한 불신’을 상호 병행시키는 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뉴스의 정확성 혹은 진실성, 그리고 신뢰성을 둘러싼 대다수 개념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우선 전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박진우의 제안에 여기에 몇 가지 제안을 덧붙이고 싶다.

단순히 언론이 정파적이라서 신뢰를 잃는 게 아니라 정보의 접근 경로가 늘어나면서 시민들이 언론이 제안하는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시대가 됐다. 언론 보도가 정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언론이 사실을 임의로 편집하고 실체적 진실을 가리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하루 쏟아지는 뉴스가 10만 건이 넘는다. 독자들은 너무 많은 뉴스에 질식할 지경이고 좋은 뉴스가 없는 게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 뉴스인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문제의 본질이다.

뉴스 브랜드의 선호도와 신뢰도가 혼용되고 있다는 분석도 의미가 크다. 실제로 선호하는 신문은 있지만 뉴스 전반을 신뢰하지 않거나 아예 선호하는 신문이 없기 때문에 믿고 볼 신문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경우도 많다. 모든 신문이 믿음을 얻을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에게 믿고 보는 신문이 하나라도 있으면 언론의 신뢰가 전반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독자들을 탓하지 말란 이야기가 아니고 그렇다고 독자들의 편향적 소비에 영합하라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달라진 환경에서 어떻게 신뢰를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비관습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제안에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Stacie DaPonte, CC BY SA

의제 설정 기능과 맥락을 복원해야 한다.

첫째, 의제 설정 기능을 복원할 해법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뉴스를 열심히 읽지 않거나 체계적으로 읽을 여유가 없다. 포털 사이트는 뉴스를 파편화하고 맥락을 해체한다. 검색으로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은 매우 힘들거나 불가능하다. 언론은 언제나 현재를 기록하지만 인과 관계가 배제되고 사실 관계의 왜곡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둘째, 뉴스의 맥락을 복원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뿔뿔이 흩어진 기사 링크들 가운데 상호 보완 관계에 있는 것들을 서로 묶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뉴스 구조화의 핵심은 카테고라이징과 밸류에이션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도식적 카테고리 구분을 넘어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카테고리와 주제별 분류가 필요하다. 단순히 현재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현재의 시선으로 통시적으로 과거를 재해석하고 현재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뉴스의 플랫폼이 온라인으로 옮겨온지 오래지만 언론은 여전히 종이신문 시절의 문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셋째, 뉴스 브랜드의 회복이 필요하다. 뉴스의 패키지를 복원해야 하고, 독자들이 맥락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뉴스의 생산 방식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동시에 좀 더 투명하고 좀 더 친절해야 한다. 값싼 뉴스의 시대, 뉴스의 경쟁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뉴스는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지만 언젠가부터 아무도 뉴스에 비용을 치르지 않는다. 독자들이 떠난 게 아니라 우리가 독자들을 내쫓은 건 아닌가 돌아볼 필요도 있다.

넷째, 저널리즘 혁신은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 선택과 집중을 강화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광고의 종말을 직시해야 하고, 뉴스의 질적 혁신을 고민해야 한다. 진짜 중요한 뉴스를 가리는 많은 소음이 낡은 수익 모델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저널리즘의 원칙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뉴스 생산 시스템과 뉴스 생태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생존을 위해 타협하고 있는 것들을 과감히 단절할 때 비로소 독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절박한 위기 의식이 필요하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받아들여야 할 때다.

몽상적이지만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더 잘하는 것 외에 해법이 있을 수 없다.

가디언의 캐서린 바이너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한다면 언론은 그들이 신뢰할만한 사실, 필요로 하는 정보를 신중하고 정확하게 제공해야 한다.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한다면 언론은 자신의 플랫폼을 활용해 사람들의 상상력을 길러줘야 한다. 희망적인 아이디어, 신선한 대안, 현실과 다른 방식이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현 상태를 비판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하고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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