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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정치인인 울산 택시기사 김창현 님은 하루하루 겪은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연재합니다. 이 택시 일기를 필자와의 협의를 거쳐 슬로우뉴스에도 연재합니다. 택시라는 작은 공간 속에서 만난 우리 이웃의 이야기들은 때론 유쾌하게, 때론 담담하게, 또 때론 깊은 감동으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 이야기들을 거울삼아 우리는 삶을 돌아봅니다. 그 삶의 풍경을 매주 조금씩 공들여 담아볼까 싶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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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경, 나른한 오후 손님이 없어 졸면서 하염없이 콜만 기다리고 있다. 덜컥 차 문을 열고 남자들 두 사람이 차에 오른다.
“KTX 울산역 갑시다.”
승객도 없는데 이런 장거리 손님은 아주 반갑다. 자연스럽게 목소리 톤을 높여 “울산역이요. 예. 출발합니다.” 외친다. 그런데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소리치듯 말한다.
“어? 김창현 씨! 지금 뭐합니까? 하하.”
“하하. 반갑습니다. 보다시피 택시 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도통 안 보여서 궁금했는데 이렇게 다 만나네요. 할 만합니까?”
“예. 큰 의미부여보다 많이 배웠지요. 서민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살아가는지, 또 무슨 아픔과 고민을 하는지 조금 알았다고 할까요? 몸을 낮춰 민생을 배우는 겸손함을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하하. 아직 멀었지요. 많은 분들 만나 수많은 사연을 듣고 생각도 많아졌어요. 과거에는 주로 내가 사람을 설득하려고 했다면 이제는 많이 듣는 습관이 생겼지요.”
“안 그렇겠습니까? 택시는 민심의 바로미터라고 하는데 늘 민심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되었겠군요.”
또 한 사람의 남자가 말한다.
“취객들, 까칠한 손님들 만나며 득도하겠군요.”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문득 기억이 났는지 한 사람이 묻는다.
삼촌이 북에 계시다면서요?
“참. 김창현 씨. 삼촌이 북에 있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예? 그게 무슨 말…”
“안 그래도 김창현 씨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거든요. 얼마 전 동창모임에서 선거이야기가 나왔는데 말끝에 김창현 씨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한 동창이 대뜸 ‘그 사람 빨갱이야. 빨갱이’ 이러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함부로 말을 하느냐’고 했더니 그러더라고요.”
“삼촌이 북에 있다고요?”
“예. 아주 확신을 하던데. 자기가 잘 안다고 하면서. 북에 삼촌이 있어서 북에 몰래 다녀왔고 충성서약도 했다고 말이지요.”
웬 난데없는 북의 삼촌이야기? 황당했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지.
“저는 기장군 장안이 고향이고요. 수 대에 걸쳐 온 집안이 그곳에서 집성촌을 이뤄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어요. 아버님 형제분은 모두 세 분인데 다 돌아가셨어요.아버님께서 막내라 삼촌은 없었고요. 그리고 평양에는 두 번이나 갔지만 주로 행사 대표단자격으로 여럿이 함께 다녀왔지 몰래 간 적은 없어요.”
“그럼 그렇지. 그런데 왜 그런 거짓말을 누가 만들지? 아주 확신을 하고 있던데?”
그렇다. 이것이 우리 사회다. 진보정치인이 무슨 생각을 어떤 이념을 갖고 무슨 실천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빨갱이’면 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나는 문재인 후보의 생모가 북에 살아 있다는 주장을 하는 할머니를 태운 바 있다. 그 할머니는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문재인 후보는 빨갱이랍니다.
“문재인 후보는 빨갱이랍니다. 그의 생모는 북에 있어요. 모르셨어요? 우리 경로당 사람들은 다 아는데….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그렇게 많이 퍼주기 해서 나라가 망했잖아요? 이제 문재인이 당선되면 완전히 망할 거예요. 엄마가 북에 있으니 오죽하겠어요?”
문제는 이런 말을 들어도 뭐라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속으로 어? 진짜 그런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 정말 나는 민주당에서 중책을 맡고 있던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허탈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창현아. 문 후보님이 53년생이다. 6·25전쟁 후 휴전협정하던 그 해 태어났어. 애를 낳고 북으로 돌아가지 않고서야 생모가 어찌 북에 있을 수가 있겠니?”
“듣고 보니 그러네. 이렇게 간단한 거짓말을 어찌 집단적으로 하고 다닐 수 있을까?”
내가 가슴 서늘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 누군가 아주 악의적으로 그 말을 만든 이는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스스로 만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확신이었다. 무모한 확신. 그 어떤 것보다 힘이 있는 것은 미신이듯이.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하지 않는다는데
“애국가도 안 부르고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하지 않는다는데?”
“하하. 저는 과거 도의원 시절 애국가 크게 부르는 의원으로 유명했어요. 의회 개회식 때 4절까지 부르는데요. 모두 한 옥타브 낮춰 우물거리며 부르잖아요? 저는 원음대로 불러요. 당연히 ‘대한 사람 대한으로’ 이 대목에서 제 목소리밖에 안 들리게 돼요. 저는 고등학교 시절 중창, 합창을 해 목청이 잘 트여 있거든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할까요?”
“아마 우리 당 행사 때문에 하는 말 같은데요.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당 행사 때 국민의례보다 민중의례를 하고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거든요.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당이라 노동조합과 민중단체 행사방식을 그대로 답습했어요. 시민단체나 노동단체들은 전통적으로 행사할 때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거든요. 관 주도의 행사에 가면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경례’가 꼭 있잖아요. 그땐 저도 참가자들과 함께 잘합니다.”
“그건 그렇네요. 듣고 보니. 그런데 당 행사에서 애국가 부르세요.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말고요. 국가를 부정하는 세력이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김창현 씨는 아무래도 대장이니까. 아. 저는 걱정이 되어 그래요.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할 기회가 없어요. 그냥 ‘빨갱이니까. 원래 빨갱이는 말을 잘하니까.’ 이래 버리면 대화가 끝나 버리니까요. 더 진행이 안 돼요.”
안 보아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분명 그쯤 되면 일부 다른 친구들이 “야. 밥맛없는 정치이야기 집어치우고 술 먹자.” 할 것이다. 그러면 그 대목에서 대화는 끝나 버릴 것이다.
“당 행사도 전통인데… 행사가 무엇이든 일률적일 필요는 없잖아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잖아요. 통합진보당 창당 때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는 하는 것 같던데요. 그런 것 보다 저는 도리어 이런 식으로 자꾸 색깔을 빨갛게 칠하려는 의도가 더 괘씸하고 또 한심해요. 21세기 대명천지 아직도 상대를 저주하고 색깔로 매도하려는 그 의도가 말이에요.”
종북, 이미 저주가 묻어 있는 단어
“그 동창은 친구들 사이에서 꽤 공부를 많이 한 녀석이라 말도 잘해요. 그런데 김창현 씨하고 통합진보당은 종북 좌파들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근거를 가진 것처럼 말하더라고요.”
“종북. 그 표현이 얼마나 끔찍해요? 한국사회에서 북을 추종하는 사람이라면 어디 제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정치하는 사람에겐 치명적인 비수겠지요? 단어에 이미 저주가 묻어 있어요. 예전에는 친북, 좌경용공이라더니 요즘에는 아예 종북이라고 하더군요. 갈수록 단어사용도 발전하는 것 같아요.”
“그래요. 종북이란 말은 최근에 와서 많이 퍼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차라리 친북이 훨씬 낫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친북의 표현도 위험천만이지만 원래의 뜻만 본다면 굳이 나쁠 것도 없다. 통일을 하려면 북과 친하게 지내야 하니까 친북, 연대해야 하니까 연북 그렇다면 친북 연북세력이란 표현은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친북은 이미 빨갱이와 공통어로 그 단어 이상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절대적 배척과 감옥이 짙게 배 있다.
그런데 ‘종북’이란 표현은 이보다 더 심하다. 북을 추종하는 무리라는 것인데 아주 기분 나쁘다. 통일운동, 진보운동세력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이곳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당당히 한국사회에서 세상을 좋게 바꾸겠다고 운동하는 사람에게 아무 생각도 없이 북만 추종하는 무리라고 부르는데 어찌 용납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김창현 씨를 만나보니 이제 우리도 할 말이 생겼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게 생각할 거예요. 자주 이런 이야기를 좀 하세요.”
“진실과 양심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소박한 진리를 가슴에 안고 살 뿐이지요. 온갖 이야기에 다 해명하고 다녀서야 언제 자기 삶을 살 수 있겠어요? 다만 가슴이 아픕니다.”
반갑다고 인증샷까지 찍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분들은 나를 걱정하여 그런 말을 했지만 나는 이 나라가 걱정된다.
넌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고 공공연히 떠들어대는 황량한 사회
우리 한국사회가 어떡하다가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 냉전이 해체되고 각국이 국익을 우선하며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이 시기, 이 나라는 옳은 말 하는 사람, 자본주의의 횡포와 재벌의 탐욕을 비판하는 사람, 남북이 서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통일하자는 사람, 비정규직을 없애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사람들을 종북으로 뒤집어씌우기에 급급하고 있다.
최소한의 상호존중, 서로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넌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고 공공연히 떠들어대는 황량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온 곳에 빨갱이로 매도하고 저주하고 온갖 거짓말이 난무한다. 전교조마저 이적단체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다.
이명박 집권 5년이 만든 우리 사회 황폐화의 한 면이다. 꼭 해방 후 좌익에 대한 암살과 테러를 일삼던 서북청년단들의 광기를 보는 듯하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언론과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있다. 그가 나와 다른 말을 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이를 존중할 수 있어야 진정 민주주의가 꽃피는 성숙한 사회가 된다고 배워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결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길거리에 ‘종북세력 타도!’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한 건전한 상식과 민주적 토론, 관용과 배려는 없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순 없는가?
쓰다 보니 길어졌다. 마음이 너무 쓰리다. 그러나 나는 내일 또 열심히 택시를 몰며 시민을 만날 것이다. 세상은 건전한 상식과 건강한 양심을 가진 이들에 의해 날로 진보한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2013년 3월 5일 맑음. 완전 봄날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