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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상반되는 두 판결을 살펴보자.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상반되는 두 판결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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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매년 시민강좌로 ‘내생애 첫 사법감시 – 판결문 함께 읽기’를 개최하고 있으며, 강좌 수강생분들이 직접 써주신 시민 판결비평 칼럼을 발행합니다. 시민들이 직접 날 것 그대로의 판결문을 읽어보고 토론해보는 것이, 재판과 시민 사이의 거리를 줄이고 사법 신뢰를 회복할 지름길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참여연대는 강좌에서 시민들과 함께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두 개의 상반된 대법원 판결문을 읽으며 토론했습니다. 누군가의 양심은 병역거부를 할 만큼의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누군가의 양심은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법원은 무엇을 근거로 양심을 판단할까요? 이에 수강생 홍두표 님이 강좌에서 다뤘던 판결문을 바탕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법원의 판결에 대한 생각을 판결비평 원고로 정리해주셨습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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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종류 조항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취지의 헌법재판소 결정과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병역법 제88조(입영의 기피) 제1항에 정한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는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오며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또 하나의 뒤틀린 정의가 바로잡혔다.

하지만 기존 논의가 ‘여호와의 증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결과, 종교적 신념이 아닌 비폭력·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소수자의 소수자로서 지금도 자신의 양심을 입증하기 위해 투쟁 중이다. 이와 관련하여 2021년에는 2개의 상반된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두 판결은 비폭력·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병역법 제88조 제1항의 ‘정당한 사유’로 인정했는지 여부로 갈린 판결이다.

  • A 판결은 인정했고(의정부지방법원 2020.11.26. 선고 2018노818)
  • B 판결은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9.9.26. 선고 2017노1528)

이번 판결비평에서는 강좌에서 진행되었던 위 두 판결에 대한 토론 및 ‘양심의 자유’를 중심으로 판결에서 아쉬웠던 점을 다뤄보고자 한다.

양심을 드러내지 않을 ‘양심의 자유’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원작으로 2016년에 개봉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는 17세기 일본 에도 막부 시대 절정에 치달았던 천주교 박해의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 중 하나는 ‘후미에’(‘밟는 그림’)[footnote]일본 에도 막부 시절 카톨릭 신자를 색출하기 탄압하기 위해 사용했던 예수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목판이나 금속판. 이름은 ‘밟는 그림’ 또는 ‘그림 밟기’라는 뜻이다.(편집자)[/footnote]를 바닥에 놓고 이를 밟게 하여 천주교 신자인지 그 여부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신념을 위해 성상을 밟지 않아도, 살기 위해 성상을 밟아도 자신의 양심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인격은 철저하게 훼손당한다.

영화 [사일런스]에서 성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후미에'(참고 좌측 하단 사진)를 밟는 로드리게스 신부.
영화 [사일런스]에서 성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후미에'(참고 좌측 하단 사진)를 밟는 로드리게스 신부. 일명 ‘십자가 밟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심의 자유에는 ‘양심을 표현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된다. 이 자유가 보장되지 않을 때의 결과는 영화 ‘사일런스’에서 잘 보여준다. 누군가가 자신의 양심을 드러내도록, 증명하도록 강요할 때 우리의 인격은 훼손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양심을 드러내야만 하고 그 과정은 상당히 지난하다.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의 다수가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던 만큼 A판결과 B판결처럼 비폭력·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는 선례의 부재 속에서 양심을 입증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대법원은 ‘양심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한 것이라는 사실의 존재를 수긍할 만한 소명자료를 제시하고’, ‘병역거부자가 제시해야 할 소명자료는 적어도 검사가 그에 기초하여 정당한 사유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구체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법리를 세웠다. 법정의 언어를 현실의 언어로 바꾸면 비폭력·평화주의와 관련된 그동안의 모든 활동 내역, 게임 유통회사가 다루는 모든 게임 조회, 금융거래 내역 조회, 성당 참석을 확인하기 위한 수년간의 위치 조회, 그동안 구매한 책과 보았던 영화 내 폭력성 유무 확인, 중·고교 시절 생활기록부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참고: 오마이뉴스, “수년간 위치도 조회…”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3년8개월 , 2021. 7. 15.). 한 사람의 양심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사생활의 자유와 인격을 전적으로 내주어야만 했다.

양심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의 또 다른 문제는 소명 자료의 ‘양’에 따라 양심이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B판결에서는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강요받기 전까지 외부에 드러날 가능성이 적다는 양심의 특성’을 인정하면서도 ‘병역거부 이전에 양심적 병역거부나 반전·평화 분야에서 활동한 구체적인 내역이 아무것도 소명되지 않은 점’을 하나의 근거로 당사자의 양심을 진정한 양심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사자의 비폭력 신념에 대한 여러 증언, 그와 관련된 활동이 존재함에도 흔히 말하는 ‘스펙’이 부족했다. 입학과 취업을 넘어 양심과 신념에서도 ‘스펙’이 중요했다.

진정한 양심에 정해진 기준은 없다

A 판결문과 B 판결문을 읽으며 발견할 수 있는 차이들이 있다.

첫째, A 판결에서는 양심이 지닌 내용의 ‘타당성’이 아니라 ‘진정성’에 따라 해당 병역거부 사유가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양심이 ‘국군에 대한 편향적인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보여도 이는 ‘정당한 이유를 인정함에 장애사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B 판결문에서는 양심 형성의 동기가 된 권위주의 문화, 군대 내 인권침해 및 부조리 등이 집총이나 군사훈련과 본질적인 관련성이 없다는 이유로 벙역거부의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B 판결을 살펴보면 양심에 대한 타당성을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권위주의 문화와 군대 내 인권침해 및 부조리는 집총 및 군사훈련에 대한 반대와 비폭력·평화주의에 대한 동기가 될 수 없을까. 한 인간의 양심이 형성될 때 고정된 경로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직관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각각의 양심에 대한 동기가 미리 정해져 있다면 자신의 가족이 범죄자에게 살해당했음에도 이를 계기로 사형제 폐지라는 양심을 형성하고 활동을 실천해나가는 인간의 위대함 또한 평가절하해야 할 것이다.

둘째, A 판결에서는 당사자가 2007년, 2012년에 현역입영 대상으로 판정되었으나 2010년경부터 주변에 병역거부 의사를 표현한 것을 하나의 근거로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판단했다. 반면, B 판결에서는 ‘병역기간이 만료되는 2016년에 이르러서야 군 복무 경험이 있는 친구 및 병역거부 경험이 있는 직장동료 등과 병역거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 양심이 진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B 판결의 근거가 합당하기 위해서는 양심의 형성 시기가 양심의 진정성과 밀접하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양심의 진정성에 그 시기는 필요조건이 아니다. 오랜 시간 소고기와 돼지고기 등의 육식을 즐기다가 2020년 어느 날 밤 우연히 본 동물 다큐멘터리를 통해, 도축 직전에 소가 흘리는 눈물을 보며 채식주의의 신념을 형성할 수 있는 게 인간이 양심이다. 이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채식주의를 실천해나가는 이 사람에게 당신의 양심은 1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진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양심의 진정성은 시간과 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

한 인간의 양심을 시간을 계산할 수 있을까?
한 인간의 양심을 시간을 계산할 수 있을까?

시선부터 달라져야 

비폭력·평화주의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었음에도 위와 같은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결국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을 우선 의심하여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실질적으로는 그들이 자신의 진정성을 입증해야만 그 좁은 구멍을 통과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지향점은 양심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법원의 기준이 완화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바라보는 사회 구성원의 시선부터 달라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법정 역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을 먼저 의심하기보다는 진실한 것으로 바라보고 더 광범위하게 인정할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할 수 있다.

엄격한 기준을 정해놓고 그 '구멍'(기준)을 통과해야 너의 양심을 인정하겠다고 하는 건 아닐까.
엄격한 기준을 정해놓고 그 ‘구멍'(기준)을 통과해야 너의 양심을 인정하겠다고 하는 건 아닐까.

첫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병역기피자와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이제는 대체복무제도가 마련되었다. 이에 현역복무 18개월의 2배인 36개월 동안 교정시설에서 합숙복무하도록 하였다.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가 대체복무의 기간이 군 복무기간의 2배일 경우 차별적이라고 지속적으로 우려를 밝혀왔던 점[footnote]홍관표. ‘국제인권규범으로서의 양심적 병역거부권’. 공법연구. 49(3). 2021.2. p.106[/footnote]과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고 있는 많은 국가들이 사회복지를 중심으로 복무영역을 설정한 점을 고려했을 때, 입법자들이 형평성을 실현하기 위해 엄격한 대체복무제를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주간의 군사훈련만을 받고자 했던 이들이 병역기피자들이었다면, 4주간의 군사훈련을 받을 수 없기에 36개월의 교정시설 합숙복무를 선택하는 이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다. 대체복무제도가 마련된 이 시점에 양심적 거부자들을 병역기피자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군 복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양심적 거부자들이 아닌 국가제도를 향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너만 편하려고’와 같은 비판과 비난에는 ‘나는 현역으로 고생해야만 한다’는 전제가 숨어있다. 이때 우리의 논의는 이 전제를 암묵적으로 승인한 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 아니라 그 전제를 평가하는 공론의 형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징병제는 국가안전보장과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인지, 모병제를 통해서는 그러한 공익을 달성할 수 없는지 등을 논의해야 한다. 비판의 목소리는 평화에 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 본질에 해당하는 국가제도를 향해야지 그 제도 속에서 각자의 선택을 하는 개인을 향해서는 안 된다.

셋째,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결국 다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변화를 겪을지 예측할 수 없다. 또한, 각 개인의 모든 속성을 고려했을 때 온전히 다수의 지위에 있을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소수자의 권리를, 이들의 양심을 인정하고 보장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사회가 되었을 때 나의 권리도, 양심도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의 정도가 그 사회의 품격을 결정하는 지표가 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양심이라는 각각의 빛을 지닌 별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그 광도가 다르더라도 평등을 이루는 것이 법치주의이다. 우리의 헌법은 그런 우주를 그리고 있다. 따라서 소수자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의 양심이 진정하기에 나의 양심도 진정하고, 나의 양심이 진정하기에 당신의 양심도 진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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