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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정신은 숭배받기보다는 비판받기를 원한다.” (니체)

 

요즘 토론은 점점 더 귀한 멸종위기동물처럼 느껴집니다. 서로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상대를 존중하는 미덕은 사라진지 오랩니다. 오직 승리만이 목적이고, 증오만이 동력인 전장터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멋진 배틀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배틀 필드’에는 댄서들의 열정과 투쟁심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모든 싸움이 끝나고, 댄서들은 마치 따뜻한 자매처럼, 거대한 가족처럼 느껴졌습니다. ‘스우파’의 감동을 사회에 관한 토론에서 또 정치와 경제에 관한 토론에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8개 크루 수장들. 이들의 '싸움'은 치열했지만, 그 치열한 전투들이 모두 끝나고, 전쟁이 끝나면서 이들은 마치 가족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미 탈락한 팀들도 끝까지 경쟁하는 팀들을 바라보며 응원과 교감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치열한 댄스 배틀만큼 따뜻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출처: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출연한 여덟 크루의 수장들. 이들의 ‘싸움’은 치열했지만, 수많은 전투들을 치르고, 드디어 짧지 않은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마치 서로 자매처럼, 거대한 가족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미 탈락한 크루 댄서들이 ‘파이널’에 생존해 마지막 전투를 치르는 동료들을 보며 교감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전투의 비정함만큼 따뜻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출처: Mnet)
슬로우뉴스에서 꾸준히 글을 써온 임명묵 님이 근래 [K를 생각한다]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플랫폼 C회원’ 김현빈 님은 이에 관한 비판적인 서평을 남겼습니다. 이 글은 김현빈의 ‘비판’에 대한 저자 임명묵의 ‘답변’입니다. 저는 이 ‘전투’ 혹은 ‘대화’가 완전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이 대화를 접한 독자께서 어느 한편이 승리했다고 ‘심판’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물론 승부는 싸움의 필연적인 귀결이고, 판단은 모든 심판의 권리이긴 합니다.

다만, 저는 이 토론과 대화를 통해 독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지평이 조금 더 넓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인식을 통해 조금 더 겸손해지고, 조금 더 인간을 섬세하게 이해하는 따뜻한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독자들은 이 글을 읽기 전에 김현빈 님의 글 전체를 꼭 먼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하 김현빈 님의 서평과 그 소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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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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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저자는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에 따른 위계를 보지 못하고, 경쟁으로 서열이 매겨지는 사회가 ‘효율적’이고 ‘성장’을 도와주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섣불리 주장하며, 국가와 세대 구분에 한정해 분석을 시도한다. 이는 결코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수십년 간 우리가 지겹도록 들어온 주류 담론의 일부이다.

문제는 인상비평에 기댄 이러한 일련의 주장들이 단지 “청년(엘리트)의 목소리”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검증없이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저자의 의견은 존중받을 필요가 있지만, 그저 ‘청년’이란 이유만으로 조명 받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언론이 저자를 조명하는 방식은 어찌보면 ‘청년’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사람으로 집단의 목소리를 과잉대표하는 동시에, ‘청년’을 타자화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김현빈, ‘단지 ‘90년대생’이란 이유로? 『K를 생각한다』 서평’– 중에서)

 

최근 내가 쓴 책에 관한 서평(‘단지 ‘90년대생’이란 이유로? 『K를 생각한다』 서평’, 이하 ‘서평’)을 읽었다. 서평은 내 책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논조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었다. 공론장에 메시지를 내놓는 행위는 그 자체로 비판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비판은 필연적이며,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서평은 게다가, 인상비평에 근거한 악의적 비방이 아니라, 책 전체를 꼼꼼히 살핀 비판이었다. 서평을 읽으며 교류할 수 있는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저자로서, 아마도 서평자에게는 아주 불완전하게 다가오겠지만, 서평에 대해 답하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도 생각을 정리하고자, 해당 서평에 답문 형태로 글을 쓰고자 한다.

 

1. 이중경제체제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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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형성된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대안이 ‘고용 유연화’와 같은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주장에서 기이한 논리적 비약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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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적에는 해명이 필요한 것 같다. 첫째, 서평자는 ‘신자유주의’를 어떤 의미로 썼는가, 이 용어에 아직도 분석적 함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둘째, 나는 세계화로 인해 형성된 ‘이중경제체제’를 지적했다. 이는 글로벌 가치 사슬이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 도시들끼리 더 긴밀히 연결되고, 세계 도시와 배후지의 연결은 헐거워지는 현상을 뜻한다(마누엘 카스텔의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 참조).

마누엘 카스텔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

즉, 이중경제체제는 세계적인 산업과 공간 재편에 의해 조성된 ‘현상’이기에, 한국 내부 노동시장과 제도에 의하여 조성된 한국의 노동시장 이중구조와는 별개 개념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한국의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세계화로 인해 경제는 이원화되는 가운데, 한국 내부 기득권의 저항으로 사회 체제가 계속 경직되어 생긴, 불공정한 자원 분배 상태다.

 

2. 내가 586를 비판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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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세대 불평등을 강조하며 계층 세습을 비판하지만, 계층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역사적으로 계층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적은 없었다며 당연시한다는 점이다. 586세대가 계층화를 주도했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계층(분)화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계층 분화에 이견이 없다면, 586세대가 계층화를 주도했다고 비판할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닌가?”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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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86이 계층화를 주도했다고 그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발터 샤이델이 그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듯([불평등의 역사] 참조, 계층 분화는 경제 성장에 따른 상당히 자연스러운 사회 변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586에 대해서 가장 비판적인 것은, 경제성장의 자연스러운 결과물로서 상류층 내지는 상류 중산층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그런 지위를 획득하였으면서도 국가 시스템을 대할 때 줄곧 무책임한 태도, 즉 20대 학생운동가의 태도를 보여서다. 그 이상적 언어와 현실적 삶의 괴리가 정책의 혼란을 만들어낸다.

강남에 집을 사고 자녀를 외고, 혹은 미국 유학을 보내는 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정도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으면, 첫째로 다른 이들도 그런 욕망을 지니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둘째로 대한민국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그러한 것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 노제에 나타난 386세대. (출처 미상)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 노제에 나타난 386세대. (출처 미상)

 

3. 계층화에 관하여 

계층화에 이어 세계화로 인한 이중경제체제에 내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계층화는 경제 성장에 따라, 특히 포스트 포디즘 시대의 경제 성장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리고 세계화로 인한 이중경제체제는 정보화로 인한 포디즘 체제의 급격한 변동이라는 지구적 전환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거시적 힘을 일국 차원에서의 정치적 행동으로는 막을 수 없으며, 조직하는 것도 불가능할테지만, 지구적 차원의 정치적 행동으로도 역시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에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를 거부한다면, 세계 경제에서 한국의 상대적 지위도 하락할 것이 자명하다.

세계 경제에서 일국 차원의 지위와 그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의 번영은 관계 없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하다. 미국 사례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이 항상 직결된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유럽 및 일본, 대만 같은 국가가 보여준 상대적 퇴조, 그 기간 어쨌든 한국이 꾸준히 일구어낸 개선을 가른 것은 세계 경제에서의 지위 변동과 몹시 큰 연관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세계적 체제 변동과 갈수록 격화되는 세계 경제의 국가 간 경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세계 경제에서 계속해서 상위 위치를 점하고, 가치 사슬에서 대체 불가능한 경쟁력을 계속 확보해나가는 일(a), 사회의 불평등을 개선하고 구성원이 보편적으로 삶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 사회 계약을 만들어내는 일(b)이다. 6공화국이라 칭해지는 87년 체제는 전자(a)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후자(b)에서는 실패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따라서 향후 정치적 과제로 집중해야 할 것은, 그 새로운 사회계약의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제 미래의 노동은 소수의 API 위 노동(노란색)와 인간을 대체하는 자동화(분홍색) 그리고 다수의 API 아래 노동(파란색)으로 재편된다. (출처: 강정수, '알고리즘 사회,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2015) 중에서 https://slownews.kr/42874
이제 미래의 노동은 소수의 API 위 노동(노란색)와 인간을 대체하는 자동화(분홍색) 그리고 다수의 API 아래 노동(파란색)으로 재편된다. (출처: 강정수, ‘알고리즘 사회,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2015) 중에서

내가 지식교육을 통한 상층 노동 시장의 개방성과 유연성 확대를 주장하는 것은, 이 두 가지 과제를 모두 달성할 수 있는, 현재로서는 가장 ‘시작해보기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서평자는 노무현 때부터 박근혜 때까지 일관되게 제시해온 ‘빈껍데기 대안’이라고 비판하는데, 그것이 빈껍데기인 이유는 애초에 제대로 실행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나는 이를 불평등 해소 방안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불평등은 노동시장 개편으로 해소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계층상승 및 생활개선의 기회가 보편적으로 계속해서 주어진다면 불평등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인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정확히 타격해야 할 문제는 사회적 무기력, 빈곤, 계층의 고착화와 같은 것이다. 물론 현대 경제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지식 노동자와 유관 중산층의 확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인지 따져볼 필요도 있을 것이고, 어떻게든 그에 배제되는 사람들도 분명 나타나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구어낸 번영을 어떤 식으로 분배할 것인지의 문제다. 나는 오히려 세계 경제 속에서 한국의 상대적 지위를 해치지 않는 전제 하에서 지식 교육과 상층 노동 시장의 확대 말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어떠한 건설적 대안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아마 서평자는 그런 전제 자체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4. ‘세대’에 관한 책인데 세대를 강조한다고 탓하면…  

이어서 서평은 내가 계급 대립 구도를 세대 간 대립으로 치환하면서 ‘집단 내부의 다양성과 여러 사회적 요인’을 지운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내가 책을 세대와 계층의 교차성을 중점에 두고 썼기 때문에, 당연히 필요에 따라서는 ‘지워야 하는’ 지점이다. 모든 것을 표현하려고 하면 1:1 축적의 지도가 만들어지고, 지도에 한국의 모든 것을 담으려면 정말 한국 크기의 지도를 그리게 된다.

애초에 내 책의 ‘386’ 장과 ’90년대생’ 장은 세대와 계층이 1960년대부터 2020년까지 어떻게 교차했는지를 묘사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이에 집중하느라 지워진 부분이 있겠지만, 그건 다른 사람이 다른 주제를 다룰 때 쓰면 될 일이다. 전체 설명력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굳이 모든 것을 다 쓸 필요가 없다.

서평은 내가 전반적으로 세대를 ‘실제에 비해 강조했다’고 하는데, 어차피 ‘실제’라는 것을 정확히 담을 수 없다면, 저자는 더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무래도 도드라지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나는 세대와 계층 양자에 주목을 했는데, 나의 계급론적 시각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것은 다소 안타깝다(1장과 4장은 계층 분화 얘기의 비중이 내 체감상 절반은 되는 것 같다). 만약 누군가가 젠더와 인종으로 글을 쓴다면, 그것은 젠더와 인종을 실제에 비해 더 강조하고 세대를 은폐한 것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이렇게 되면 답은 ‘세대’라는 개념 자체가 분석적 틀로 사용하기에 가치가 없다는 결론만 남게 되는데,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 그것도 한국처럼 엄청난 속도로 변화한 사회에서 ‘세대’라는 게 실재하지 않다고 믿을 수 있는지 나는 그것이 정말 의심스럽다.

세대를 환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세대에 관한 책이 세대를 이야기하는데 “계급, 젠더, 인종 등 다른 사회학적 요인을 은폐한다”고 말한다면…

5. 계층상승 경쟁 

계층상승 경쟁이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토론은 여기서 한 번 제시해보고 싶다. 나는 한국의 고도성장이 가능한 요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1. 동아시아 유교 사회의 맥락
  2. 성공적인 토지개혁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사회 불평등의 일소
  3. 강력한 발전국가의 산업 정책과 경제 발전을 위한 대중 동원
  4. 세계화에 발맞춘 정치와 사회의 자유화

이 요인 중 1번과 계층상승에 대한 강한 열망을 제공한 요인이었고, 2번은 계층상승의 열망이 자유롭게 분출될 수 있도록 독려한 배경이었다. 이는 동남아시아나 서아시아 등 여타 아시아 사회와 동북아시아를 비교하면 훨씬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계층 상승 욕구를 자본의 끝없는 이윤 추구를 정당화하는 논리이며 기후위기와 사회불평등 심화를 유발했다고 한다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우리 가족은 IMF의 충격을 겪으며 정말 가난한 수준까지 떨어져본 적이 있다(적어도 서울 아파트 살면서 ‘서민’이라고 하는 기만은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우리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정말 빈곤한 가정환경을 당연시하며 살아오셨다. 그들은 노동과 사업을 통해서, 근면과 위험 감수 등을 통해서 내 기준으로는 신화적인 계층 상승을 이루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냥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고 자녀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계층상승을 시도하지 않거나 실패한 사람들이 그런 의지가 없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엄마 모자
인간 대부분은 추상적인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당위로 욕구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구체적인 욕망, 가령 ‘나는 못갔지만, 내 자식만큼은 대학에 보내야지’ 하는 그런 구체적이고 세속적 욕망으로 행동한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대다수 사람은 ‘자본의 이윤 추구’ 같은 추상적인 목적에 따라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들 삶의 가장 실존적인 이유 때문에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계층 상승을 꿈꾼다는 사실이다. 기후위기와 사회불평등 심화를 그들 개인의 의지를 억제함으로써 해결해야하는가? 오히려 이는 집단적인 조정과 제도적 개혁을 담당하는 정치의 기능부전이 만들어낸 결과 아닌가? 그리고 앞에서 한 답변과 상통하는 의미에서, 그러한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책도 이미 많고 그것을 출간하는 것도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한 책에서 모든 이야기를 쓸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6. 문화산업의 구조와 유통에 관하여 

문화가 ‘통제’될 수 있는가? 문화가 ‘독점’될 수 있는가? 실제 문화 시장은 플랫폼의 과점 체제 하에서 시장 진입과 퇴출이 극도로 자유로운 분위기로 굴러간다. 이 같은 접근법은 좌파 일각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문화 콘텐츠를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지원을 받고자 할 때 상투적으로 동원되는데, 그런 문화 접근법의 가치 자체는 차치하더라도, 현행 문화 산업 구조에 입각한 콘텐츠들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고,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 자체를 왜 높이 평가해서는 안 되는가?

문화를 통제할 수 있는가? 문화를 (출처: Mnet)
(대개 지본에 바탕한) 다양한 문화적 기획들에 의해 생산된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 자체를 왜 높이 평가하면 안 되는가? (출처: Mnet)

앞서 밝혓듯 나는 한국 사회의 성장이 단순히 계층 상승 경쟁으로 가능했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계층 상승 경쟁이 주된 심리적, 문화적 동력이었다고 강조했다. 진짜 한국의 성장의 원동력을 밝히려면 다른 책 하나를 더 써야 했을 것이다. 토지개혁, 발전국가의 동원체제, 미국, 일본, 중국 등과의 교역, 동아시아 유교 문화, 정치 사회의 자유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이다.

나는 오히려 서평자가 생각하는 한국 사회의 성장 요인이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하다. 노동자와 농민의 노동 때문에? 그러면 한국 같은 성장을 이루지 못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제대로 노동을 하지 않아서 저성장을 경험했던 것인가.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논리’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것이 토지 개혁과 국가주도 동원체제와 산업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이 두 가지(토지개혁과 국가주도 동원체제)를 한국 초기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요인으로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모든 상황에 만능의 원인으로서 제시되는 신자유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7. 능력주의와 교육에 관하여 

능력주의 전반에 대한 서평자의 공격은, 사회 유연화빅토리아 시대를 방불케 하는 무규칙의 무한경쟁 사회로 곧바로 이어질 것이라고 가정하는 듯 하다. 그러나 사회 유연화와 사회 하부에 대한 안전망 및 복지의 강화는 전혀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이는 (실현가능성은 차치하고) ‘유연안전성’(flexicurity)이라는 개념으로 상당히 널리 퍼져있다. 개인적으로 책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유연안전 체제를 지지하는데, 서평자가 차라리 왜 본인은 유연안전성이 달성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를 근거로 비판했다면 더 건설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교육에 대한 서평자의 비판도 마찬가지인데, 현재 존재하는 제약 조건을 왜 고려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상당히 궁금하다. 능력 계발에 투하되는 자원 격차는 가정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서 갈린다. 그렇다면 가계의 경제적 차이는 인정하되, 충분히 능력 계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국가와 사회가 의지가 있는 사람을 위해 발판을 만들어줄 수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세습이나 격차나 사실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의지의 좌절’이고, 세습은 그 격차를 고착화하는 제도를 통해서 의지의 좌절을 확산시키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세습 자체를 문제시 삼고 ‘본질적’으로 해결하려면 어마어마한 파괴와 인적, 물적 대격변이 필요한데, 현대의 한국 사회가 그러한 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

마이클 영을 비롯한 능력주의 비판이 현대 사회에서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현대 시스템은 능력에 따라 최적화된 인적 자원 배치를 선호하고, 그런 능력을 만들어내는 가계의 지원 의지는 너무 강력하다. 심지어 중국 공산당마저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현행 정치 체제 하에서 어떻게 수행하겠다는 것인지, 대안이 더 궁금해진다.

중국의 새로운 황제, 시진핑...도 하지 못한다.
중국(의 새로운 황제, 시진핑…)도 세습 자체의 본질 문제를 근본에서 해결하는 시스템 파괴와 물적 교체를 ‘시도’조차 못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걸 우리가 할 수 있는가.

 

8. K-방역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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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K-방역에 대해 겉핥기식으로 분석하며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면, K-방역은 ① 취약계층일수록 방역의 사각지대에 놓인다는 점, ② 공공 의료병원의 병상 부족, 그리고 ③ 현실에 비해 인원이 매우 적은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동과 사명감에만 의지하는 위태로운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라는 사실이다. 얼마 전 보건의료노조 총파업과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차원에서 펼치고 있는 간호사 인력 확충 캠페인 등은 방역의 최전선에 선 간호사들이 한계에 몰려있음을 잘 보여준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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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취약계층 문제는 국가 동원 체제와 사회의 감시 문화로 요약되는 내 논지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이야기다. 둘째, 공공 의료 병원 같은 걸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국은 민영 병원에 대해서도 강력한 동원 및 징발 체제를 갖추고 있다. 그것이 한국식 동원체제가 갖는 무서움이자 강점인 것이다. 그리고 셋째, 이 점은 책에서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 2020년 연말 유행의 원인은 일선 인력에 대한 지원 보강을 소홀히 한 데 있다고 말이다. 책 116쪽을 살펴보면 된다.

또한, 이 서평에서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 부분인데, 책에서 자꾸 ‘모든 것’을 다루도록 요구하고,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상세히 기술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점이다. 군사 정권 시절 형성된 한국의 동원체제는 당연히 몹시 억압적이었다. 누가 그것을 모를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더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이 책에서 나는 동원체제를 찬양했다기보다는 동원체제의 ‘강력함’을 지적했다. 그 강력함은 좋게 쓰일 수도, 나쁘게 쓰일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당연한 것까지 책에서 서술하자면 분량이 너무 길어질 것이다.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그리고 이 모두를 함축하는 '개발독재'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그리고 이 모두를 함축하는 ‘개발독재’. 박정희가 독재자였다는 점은 확정적으로 명확한 역사적 ‘평가’다. 하지만 한국식 개발독재와 행정통제의 토대를 구축한 박정희와 그 박정희 시스템의 유산으로 남은 한국식 동원체제는 (그것에 관한 부정적 속성에 관한 가치평가는 일단 차치하고) 어마어마하게 (비용 면에서) 경제적이고, (기능 면에서) 효율적이다. 이것은 평가가 아니라 ‘사실’이다.

국가 동원 체제를 비판할 수도 있고, 사회적 낙인과 일상적 감시를 비판하는 것도 그렇다. 내가 지적하고 싶었던 문제는 그런 ‘도구’가 자유민주주의와 그다지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어두운 면이 있더라도 ‘도구’를 계속 쓰지 않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하느냐다. ‘최적화’라는 현실적 과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들이 서로 상충할 때 어디에 중점을 두고 제도를 선택해야 하는지의 문제다. 시스템의 힘을 지적할 땐 시스템의 위험성을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겠지만(내가 책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굳이 시스템이 만들어낸 여러 문제점에 대해 철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며 상세히 서술할 필요는 없다. 말하고자 하는 논지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9. 왜 자본주의보다 국가가 중요한가 

서평자는 권위주의 대 자유민주주의의 도식을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틀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기후위기와 사회 전 분야에 나타나는 위기 징후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가 아니라 산업 기술 문명의 고도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위기다. 20세기 이념 전쟁에서 소련 공산주의가 승리했어도 기후, 전염병, 불평등 등의 문제는 정도는 다르지만,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유추할 근거는 아주 많다.

파괴된 레닌 동상.... 현실 소비에트가 몰락하지 않고, 전 세계의 지배적인 체제로서 공산주의를 발전시켰다면, 그렇다면 기후위기는 발생하지 않았을까?
파괴된 레닌 동상…. 현실 소비에트가 몰락하지 않고, 전 세계의 지배적인 체제로서 공산주의를 발전시켰다면, 그렇다면 기후위기는 발생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국가의 문제는 왜 자본주의의 문제보다 중요한가? 먼저, 국가는 자본주의보다 오래 되었다. (그나마도 대체 ‘자본주의’가 뭔지 우리가 합의할 수 있다면 말이다) 현 단계 상황에서 자본주의 이외의 시스템을 상상하는 것이, 국가 이외의 정치 시스템을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쉬울 정도다.

영토, 주민, 자원 등에 대하여 독점적 힘을 발휘하는 국가만이 위기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은, 기원전 3천년 경 국가가 처음 탄생한 이래로 끈질긴 지구적 위기를 뚫고 지구상 전역을 덮는 지배적 정치 체제로 확산된 것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지난 4세기 동안 이루어진 자본주의의 팽창이라는 것은 그 국가 위에 올라타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20세기의 이념 갈등은 본질적으로 그 국가를 구성할 소프트웨어를 무엇으로 정할지에 관한 논쟁이었다.

따라서 21세기에 본격화될 전 지구적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화두에, 국가라는 도구의 소프트웨어를 다시 어떻게 장착해야 할지는 자본주의를 어찌해야 하는지 마는지보다 더 적합한 질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통제 시스템을 통한 성공적인 방역은, 지구적 위기에서 강압적 국가가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음을 알려준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당연히 중요하게 검토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는 자본주의 없는 국가는 가능해도 국가 없는 자본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 구도 하에서 어떤 소프트웨어가 국가의 표준이 될 것인지, 사실상 그 경쟁에 자본주의(다시 강조하지만 무엇으로 정의할 수가 있다면)의 미래도 달려 있는 것이다.

 

10. 다문화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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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를 설명할 때 인간 본성을 강조하거나, 학계에서의 다양한 민족주의 비판 담론들을 단순히 ‘서구의 정치적 올바름’으로만 묶는 등의 논의 전개(3장)는 지나치게 헐겁고 두루뭉술하다. 저자는 민족주의가 외집단에게는 비록 배타성을 지니지만 내집단에게는 계층을 막론하는 단결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최적의 협력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포스트식민주의의 관점에서 민족주의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혼종적 정체성의 디아스포라를 포용하기 힘들고, 본질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민족주의는 국경을 경계로 나누어 계급적 단결을 저해하고, 자본의 착취를 정당화한다. 더구나 민족주의는 언제나 가부장적 관행과 이데올로기를 강화함으로써, 끊임없이 여성을 타자화해왔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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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가 혼종적 정체성을 포용하기 힘들고, 본질주의적이라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것을 ‘근본적인 한계’라고 칭할지 말지는 관점의 문제다. 혼종적 정체성을 배제하고, 가상의 본질을 주창하여 구성원을 동원하는 것은 강력한 집단 협력을 위해서 필수적인 과제다. 그리고 역사는 그러한 과제를 더 잘 성취한 집단이 지배적인 집단으로 부상해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경을 경계로 나눈다는 것은 노동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본도 나눈다.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민족주의의 폭풍으로 파괴된 무역과 투자 네트워크로 자본가들은 대체 어떤 이익을 보았는가? 그리고 노동을 나누는 것은 국경 안의 노동자에게는 매우 좋은 일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국제적 이주는 정말로 임금을 떨어트려 원주민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을 초래하기도 했다. 민족주의는 국제적 노동운동만큼이나 국제적 자본주의도 탐탁치 않아하는 이념이었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인간을 단순히 경제적 이해관계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시장주의나 세계혁명론에서 절대 감지할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문화적 자긍심 등을 자극하여 나머지 두 이념을 몰아낼 수 있던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꽃 피운 일국적 규모의 복지 국가는, 적어도 일국적 차원에서는 가장 평등하고 풍요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우드로 윌슨,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사진은 1919년 모습).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레닌이 1913년 표방한 민족자결원칙과 분리권을 의식해 제1차 대전의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기 위한 '책략'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 하지만 하지만 민족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이질성이 주는 근원적 공포, 그리고 동질성이 주는 안정의 가치를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이 점을 먼저 인식해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이든 대안이든 논의할 수 있다.
우드로 윌슨,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사진은 1919년 모습).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레닌이 1913년 표방한 민족자결원칙과 분리권을 의식 제1차 대전의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기 위한 ‘책략’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 민족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이질성이 주는 근원적 공포, 그리고 동질성이 주는 안정의 가치를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이 점을 먼저 인식해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이든 대안이든 논의할 수 있다.

게다가 민족주의가 여성을 타자화한다는 것은, 민족주의의 열렬한 참여자들에 수없이 많은 여성이 있었다는 것을 배제하는 말이다. 각종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에게 ‘당신은 민족주의에 세뇌되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 타자화된 대상이에요’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그리고 민족국가의 통치 논리가 국가의 지배계급과 자본가들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에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민족국가의 통치 논리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는 3장의 핵심적인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은 없고, 오직 서평자의 선언만이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한 근거를 기대해본다.

불법체류자부터 정식 고용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상당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이주한다. 그들이 영세사업장이나 농업 같은 직종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자발성의 결과물이고, 그들이 축적한 인적자본 수준, 본국의 교육 및 노동시장 상황, 한국과 본국의 소득 격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그 자발성을 형성했다. ‘한국에서 3D 노동에만 종사해야 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 대안을 제시하려면, 이주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라도 한국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제3세계의 전방위적 경제 성장을 촉진해야하는데, 세계혁명론의 거두인 트로츠키조차도 이러한 과업을 성취하지는 못할 것이다(아마 스탈린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1879~1940). 위대한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으로도 어려운 일....이다.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1879~1940). 서평자의 바람은 ‘위대한’ 트로츠키 동지도 성취할 수 없는 ‘과업’이다.

그런데 그런 게 이주노동자 당사자가 원하는 길일까? 소수자로 규정된 사람들도 각자의 자발성과 합리성에 따라 행동하는 ‘주체’다.

 

끝으로

끝으로 서평자는 이 책이 ‘청년 당사자’라는 이유만으로, 실제 청년 당사자라기에는 어려운 위치(명문대생)임에도 불구하고 과하게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을 경계한다. 나 역시 이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공감하는 편이다. 이 책이, 94년생에 한국 나이 28세,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는 나 자신의 여러 정체성을 통해 더 조명 받았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나 자신이 90년대생 전체를 대변한다고 말한다는 뉘앙스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출판사와 협의 하에 붙인 책의 부제는 제외하고 말이다). 이 책은 조치원과 서울대라는, 한국 안에 펼쳐진 이중적 세계를 오가며 쌓은 내 개인적인 사회 인식을 풀어낸 책이었고, 내 시선은 당연히 그런 인식 틀 속에서 제약될 수밖에 없다.

그런고로, 내 인식 바깥에 있는, 다양한 90년대생 당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풀어내는 여러 시도들에 이 책이 조금이나마 자극제가 되고, 거기서 새로운 논의와 논쟁이 등장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를 풀어준 서평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단지 ‘90년대생’이란 이유로? 『K를 생각한다』 서평 삽화 이미지 (출처: 플랫폼C)
단지 ‘90년대생’이란 이유로? 『K를 생각한다』 서평 삽화 이미지 (출처: 플랫폼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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