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계몽주의(17세기 말~18세기)가 태동하고, 지식인은 사회와 개인의 본질을 탐구하는 활동에서 신을 점차 배제하기 시작했다. 그 대신 이들이 집중한 작업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은 과연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이 조류가 바로 ‘사회계약론’으로서, 유럽과 북미의 지식인들은 시민, 사회, 권력자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간 본성: 홉스파 vs. 루소파
그리고 그들이 각자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정치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서 가장 열심히 동원한 근거가 바로 인간의 본성이었다. 영국의 토머스 홉스(1588년~1679년)를 추종하는 이들은 권력, 지배, 폭력을 향한 인간의 충동을 강조하며 이를 억제하기 위한 강력한 국가 기구의 질서의 필요성을 외쳤다.
반면 프랑스의 장 자크 루소(1712년~1778년)를 따르는 이들은 인간이 본래는 평화, 평등, 조화를 추구했으나 문명의 때가 끼면서 지금의 불평등하고 위계적인 상황이 펼쳐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상 사회를 위한 급진적 정치, 사회 운동의 논거가 되어주었다.
이 둘 사이의 논쟁은 그 자체로 역사의 변화를 주도했고, 큰 틀에서는 여전히 인류의 정치적 논쟁의 골간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홉스와 루소를 따랐던 정치철학자들과 사회사상가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는데, 당시 과학의 한계로 인해 그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제한되었다는 것이다(물론 후대에는 지금의 논의를 보며 같은 이야기를 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정치적 논쟁에 동원되는 ‘인간 본성론’은 자의적인 면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논쟁이 교착 상태에 이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돌파구, 인류학과 민족지
하지만 20세기에 각종 학문이 더욱 발전하면서 논쟁에 돌파구가 열렸다. 인류학에서는 문명을 건설하지 않은 사회와 문화를 관찰하며 많은 민족지 자료를 축적해 인간 행동의 보편성을 끌어내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동물행동학에서는 우리의 사촌 종인 유인원들의 행동을 세심히 기록하고 분석하면서 그들이 우리와 얼마나 비슷한 존재인지, 혹은 우리와 무엇이 다른지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서 발전시켰다.
크리스토퍼 보엠이 1999년에 출간한 [숲속의 평등] (원제: Hierarchy in the Forest; 숲속의 위계)는 인류학자이자 동물학자인 저자가 그간에 축적된 연구를 종합하여 인간의 정치적 본성이 위계와 지배인지, 아니면 평등과 조화인지를 밝혀내고자 노력한 역작이다.
보엠이 책 서두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인간의 정치적 본성에 관해 홉스파와 루소파가 모두 각자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보엠은 먼저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관찰한 침팬지 사회가 ‘알파메일’(alpha male; 우두머리 수컷) 이 지배하는 극도로 위계적인 전제주의 사회임을 보여준다. 알파메일은 식량이나 번식에 있어서 우선권을 획득하고, 구성원들 간의 다툼을 통제하는 권력자이며, 다른 수컷과 암컷은 모두 그의 지배력을 인정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침팬지 사회의 이런 구조는 왕이나 귀족이 지배하고 노예가 존재하는 인간 역사의 오랜 정치사와 아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침팬지의 정치가 인간 조상의 정치적 본성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라면, 지배와 불평등은 인간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루소를 지지하는 이들은 다른 말을 할 것이다. 저자는 그 자신이 조사한 1970년대 세르비아의 부족을 포함해서, 숱한 인류학 민족지가 묘사하는 인간의 정치적 삶에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는 지배자가 나타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모두 발언권이 평등한 회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수행했고, 확보한 모든 것을 평등하게 분배했다. 고대 그리스나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도 불평등이 상당한 정도로 있지만, 침팬지 사회나 과거 인간의 전제주의 사회보다는 적다는 점에서 민족지가 묘사한 수렵채집 사회와 흡사한 점이 있다.
수렵채집사회의 ‘평준화 메카니즘’
그렇다면 유인원 사회에서 보이는 정치적 위계의 이런 놀라운 다양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왜 침팬지와 왕국은 고도의 전제주의 사회인데, 수렵채집민은 평등하고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최소한 겉으로나마) 평등을 추구할까?
보엠은 먼저 수렵채집 사회의 평등주의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이 질문의 답을 풀어나간다. 보엠에 따르면 평등주의를 설명하는 기존의 가설에는 각자 어느 정도의 결함이 있었다. 예컨대 인간의 본성 자체가 평등하다면 유인원 사회에서 보이는 위계 정도의 다양성을 설명해내기가 어렵다. 한편 환경적 요인을 꼽는 가설도 있는데, 수렵채집 사회는 경제적 잉여가 충분치 않아 평등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농경과 목축을 하는 여러 부족 사회도 평등주의를 유지하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설명해내지 못한다.
그 대신 보엠은 수렵채집 사회의 평등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제시한 것은 ‘평준화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침팬지를 통해 미루어 보았을 때, 인간에게는 분명 지배와 위계를 향한 욕구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이것이 표출되지 않는 이유는, 사회 전체가 그런 욕구를 표출하는 개인에게 강력한 통제를 가하며 정치적 부상을 억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고기를 통한 단백질 섭취가 중요한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사냥 실력이 특출나 고기를 많이 확보한 사냥꾼이 명망과 권위를 얻기 좋다. 그러나 다른 사회 구성원들은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사냥을 많이 해온 사냥꾼을 대놓고 놀리고, 그의 결과물을 깎아내린 다음에 그 고기를 모두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 자연스레 특출난 사냥꾼은 자신의 실력을 정치적 이득으로 전환할 시도조차 못 하게 되는 것이다.
‘급부상자’와 처벌 그리고 지도자의 탄생
그러나 사회 구성원들의 개성과 실력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이런 사전적 억제에도 불구하고 튀어나오기 마련인 ‘급부상자’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때부터는 평등주의 기풍을 유지하기 위한 제재가 작동한다. 낮은 단계에서는 급부상자에게 면박을 주거나 마을 구성원 모두가 그와의 사회적 교류를 줄이는 제재를 시행한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하고 구성원들에게 다시 고개를 숙인다면 제재는 금세 풀린다.
하지만 낮은 단계의 제재가 먹히지 않고 계속해서 지배욕과 인정욕을 드러낸다면, 제재의 수위는 점차 강해져 끝내는 살해로까지 이어질 수가 있다. 마을 구성원들은 제재가 추가적인 복수를 유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급부상자의 가족에게 처형을 맡기는 경우가 많은데, 가족들조차 그 역할을 승낙할 때가 많다는 점에서 평준화 메커니즘의 힘은 그야말로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평준화 메커니즘은 수렵채집 사회뿐 아니라 국가나 추장 사회를 형성하지 않은 농경 사회와 목축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이들 인족 집단은 수렵채집 사회보다 인구가 많고 더 넓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 혈연으로 연결된 몇 개 부족으로 분절되어 그들끼리 계속해서 토지나 가축을 비롯한 자원을 둘러싼 갈등을 벌이는 경우가 잦다.
그 때문에 부족 사회에서는 유능한 정치 지도자가 등장하기 쉬운 구조다. 무력 충돌이 발생했을 때 부족민들을 재빨리 조직해 상대편을 물리쳐야지만 생존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족 사회는 그래서 전쟁을 위해 부족민의 수를 많이 유지할 필요와 위기 시 강력한 지도자 아래에 단합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주기적으로 구성원 수를 억제해 내부 갈등 수준을 낮추고, 위기가 끝났을 때 지도자를 몰아내는 방식으로 그들의 평등한 삶의 방식을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수단은 수렵채집 사회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욕, 사회적 거리두기, 극단적 거리두기로서 처형과 같은 수단들이 급부상자나 사회적 규범을 지키지 않은 이들에게 상시적으로 내려진다. 다만 혈연의 중요성이 크고, 그에 얽힌 구성원 수도 많기에, 이 과정에서 갈등이 더 격렬하게 벌어질 때가 많다. 상시적으로 전쟁과 복수가 벌어지는 평등사회인 브라질 아마존의 야노마뫼인들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제지당하는 알파메일’, 평준화 메커니즘의 출현
[adsense]이제 구성원 간의 평등을 철저히 지향하는 평등주의 기풍과 그 수단으로서 평준화 메커니즘이 어떻게 출현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보엠은 다시 한 번 더 먼 과거로 돌아간다. 즉, 유인원 행동을 통해 추측한 유인원 공통 조상을 통해 인간의 정치적 행태를 규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도로 전제적이었을 것이 확실해보이는 유인원 공통 조상에게서 어떻게 인간의 강력한 평등 지향성이 나타난 것일까?
진화가 새로운 것을 발명하기보다는 기존의 것을 개량하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결국 그 단서 또한 우리 사촌들의 행태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보엠은 침팬지 사회의 정치적 역학에서 흥미로운 단서를 제시한다. 침팬지 사회에서 알파메일의 권력은 절대적이지만, 정말 가끔 알파메일의 독단적 행동이 제지되는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 거대연합과 하위자의 반란이다.
권력자를 억제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거대연합의 이점은 명백하다. 아무리 알파메일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할지라도, 일대 다수의 상황을 늘 감수하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침팬지 집단 내에서 알파메일에 대항한 거대연합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고, 그 지속시간도 짧지만, 잠시 등장하기만 해도 알파메일은 자신의 의지를 접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여기에 간혹 발생하는 하위자의 반란이 겹치면 상황은 더 안 좋아진다. 보엠에 따르면, 이 같은 반항심은 결국 모든 유인원들이 갖고 있는 지배욕의 산물이다. 자신의 지배욕이 좌절당하고 상대방에 의한 지배가 일방적으로 관철당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분노가 반란의 감정적 동인이 되어 준다.
특히 하위 침팬지들은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먹이나 암컷을 알파메일이 건드릴 때 이런 반항이 가장 잦다. 실제 보엠은 반항한 하위자를 응징하려는 알파메일에게 암컷들의 정치적 거대연합이 결성되어 알파메일이 물러난 사례를 소개한다. 이런 감정과 행동은 수렵채집 사회에서 발견되는 평등주의 기풍의 기초가 되어주었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언어와 무기’: 평준화 메커니즘의 강화
이어지는 장에서 보엠은 이런 기초들이 ‘호미니드'(hominid; 진화 인류의 모체가 된 사람이나 동물)의 진화 과정에서 어떻게 강화되었을지 추측한다. 정치적 거대연합을 형성하는 것은 인간의 의사소통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훨씬 수월해졌을 것이 확실하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급부상자를 ‘처리’할 때도 필요한 것은 암살을 위한 구성원들의 철저한 계획이다. 각 구성원들은 그들이 알파메일에 반대하고 있음을 확인해야 하고, 자신보다 강력한 알파메일을 안전하게 처리하기 위한 공동 작전도 짜야한다. 표정을 읽는 기술이 진화하고, 언어를 통해 더 정확하고 효율적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정치적 거대연합을 형성하는 일은 더 쉬워졌을 것이다.
무기의 진화도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침팬지 반란이 일어나기 힘든 가장 큰 이유는 일회적 저항으로는 상황을 바꿀 수가 없다는 데 있다. 즉, 자신의 피해 없이 알파메일을 죽이는 방식이 마땅치 않으면 일시적으로 알파메일의 의지를 꺾는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보복성 괴롭힘을 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알파메일을 죽이려 든다면,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부터 낮을 것이고, 여럿이서 달려들어도 누구 하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런 손익계산서에 따르면 저항하지 않는 것이 사실 훨씬 큰 이득인 것이다.
그러나 무기가 등장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알파메일보다 약한 근력을 치명적 무기의 힘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가 있다. 즉, 한 번의 저항으로 알파메일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투척 무기의 등장이 이 과정을 더욱 가속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정치적 거대연합을 형성한 다수가 원거리에서 투척 무기로 일제공격을 할 경우 어떤 강력한 개인도 그로부터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의 생존을 위한 ‘평등주의 혁명’
따라서 진화를 통해 획득한 의사소통 기술과 무기 활용 능력 등으로 알파메일이 지배하던 전제주의 사회는 서서히(혹은 관점에 따라선 급격히) 바뀌었을 것이다. 알파메일이 승리연합을 구성해 구성원들을 지배하려고 시도하면, 즉각 패자연합이 등장하여 알파메일을 제거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을 것이다.
지배 위계를 억제해 호혜적인 평등주의가 정착했다면, 집단으로서 생존 확률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빙기와 간빙기를 오가던 변화무쌍한 기후 속에서, 실력에 관계 없이 사냥감을 나누고 모두가 협력하여 각 사회 구성원들을 보험처럼 활용하는 집단이 험난한 세월을 더 잘 버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주변 집단들은 패자연합의 결성과 평등주의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관찰하고, 자신들 집단에서도 마찬가지 모방을 시도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이를 통해, 인간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도덕을 형성하고 그 도덕을 구성원들에게 강제하는 ‘도덕 공동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도덕 공동체는 이후 집단 무임승차자를 처벌하고, 집단의 도덕을 따를 때 주어지는 이득을 제공하면서, 집단을 위해 개인마저 희생하는 인간의 중요한 ‘사회적’ 본성을 주조해냈다.
양면 가치와 ‘역전된 지배 위계’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더 잘 짚어낸 것은 홉스일까, 루소일까? 보엠은 그 둘이 모두 타당한 근거가 있음을 확인하고, 인간은 위계와 지배, 자유와 평등이라는 상반된 ‘양면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 실제 작동 기제는 이렇다. 위계와 지배를 추구하는 유인원 조상의 성향을 계승하였기에, 인류의 기본적인 지향은 위계와 지배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하고 그들에게 지배력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충동을 어느 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위계에 대한 저항 의식도 키웠고, 그것은 전제주의 사회인 침팬지 사회에서도 얼핏 드러날 정도였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저항 의식을 실제 정치적 힘으로 전환할 수 있는 인지, 행동, 도구 차원에서 변화가 뒤따랐고, 자연스레 인간은 평등을 향한 지향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평등 지향은 단순히 지배가 없는 상태라는 의미에서 평등은 아니었다. 평등한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수렵채집 사회나 부족 사회는 상시적으로 평준화 메커니즘을 작동시켜야만 했다. 그리하여 사냥 실력이 출중하거나 잠재적 리더가 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개인들은 자신의 야심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본인이 처벌 대상이 되어 고통을 받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그들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딱히 인정도 받지 못하는 가운데 집단의 안정과 생존을 위해 봉사해야하는 처지, 즉 패자연합에 의해 지배당하는 처지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보엠은 이를 ‘역전된 지배 위계’라고 표현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배가 없는 평등 상태지만, 이 평등 상태는 패자연합이 잠재적 지도자들을 지배하면서 그들의 부상을 억제하기 때문에 유지가 되는 것이었다. 이 모든 힘은 지배, 위계, 복종이라는 인간의 심리적 힘, 즉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성향을 뒤집어서 활용한 것이지 평등이라는 새로운 힘이 등장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간의 평등사회를 관통하는 원칙은 결국 하나다:
“인간은 모두가 지배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스스로 지배할 수 없다면 지배하는 사람 자체가 없는 상황을 택한다.”
지배욕에 바탕한 평등주의와 그 위기
이런 설명이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주의적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지배욕을 활용한 평등은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 삶이 아주 역동적이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완벽히 평등한 다른 영장류 사회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긴장도 존재하지 않아 그들의 사회적 삶은 아주 단조롭고, 어떠한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평등은 가만히 있는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취를 위한 여러 힘을 보탤 때만 성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계 자체가 없는’ 영장류들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이 책의 제목이 [숲속의 위계]인 이유는 결국 인간의 평등주의 근간에 위계 원칙, 즉 우리 조상들의 확고한 충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이유로 번역판 제목은 조금 적절하지 못한 면이 있다고 본다).
물론, 평등주의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열쇠는 아니었다. 인간 진화를 통해 자리 잡은 ‘역전된 지배 위계’는 힘의 균형이 뒤집히자 다시금 일반적인 지배 위계로 바뀌었다. 전제적인 농업 문명이 전쟁 수행과 식량 생산이라는 차원에서 평등한 수렵 채집 사회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보엠은 농경과 목축 사회에서도 평등주의가 오랜 기간 유지되었음을 보여주었지만, 생산력이 일정 수준을 넘어갔을 때 각 사회에서는 정치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명망가들이 출현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권위를 세습하는 데도 성공했으며, 그 뒤에는 아예 여러 부족을 통합해 왕국을 만든 이들도 있었다. 켄트 플래너리와 마커스 조이스의 [불평등의 창조]에는 평등주의를 지향하던 인간 사회가 어떻게 위계적 사회(마치 침팬지 사회처럼)로 전환되는지가 다양한 사례를 통해 묘사된다.
평등, 우리는 낙관할 수 있는가
홉스와 루소가 논쟁을 시작하고 수 세기가 지나서 인간 사회의 위계는 다시금 반전을 겪었다. 인간의 평등을 논하는 정치 집단이 성공하여 그 원리를 널리 확산시켰기 때문이다. 이때 평등주의 사회는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보엠은 인간 평등의 가장 유명한 상징인 미국 헌법이 쓰일 때, 건국의 아버지들이 인접한 평등주의 사회, 이로쿼이 연맹(Iroquois Confederacy; 북아메리카 뉴욕 북부의 오족 연합)을 참조한 사실을 언급한다. 그들은 누구도 확실한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정치 체제를 건설하고자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도입한 세심한 제도를 설계했다.
평등주의 원칙은 19세기와 20세기의 역사를 통해 번영한 근대 산업사회를 운영하고 다른 사회와 경쟁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최선임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도 평등주의를 통해 산업사회를 지도하려 했던 또 다른 시도였지만, ‘역전된 지배 위계’, 즉 인간이 오랜 기간 동안 평등사회를 이룬 원칙과 더 부합하는 것은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였다. 저자 크리스토퍼 보엠은 과거의 전제주의나 마르크스주의적 평등주의를 물리친 그 승리의 메아리가 여전히 생생하게 울려 퍼질 바로 그 시기(1999)에 이 책을 탈고했다.
하지만 출간된 지 21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읽는 나로서는, 평등에 대한 작가의 낙관에 온전히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평등이 ‘역전된 지배 위계’를 통해, 즉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조성된 구성원 간의 힘의 관계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라면, 그 관계가 변할 때 세상은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역사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의 본성에 부합하는 보편적 가치를 성취시켜온 과정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농경 제국을 맞닥뜨리기 전 ‘우리 모두가 각자의 지도자’라고 외치던 수렵 채집민과 다르다고 볼 근거가 있을까?
1980년대 이래로 인류는 소수에게 쏠리는 엄청난 부를 목도했고, 2010년대에는 정보를 독점하는 거대 기업과 국가의 부상을 지켜만 봐야 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역전된 지배 위계’를 다시 ‘정상 상태’로 돌리는 시작이 될 것인지, 그저 단순한 일탈인지는 누구도 확언하거나 낙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