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일도 아닙니다. 청소노동자에게 “VIP가 오면 화장실에 숨어라”고 요구했던 인천공항의 일이 불과 2010년 9월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국민의 공복을 자처하는 국회의원(김태흠)이 “노동3권 보장되면 툭 하면 파업할 것”이라고 국회 청소노동자를 윽박지릅니다. 그 국회 청소노동자는 결국 “연말 계약해지 통보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이들 청소노동자에 관한 사건들을 접하면서 ‘클린(clean)’이란 단어에 담긴 세상, 그 안에 담긴 사람을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문법 교육이 언어적인 것에만 머물고, 언어가 갖는 사회적 의미와 철학적인 의미에는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문법 교육: ‘언어 규칙’ 넘어 ‘삶을 보는 관점’으로
저는 문법 교육을 단순히 ‘언어의 규칙’이 아닌 ‘삶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재구성하자고 이야기해왔습니다. 이런 제 생각의 바탕에는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의 언어관과 비판적 담론분석(critical discourse analysis)의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볼게요.
기존의 영어 문법 교육
‘clean’을 형용사로 쓰면 “깨끗한”이라는 의미고, 동사로 쓰면 “깨끗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과거와 과거분사는 “cleaned-cleaned”로 규칙적으로 변화합니다. 이것이 기존에 우리가 어휘를 배웠던 방식입니다. 언어 내적인 기술이죠.
언어와 개념을 연결하는 교육
형용사로서의 ‘clean’은 특정한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로, 대상이나 장소 등이 물리적으로 깨끗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동사로 사용되면 특정 주체의 행위를 표현합니다.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이런 기본적인 의미는 다양한 메타포를 담은 표현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가령 “His record is clean.”(기록이 깨끗하네. 즉, ‘전과가 없다’는 뜻)과 같이요.
어떤가요? 이것은 언어와 개념을 연결한 해설입니다. 언어항목에 대한 단순 암기가 아니라, 그 언어가 담고 있는 개념적 내용을 다루죠.
‘clean’의 사회적 의미
어떤 공간이 깨끗(clean)하다는 것은 누군가가 청소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노동이 없이 스스로 깨끗한 공간은 없겠죠. 청결한 공항에는 청결함을 유지하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만약 노동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뭔가 이상한 것이고요.
먼지가 쌓이고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자연의 법칙 속에서 질서와 청결을 유지하는 노동 없이 깨끗한 환경 속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깨끗한’이라는 형용사는 ‘깨끗하게 하다’라는 동사를 전제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깨끗하게 하다’라는 동사는 그런 상태로 만든 사람(주체)를 내포하므로, ‘깨끗’하다는 것은 ‘깨끗하게 하는’ 사람(청소노동자)를 품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clean’의 사회적 의미, 사회 속에서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clean’을 형용사와 동사로서 배운다는 것
그렇다면 ‘clean’을 형용사와 동사로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이 두 가지의 품사적 구분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한'(clean)한 세계와 이 세계를 ‘깨끗하게 하는'(clean)하는 사람(청소노동자)을 연결해 생각할 수 있어야만 이 두 품사의 관계를 배웠다고 할 수 있지요. 다음 예를 보시죠.
- This place is so clean. (여기 정말 깨끗하다.)
→ Someone must have cleaned this place. (누군가가 청소를 한 게 틀림없구나.)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하고,
- This place is always clean. (여긴 항상 깨끗하네.)
→ Someone must clean this place on a regular basis. (여기 정기적으로 청소하는 사람이 있나 봐.) 라고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체계 속에서 어휘의 상당 부분을 포함한 문법은 언어적, 개념적,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언어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개념화하고, 그것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동태의 정치학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볼게요. 수동태를 가르친다면 수동태의 형태부터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수동태가 ‘작동하고 있는’ 여러 사건들에 대한 토론에서 수동의 개념을 이끌어 내고, 그것이 어떻게 언어화하는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 두 문장을 봅시다.
- Many immigrants are deprived of their rights. (많은 이민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한다.)
- The current immigration laws deprive many immigrants of their rights. (현재의 이민법은 많은 이민자들에게서 권리를 박탈한다.)
두 문장은 하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동태의 문장에서는 ‘박탈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이민자들의 현재 상태를 그리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래 능동형의 문장에서는 이민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는 주체가 드러납니다. 물론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현재의 이민법을 입안하고 가결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 같은 분석을 통해 수동이라는 언어적 장치가 인간이 경험적 세계를 이해하고, 상징적 세계를 창조하는데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능동태와 수동태의 사용이 중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 즉, ‘수동태의 정치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직시하는 문법 교육
개념적 틀은 ‘언어적 → 개념적 → 사회적’ 순서로 전개되는 것 같지만, 학습자 입장에서는 ‘사회적 → 개념적 → 언어적’ 순서로 전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습자의 경험이나 사회적 상황을 도입하고, 그 안에서 어떤 개념적 틀을 뽑아낼 수 있는지 살피고, 개별 언어들이 이것을 ‘언어화’하는 방식을 다루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새로운 문법 교육과 이를 위한 문법 체계의 재구성을 제안해 봤습니다.
요는 언어적 설명을 넘어 개념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이 생겨나고 자라나며 충돌하고 있는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으로 개별 문법 요소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문법 교육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