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 일상,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이야기들이 지금도 우리의 시공간 속을 흘러갑니다. 그 순간들을 붙잡아 짧게 기록합니다. ‘어머니의 언어’로 함께 쓰는 특별한 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편집자) [/box]
백지
어머니와 아침을 먹다가 인생에서의 고난과 단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똑똑한 줄 아는 사람이 단련이 길어.”
“왜요?”
“자기 생각을 숙이질 못하거든. 그래서 좀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이 단시간에 많이 배우는 경우가 많지.”
“아, 그렇겠네요.”
뭔가 배울 때는 백지로 돌아가고 싶은데 잘 안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제껏 배워온 것들로 인해 까다로워지기도 한다. 배움에서는 ‘어리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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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
아침, 미역국을 앞에 두고 어머니랑 짧은 대화를 나눈다.
“몇 번 끓였더니 간이 좀 세졌네.”
“그래도 괜찮은데요. 나 전에 공부할 때는 고기를 엄청 넣고 끓였는데. 건져 먹으라고. ㅎㅎㅎ”
“그렇게도 하지. 근데 미역국이 어떻게 해도 끓이기가 쉽지. 콩나물국보다 훨씬 쉬워. 사실 미역국은 끓이면 미역 자체가 다시가 되잖아. 오래 끓여도 되고.”
“그렇네요.”
다른 것들을 많이 넣지 않고 자기 자신이 맛을 내는, 또 그 자체로 영양 만점인 미역. 어쩌면 내 삶은 많은 것을 갖다 붙이려는 몸부림 아니었던가 생각하게 되는 아침, 전에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나무랑 사람은 그늘이 커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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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미안해)
어머니 무슨 드라마를 보셨는지 방에서 나오시며 한 마디.
“남자는 사과를 잘 해야 돼. 근데 꼭 욱하는 성격 때문에 다 망치지.”
“아, 남자가 사과해야 할 때가 좀 많죠.”
“좀 많은 게 아니라 90퍼센트는 될 걸? 근데 꼭 자기 성깔 못 참고 욱해서 관계를 망쳐. 지혜롭게 사과하는 법을 알아야 되는데 말이지.”
“그렇죠.”
“여자는 사과받으면서 단지 그 일에 관한 사과만 받는 게 아니야. 마음으로 뭔가 더 얻어가는 거거든.”
“아 그건 좀 얄밉게 볼 수도 있겠다. 사과만 받는 게 아니라 뭔가 덤으로 얻어가려고 하면요. 근데 그걸 얄밉게 보면 안 되는 거죠?”
“그렇지. 예쁘잖아. 귀엽잖아.”
“아, 그걸 얄미운 게 아니라 예쁘고 귀여운 걸로 봐야 하는 거군요. ㅎㅎ”
“그렇지. 그런 면을 좋게 봐야지. 근데 사람이 인연이 되면 좀 미운 짓을 해도 예뻐 보이는데, 연이 안 될 사람은 일부러 예쁜 짓을 해도 미워 보일 때가 있지. 그게 연이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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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어머니와 복숭아를 깎아 나누어 먹는다. 칼로 잘라낸 부분을 다 먹으면 꼭다리 차례다. 마지막까지 정말 열심히 드시는 어머니. 그러다가 손에서 미끄러진 꼭다리가 방바닥을 뒹군다. 떼구르르… 복숭아씨를 밥상 위에 올리시며 말씀하신다.
“여기에 진리가 있어. 금방까지 이 복숭아가 얼마나 예뻤니? 진짜 예뻤잖아. 그런데 사람의 손과 입을 거치고 나니 이리되잖아. 이제 아무도 이걸 간직하고 싶어 하지 않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람도 마찬가지야.”
그 말을 듣고 태어나서 가장 오랜 시간 복숭아씨를 쳐다보았다. 인간에게 자신의 살을 모두 내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빼앗긴 벌거숭이 복숭아의 모습을.
흐려지는 시선. 꿈에서 깨듯 어머니를 다시 쳐다보며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과 복숭아의 관계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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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언어
나의 어머니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철학 하고 싶다.
백지 4월 3일, 2013년
미역국 9월 23일, 2013년
사과(미안해) 10월 4일, 2013년
복숭아 8월 21일, 2013년
어머니의 언어 5월26일, 2012년
잘 읽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앞으로도 기대합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나의 어머니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철학 하고 싶다.”
짧지만 맘 속에 쑥 들어오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