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슬로우뉴스 칼럼 한 편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게임머니 환전 사건: 게임머니를 팔아도 환전’(이병찬)이라는 글인데, 문단 요약문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피고에게 불리한 확장해석이나 유추해석 안 된다’라는 문장이 추가되었다. 글이 발행되고 난 뒤, 한 독자가 ‘형사 사건에서는 피고가 아니라 피고인이라고 해야 한다’라는 취지의 댓글을 달았다.
이것은 올바른 지적이다. ‘법률용어사전‘과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피고/피고인’을 정의하고 있다:
– 피고(被告): 민사소송상 원고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소를 받은 측의 당사자, 즉 제1심 소송에 있어서 수동적 당사자를 말한다.
– 피고인(被告人): 검사에 의하여 형사 책임을 져야할 자로 공소가 제기된 자 또는 형사소추를 당한 자로 의제(擬制)되거나 취급되고 있는 자를 말한다.
(법률용어사전)
– 피고(被告) [명사] <법률> 민사 소송에서, 소송을 당한 측의 당사자.
– 피고인(被告人) [명사] <법률> 형사 소송에서, 검사에 의하여 형사 책임을 져야 할 자로 공소 제기를 받은 사람.
(네이버 국어사전)
말하자면 ‘피고’는 민사 소송에서, ‘피고인’은 형사 소송에서 쓴다는 것이다. 이 두 낱말이 갖는 이 같은 차이는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코끼리와 기린의 차이처럼 너무도 당연한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 영역 밖에 있는 대다수 사람에게 이 차이는 낯설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오세훈 변호사는 [가끔은 변호사도 울고 싶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곳에서 재인용):
간단히 설명하면 이러한 현상은 ‘피고’와 ‘피고인’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중략) 민사소송에서는 소송을 거는 사람을 ‘원고’, 소송을 당하는 사람을 ‘피고’라 한다. (중략) 그러면 ‘피고인’은 누군가. 검사가 보기에 죄가 있다고 판단되어 형사재판에 넘긴 사람을 말한다. 일단 범죄혐의를 받게 되어 경찰이나 검찰에 의해 수사를 받고 있는 사람을 ‘피의자’라 하고, 검사가 죄를 지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법원에 보내서 재판을 받게 하면 그 순간부터 ‘피고인’으로 부른다.
‘피고’와 ‘피고인’은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인데, 웬만큼 배웠다는 분들도 그 차이를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이렇게 된 데는 매스컴의 책임을 빼놓을 수 없다.
또
피고와 피고인의 결정적인 차이는 너무나 쉽기도 하고 또 몹시 어렵기도 하다. 두 말이 각각 민사와 형사 사건에서 쓰인다는 결정적 차이를 가진다는 점은 아주 쉽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기억만 하면 된다. 문제는 이 두 말이 언어적으로는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구분이 어려워진다. 피고와 피고인은 서로 다른 개념을 표현하는 두 낱말로 보기에는 요령부득의 꼴을 하고 있다.
피고는 원칙적으로 ‘고소를 당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하여 피고라고 하면 그렇게 고소를 당한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한편 피고인은 글자 그대로 고소를 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두 단어에서 언어적인 의미의 차이는 없다. 단지 법률 분야에서 이 두 단어를 놓고 ‘피고’는 민사 고소를 당한 사람에게, ‘피고인’은 형사 고소(기소)를 당한 사람에게 쓰기로 하자는 명시적이거나 관행적인 약속을 하고 그런 약속 아래 이렇게 구분하여 쓰는 일은 가능할 것이고, 지금의 용법은 이런 결과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단어나 개념의 ‘조작적 정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경우, 두 단어의 차이가 말 자체의 뜻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맺어둔 약속(혹은 정의)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법조계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낯설 뿐만 아니라 납득하기 어려운 구분이 된다. 두 말이 흔히 혼동되는 것은 오세훈의 말처럼 매스컴에도 책임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요령부득의 형태로 말을 만들어 놓은 데서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 왜 이런 인위적인 구분이 생기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 같다. 많은 법률 용어가 그렇듯, 이 말 역시 일본에서 쓰이는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어에서도 비슷한 혼동이 벌어진다. 중국어에서는 민사, 형사를 가리지 않고 피고라는 말을 쓰는 듯하다(아래 ‘바로잡습니다’ 참고). 영어에서는 영-미에 따라, 또 영국의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민사와 형사를 가리지 않고 피고/피고인의 의미로 defendant(방어측)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민사에서 원고(plaintiff)와 짝을 지어 잘 쓰이지만, 형사 사건에서도 쓰인다. 형사 사건의 경우 ‘피의자’와 ‘피고인’의 뜻을 동시에 가진 the accused를 쓰기도 하지만, 법정 용어로는 defendant가 더 자주 사용된다. 각국 나름대로 법 제도를 운영해온 경험 속에서 용어가 정착되고 사용되어 온 것이겠지만, 우리는 그런 경험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이 아쉽다.
일본인들이 헷갈리는 것은 자업자득이니 그렇다치자. ‘피고/피고인’은, 한국어에 맞는 쉽고도 의미 있는 법률 용어를 독자적으로 만들 기회를 갖지 못한 데서 나온 뜻과 표현의 괴리 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box type=”note” head=”바로잡습니다”]본문에서 “중국어에서는 민사, 형사를 가리지 않고 피고라는 말을 쓰는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만, 중국법에서도 두 말을 구분하여 민사에서는 피고, 형사에서는 피고인이라는 말을 쓴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바로잡습니다.
최종 업데이트: 2013년 2월 16일 15시 45분[/box]
글 잘 읽었습니다. ‘피고’와 ‘피고인’을 많은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말씀하신 것처럼 말의 뜻 자체로는 차이가 없는 두 단어를 그냥 그렇게 구별해서 쓰기로 정의를 해 버렸기 때문인 탓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법에서 형사소송에서 공소제기를 당한 사람과 민사소송에서 소제기를 당한 사람을 구별해서 지칭할 필요가 있고, 그 용어를 만드는 데 있어서 말뜻 자체로 쉽게 구별이 되게끔 고려하기보다는 일본법을 계수하는 과정에서 종래 쓰던 대로 용어를 가져왔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겠지요.
그러나 단어 뜻 자체로 구별이 안 된다는 것만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피고’와 ‘피고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혼동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무지, 즉 민사사건과 형사사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를 반영하는 측면도 크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사사건과 형사사건의 구별은, 단순히 법률전문가들만 알고 있으면 되는 문제라고 간단히 넘겨 버리기에는 우리 법제도의 너무 기초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차적으로는 학교교육에서 이러한 기초적인 법제도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겠습니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언론에서도 기초적 법제도에 대해 무지한 채 오류가 담긴 기사를 쓴다는 것 또한 분명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근자에 나온 ‘머니투데이’의 기사를 보면, 삼성가의 상속분쟁과 관련하여 ‘공소시효’가 지났는지가 쟁점이라고 적어 놨습니다. 그러나 공소시효는 형사사건에서 검사가 범죄에 대해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시한을 뜻하는 말이지, 상속분쟁과 같은 민사사건에서 등장할 수 있는 시효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언론기관이 법률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출 필요는 물론 없으나, 최소한 사법제도의 전문적 영역과 관련된 기사(소송사건 관련 기사가 대표적이겠지요)를 쓸 때는 법률전문가의 자문이나 검토를 받는 정도는 언론의 책임으로 요구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두서없이 적었네요. 그러나 어쨌든 요지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입니다.
P.S. 영미에서는 피고와 피고인을 구별하지 않고 “defendant”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이는 영미법에서는 전통적으로 독일 등 대륙법과 달리 형사사건과 민사사건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사실상 다른 법률과 다른 소송절차가 적용되기 때문에 대륙법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다만 소송당사자 표기와 같은 부분은 전통적으로 해 오던 대로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형사사건의 경우에는 사건명이 “The State of California vs. 아무개”, 또는 “The People vs. 아무개” 이런 식으로 국가나 지자체 또는 ‘시민들’이 원고가 됩니다. 그러나 대륙법계는 공공의 영역과 사적 영역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전통에 서 있었고, 그 때문에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법을 사실상 계수했고, 일본은 대표적 대륙법계 국가인 독일법을 계수했기 때문에 용어사용도 ‘피고’와 ‘피고인’으로 분명히 구별하게 된 것이죠. 독일에서도 ‘피고’는 ‘Berklagte’, ‘피고인’은 ‘Anklagte’라고 하여 구별합니다. 제가 독어 지식이 짧아서 확언은 못하지만, 독일어 상으로도 저 두 단어가 말뜻 자체로 구별이 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실제로 독일애들도 알쏭달쏭해 하는 모양입니다: http://de.answers.yahoo.com/question/index?qid=20121125094759AAusDgx )
‘Anklagte’가 아니라 ‘Angeklagte’네요. 역시 독어가 익숙치 않아서… 오기입니다.
떡밥 제공자로서 뿌듯(?!)합니다. 제가 좀 앞뒤없고 건방진 댓글을 달았는데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주신 이병찬 변호사님께도, 떡밥 수준의 댓글로 좋은 글을 써 주신 들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저도 피고/피고인 사이에 언어적 의미상 차이가 없으며, 일본의 법률용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별다른 고민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관하여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법률용어의 일상어화’와 ‘전문용어의 엄밀성’ 사이의 간극을 없애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란 이것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이므로 변명은 허용될 수 없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좋은 글 써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도 계속 고민하고, 연구하겠습니다.
무궁무진하죠. 상소 항소 상고 항고가 다 다른 뜻이고…
김웅재님: 제가 드린 말씀보다 훨씬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말의 연원이 어떻든, 일단 그렇게 쓰기로 약속이 된 것이니까 말글을 다루는 언론은 늘 주의하고 틀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말씀해 주신 것을 화두로 삼아 좀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덧붙여 영미에서 관련어의 쓰임을 설명해 주신 것도 저는 물론이고 독자들에게 좋은 참고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jobyun님: 좋은 계기를 제공해 주시고 글의 취지도 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