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이해하는 데 들이는 노력만큼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저자가 노력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글, 더 나아가 훨씬 쉽게 쓸 수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글을 이해하기 어렵게 썼다고 여겨지는 글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아래 문단은 얼마 전 한 번역서에서 마주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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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pcap font=”arial” fontsize=”33″]a.[/dropcap]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를 대신하기 시작하자 좌뇌의 지배력이 뚜렷하게 증가했다. 사람은 쓰고 읽는 데 주로 좌뇌를, 그리고 오로지 수렵가의 추상체와 살해자의 오른손만을 사용한다. 조각칼과 첨필(尖筆), 붓, 펜을 수없이 사용하면서 문자 문화는 언어의 창조와 해석에 있어 우뇌의 상보적인 역할을 축소시켰다. 이와 더불어 망막의 간상체와 왼손의 중요성도 감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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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읽어도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좌뇌’와 ‘우뇌’ ‘왼손’과 ‘오른손’이 들락거리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이 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독자가 직접 글을 정리하면서 머릿속에서 의미를 새겨야 한다.
이렇게 하나씩 절을 분해해서 의미를 새겨보니 뭘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는 대충 감이 잡힌다. 물론 이렇게 도표까지 그려가면서 글을 읽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런 글을 읽고 이해해야만 할 때는 마음 속으로 이런 도표를 그리고 이해가 되도록 교정을 하면서 읽어야 한다. 일단 세부적인 항목을 이해하는 것은 보류하고 글의 흐름만 살펴보자.
- A절과 B절까지는 무리없이 이해를 할 수 있다. C절과 D절을 읽는 것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앞에서 읽은 A-B와 방금 읽은 C-D는 무슨 관계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C는 A와 대응하고 D는 B와 대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A-B가 주제문이고 C-D는 A-B를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다. B에서 좌뇌의 지배력이 증가했다고 했으니 D에서 ‘좌뇌’와 함께 열거하는 ‘추상체’와 ‘오른손’은 좌뇌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항목으로 여겨진다.
- E는 C에서 언급한 ‘쓰고 읽는’ 것 중에서 ‘쓰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결국 A-C-E는 문자언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F 역시 B-D와 같은 맥락의 메시지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는 우뇌의 역할을 축소시킨 것을 언급한다.
- 그 다음 문장은 ‘이와 더불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데, 이는 F와 같은 맥락의 사례를 한 번 더 덧붙인다는 뜻이니, 간상체와 왼손은 우뇌와 연관이 있는 개념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정리해보면 이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문자언어는 좌뇌-추상체-오른손을 증진하고, 우뇌-간상체-왼손을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풀어보면 이처럼 간단한 내용이다.)
내용전개에 맞게 절의 연결을 고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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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pcap font=”arial” fontsize=”33″]b.[/dropcap]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를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좌뇌의 지배력이 뚜렷하게 증가했다. 쓰고 읽는 과정에는 주로 좌뇌가 사용되며, 수렵가의 추상체와 살해자의 오른손만 사용된다. 조각칼, 첨필(尖筆), 붓, 펜이 수없이 사용되는 과정에서 문자 문화는 언어의 창조와 해석에 있어 우뇌의 상보적인 역할을 축소시켰고, 망막의 간상체와 왼손의 중요성도 축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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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의 논리적 전개를 고려하여 절과 절의 연결방식을 고치니 글의 의미가 훨씬 뚜렷하게 이해된다. 이처럼 난잡한 문장연결은,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글을 쓴 것일 때가 많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는 채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글에서만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렇게 전체적인 구조는 고쳤음에도, 세부적인 요소들은 여전히 문제투성이다.
- A: 문자언어가 음성언어를 대신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일까, 부분적인 현상일까?
- C: 수렵가의 추상체/살해자의 오른손’만’ 사용된다면 수렵가와 살해자가 아닌 사람은 어떻게 읽고 쓴다는 뜻일까?
- E: 조각칼, 철필, 붓, 펜이 ‘수없이’ 사용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글을 쓰는 다양한 도구를 제시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도구들은 왜, 어떤 순서로 제시된 것일까?
- F: 언어의 창조와 해석은 세종대왕처럼 언어를 창조하고+누군가 해석한다는 말일까? 또는 언어가 무언가를 창조하고+언어가 무언가를 해석한다는 말일까? (맥락상 글을 쓰고 읽는다는 의미로 추정된다. ‘언어의 창조와 해석’이라는 표현은 이 글이 얼마나 성의없이 쓴 것인지 보여준다.)
- F: ‘우뇌의 상보적 역할’이란 무엇일까?
물론 이 글만 가지고는 글쓴이의 의도를 완벽하게 추론해내기는 어렵다. (결국 원서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교정과정을 통해 고친 글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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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pcap font=”arial” fontsize=”33″]c.[/dropcap]말 대신 글이 주요한 소통수단이 되면서 좌뇌의 지배력은 급격히 높아졌다. 읽고 쓰는 과정에는 주로 좌뇌만 관여하며, 사냥꾼의 망막—원뿔세포—과 도살자의 손—오른손—만 사용된다. 조각칼, 첨필, 붓, 펜으로 이어지는 필기도구의 발달과정에서 글을 만들어내고 해독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우뇌의 상보적인 역할은 계속 줄어들었고, 망막의 막대세포와 왼손은 할 일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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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와 c를 비교할 때 어떤 글이 명확한가? 더 쉽게 이해되는가? 답은 분명하다.
고친 글에 대해서 조금 더 부연설명하자면, 추상체는 송곳+모양+몸이라는 뜻의 한자어고, 간상체는 막대+모양+몸이라는 뜻의 한자어다. 말 그대로 원뿔모양 망막세포와 막대모양 망막세포를 말한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어려운 현학적인 한자어를 굳이 골라쓰는 것은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잘못된 글쓰기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시각을 자극하는 쉬운 단어를 쓰면 독자들은 훨씬 쉽게 이해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명확하게 고치는 과정에서 글은 훨씬 아름다운 균형미를 갖게 된다. a를 분석한 그림을 보면 문장구조가 상당히 지저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c를 분석한 다음 그림과 비교해보자.
지금까지 복잡한 설명을 한 이유는, 어려운 글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독자가 이렇게 복잡한 교정을 직접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처음부터 b처럼 썼다면 독자는 이처럼 지리한 분석과 교정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글을 쓰는 사람이 하는 것이 마땅한가? 글을 읽는 사람이 하는 것이 마땅한가? 여러분은 a와 같은 글을 읽고 싶은가? c와 같은 글을 읽고 싶은가?
물론 a처럼 글을 쓴다고 해서 감옥에 넣거나 화형에 쳐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많은 경우 의뢰인들이 원고료를 깎지도 않는다. 그저 개인의 스타일(문체)일 뿐이라고 인정하고 넘어가거나, 내가 머리가 나빠서 이해하지 못할 뿐이라고 자책하며 넘어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글을 명확하고 아름답게 써야 한다고 어떻게 호소할 수 있을까? 사실상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윤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글쓰기의 윤리란, 우리에게 익숙한 황금률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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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나를 위해 글을 써주기 바라는 대로 글을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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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내용 자체가 정말 복잡해서 쉬운 글로는 도저히 쓸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문에서도 보았듯이 이는 글쓰는 이의 나태함에 대한 변명에 불과할 때가 많다. 또는 독자들이 글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일부러 글을 어렵게 쓰는 경우도 있다. 부조리한 권위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타락한 학자들, 전문가들, 관료들 같은 사람들은 명확한 글, 쉬운 글의 가치를 끊임없이 폄하하고 조롱한다.
하지만 명확한 글쓰기가 어찌 되었든 우리 사회, 공동체가 만들어내고 추구해야 하는 가치라는 것은 분명하다.
안타까운 사실은, 예문 분석에서도 보았듯이 명확한 글, 아름다운 글을 쓰는 능력이 저절로 발현되는 미덕이 아니라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치밀하게 분석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실제로 그렇게 글을 쓰는 방법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글 잘 쓰는 사람을 찾는 것이 이토록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더 시간을 들여 글을 고치는 것은, 단순히 독자를 위한 이타적인 행동만은 아니다. 이렇게 명확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매우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준다. a를 읽었을 때와 c를 읽었을 때 여러분들이 느낀 감정과 마찬가지로, 독자들은 독자의 욕구를 배려하는 사려깊은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그런 사람이 쓴 글을 더욱 신뢰한다. 당연히 그런 사람의 글을 더 찾아서 읽을 것이고, 그런 글을 주변에 추천하고 공유할 것이다. 힘들게 글을 쓴 만큼 저자로서 명성도 올라가는 것이다.
자기가 쓴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어떤 느낌을 가질지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분명히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며, 독자들 역시 그의 노고를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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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8년 4월 출간된 책 [스타일 레슨]에서 발췌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 레이건의 분노: “요점만 말해, 이 바보야!”
- 스토리텔링: 글쓰기의 첫걸음
- 어순은 위대하다: 문장의 깃발과 메시지의 초점
- 서론 쓰는 법: 독자 위협하기
- 간결하고 힘 있는 문장: 6가지 원칙
- 문장 미학의 원리: 긴 문장 짧은 문장
- 글 쓰는 사람의 윤리: 좋은 글은 어디서 나오는가? (끝)
이 글로써 [스타일레슨] 칼럼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많은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 알림:
[스타일레슨] 신간 출간 기념 번역자 특강(6월 24일 일요일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을 진행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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