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선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려고 합니다. 한국이 아닌 일본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 일본 자민당의 파벌(派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일본 정치를 ‘파벌 정치’라고 이야기합니다. 파벌은 한국에서도 자주 쓰는 표현이지만, 의외로 일본의 파벌 정치에 관해 자세히 아는 한국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올해(2017년) 1월, 일본에서는 아소, 기시다, 다니가키 그룹 등 3개 파벌이 통합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는 뉴스가 대부분 언론사 톱에 올라왔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저 세 파벌의 통합은 실현되지 않고 있지만, 실제로 통합이 이루어지면 아베 총리가 소속된 ‘호소다’파보다도 규모가 큰 대형 파벌이 탄생합니다.
그래서 아소, 기시다, 다니가키을 중심으로 한 세 파벌의 통합 논의는 일본 정치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큰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뉴스가 당시 한국 언론에는 단 한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특정 정치가의 망언보다 한반도에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뉴스인데 말입니다. 아마 한국 언론들도 실제로 일본 정치의 내면에 대해서는 그만큼 관심이 없기 때문이겠죠.
우리가 왜 남의 나라 정당의 파벌까지 알아야 하느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은 서로 큰 영향을 주고받는 나라이고, 자민당의 파벌 구도가 한국의 현실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에, 한번 배경 지식을 습득한 뒤에 일본 정치를 다시 바라보면 조금은 더 쉽게 그들의 모습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해에서 일본이라는 사회, 일본 사람에 대한 이해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일본 자민당의 파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의미에서 각 파벌의 탄생 배경과 발전 과정, 왜 이런 파벌 정치가 계속되고 있는지 등을 최대한 가치 판단을 배제한 상태에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파벌의 탄생
한국 정치에도 파벌은 존재합니다. 친문, 반문, 친박, 비박, 이런 것들이 일종의 정치 파벌인 셈인데요. 자민당의 파벌은 그런 인물 중심의 파벌과는 상당히 다른 개념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자민당의 파벌은 ‘정당 안의 정당’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대체 이런 파벌은 왜 생겨났는지 이야기해보죠.
흔히 자민당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은 1955년에 보수 정당이던 ‘자유당(自由黨)’과 ‘일본민주당(日本民主黨)’이 합당해서 만들어진 정당입니다. 그리고 일본민주당은 1954년에 또 다른 보수 정당인 ‘개진당(改進黨)’과 합당해서 만들어진 당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민당 결성 초기에는 사실상 세 개의 정당이 간판만 같이 쓰는 연합 정당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자민당의 파벌은 근본적으로 자민당의 모체가 된 이 세 개의 정당을 원류로 합니다.
- 자유당 총재였던 요시다 시게루의 후계자들 중 1) 이케다 하야토가 ‘굉지회’ 2) 사토 에이사쿠가 ‘목요연구회’ 라는 파벌을 만듭니다.
- 그리고 일본민주당의 총재였던 하토야마 이치로의 후계자들 중 3) 기시 노부스케가 ‘십일회’라는 파벌을4) 고노 이치로가 ‘춘추회’라는 파벌을 만듭니다.
- 그리고 개진당 총수였던 시게미츠 마모루의 뒤를 이은 5) 미키 타케오가 ‘정책연구회’라는 파벌을 만듭니다.
각 파벌은 리더의 이름을 따서 각기 이케다파, 사토파, 기시파, 고노파, 미키파 등으로 불렸고, 이것을 자민당의 5대파벌이라고 부릅니다. 5대 파벌은 6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기시다파, 누카가파, 호소다파, 니카이파, 산토우파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현재 자민당의 8개 파벌 중 5개가 자민당 초기부터 존재했던 파벌이고, 아소파가 굉지회에서, 이시하라파는 춘추회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입니다. 최근에 새롭게 만들어진 이시바파를 제외하고는 자민당의 파벌은 성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셈입니다.
왜 파벌 정치를 하는가
60년이 넘게 파벌 정치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일본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 총리직을 다수당 의원이 뽑고, 일본의 선거 방식이 1993년까지 중선거구제였기 때문입니다. 1993년 이후 일본이 채택한 소선거구제는 대한민국도 채택한 방식으로 하나의 선거구에 1명의 의원을 뽑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중선거구제는 하나의 선거구에서 득표수에 따라서 2명 이상의 의원을 뽑는 방식입니다. 일본의 중선거구제는 인구 수에 따라서 하나의 선거구에서 2~6명까지 의원을 뽑았고, 정당에서 하나의 선거구에 후보자를 몇 명을 내건 크게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의원내각제의 특성상 전체 의석의 과반수를 넘기지 못하면 단독으로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3명을 뽑는 선거구에선 반드시 2명을, 5명을 뽑는 선거구에서는 3명을 당선 시켜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같은 선거구에 나온 자민당 후보 사이에도 유권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정책을 내세워야만 표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선거 조직 동원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선거구에 하나의 파벌에서 2명 이상의 후보를 내놓는 것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후보자는 파벌을 통해서 출마해야만 했고, 각 파벌은 안정적으로 의석을 나눠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파벌간의 노선 차이는 더 분명해져서 하나의 정당 안에 여러 개의 정당이 존재하는 것과 다름 없었죠.
선거가 끝난 뒤에도 파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총리를 뽑아야 하니까요. 일본의 의원내각제는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직을 맡게 되는데요. 위의 설명한 이유들로 인해서 파벌은 조직 투표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총리 후보자가 당 내 지지도와는 큰 관계가 없이 총리 후보자를 몇개의 파벌이 밀어 주느냐에 의해 총리가 결정됩니다.
매파와 비둘기파
앞서 설명했듯이 자민당의 파벌은 요시다 시게루, 하토야마 이치로, 시게미츠 마모루 등 세 명의 정치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보수 세력이었지만, 원래 당이 달랐기 때문에 정치적 노선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시다 시게루는 흔히 ‘비둘기파’라고 불리는 온건 보수파입니다. 하토야마 이치로는 흔히 ‘매파’라고 불리는 강경 보수파입니다. 그리고 시게미츠 마모루는 중도 우파입니다.
자민당 내에서는 매파와 비둘기파가 다수 파벌이고, 중도 우파는 소수 파벌이었기 때문에 자민당 내의 파벌간 항쟁은 매파와 비둘기파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1970년부터 15년 동안 계속되었던 각복전쟁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사토파를 계승한 비둘기파였고, 후쿠다 타케오는 키시파를 계승한 매파였으니까요.
자민당은 사토 에이사쿠-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이 워낙 강했고 경제가 게속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선거구제 시절에는 비둘기파가 강세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파벌 구도에 큰 변화를 주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1993년의 정권 교체입니다.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이 사건은 1993년 중의원 해산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자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일본신당, 민사당, 신당 사키가케, 사민련 등이 연립해서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를 총리로 세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정권 교체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오자와 이치로의 신생당, 타케무라 마사요시와 하토야마 유키오 등이 만들었던 신당 사키가케 등은 모두 사토파의 계보를 잇는 오부치파에서 이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1993년에 자민당 비둘기파의 최대 파벌이었던 목요연구회는 이때 분열했고, 이들 중 일부는 자민당에 남아 현재는 평성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누카가파’로 불립니다. 이때 자민당을 이탈했던 사람들은 이후 민주당을 만들어서 2009년에 다시 정권을 가져가죠.
1993년 정권교체는 또 하나의 큰 변화를 가져오는데요. 바로 1928년부터 유지되어 오던 중선거구제를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정치개혁법이 통과된 것입니다. 이러면서 1996년 중의원 선거부터 소선거구제/비례대표제로 선거 시스템이 바뀌어 버립니다.
예전처럼 하나의 선거구에 여러 파벌들이 각기 후보를 내세워 서로 다른 정책을 어필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정당에 대한 투표가 더 중요해지면서 자민당은 서서히 하나의 통일된 노선을 채택하는 쪽으로 당의 색채가 바뀌게 됩니다.
자민당 파벌의 재구성: ’09년 대패배와 ’12년 부활
자민당이 정권을 되찾은 이후로도 하시모토, 오부치로 이어지는 사토파 계열이 계속 총리직을 맡습니다. 2000년에 오부치 총리가 병으로 죽으면서 키시파 계열의 모리 요시로(사진)가 총리에 오르죠. 모리 총리는 십일회의 계보를 잇는 파벌인 청화정책연구회(줄여서 ‘청화회’)의 수장이었고, 이 파벌은 전통적인 매파이기도 합니다.
모리의 뒤를 이은 코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등이 모두 청화회 소속의 의원들입니다. 코이즈미가 총리가 된 뒤 코이즈미의 인기를 등에 없고 청화회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2005년부터는 청화회가 자민당 내 1등 파벌로 올라섰고, 그 세력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이즈미 퇴임 후 파벌간의 세력 구도를 크게 바꾸게 되는 사건이 또 한번 벌어지는데요. 바로 2009년 민주당에 의한 정권 교체입니다. 2009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300석에서 181석이 줄어든 119석을 차지해, 308석을 차지한 민주당에게 역사적인 패배를 하게 됩니다. 자민당 중의원 수가 1/3로 줄어든 것입니다.
자민당은 코이즈미 총리 시절에 벌어진 우정선거의 영향으로 의원들이 신인들로 대거 물갈이 되었고, 코이즈미가 파벌 타파를 기치로 내걸면서 신인 의원들의 파벌 가입을 금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미 다수 의원이 특정 파벌에 소속되지 않는 무파벌인 상태였습니다. 물론 얼마 안 가서 대부분의 신인 의원들이 특정 파벌에 소속되지만, 영향력은 크게 줄어듭니다.
그런데 코이즈미 퇴임 이후 2009년 민주당에 정권을 빼앗기고 의석수마저 1/3로 줄어들면서 각 파벌의 영향력은 더욱 약해지고, 내각에 입각하기 어려워지면서 파벌에서 이탈하는 의원들이 속출합니다. 이 때문에 민주당 정권 시절 자민당은 한 때 무파벌이 가장 거대한 파벌이었을 정도로 파벌 정치가 거의 붕괴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그리고 야당이 된 자민당의 총재는 굉지회의 리더였던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맡게 됩니다. 고노 요헤이 이후 두 번째로 총리직에 오르지 못한 자민당 총재의 탄생이었습니다.
2009년 중의원 선거 직전에는 청화회가 89명, 평성연구회가 69명, 굉지회가 61명으로 굉지회는 세 번째 파벌이었고, 2009년 중의원 선거의 참패로 굉지회는 의석수가 크게 줄어 중의원은 25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청화회와 평성연구회는 중의원 의원이 1/3 이하로 줄어들면서 25명의 중의원으로도 자민당 내 최대 파벌로 부상합니다.
민주당 정권 초기 자민당은 다니가키와 굉지회 파벌의 대두로 비둘기파 색채가 강했습니다. 그러나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300석에 가까운 의석을 확보해 대승하면서 다시금 매파인 청화회가 최대 파벌로 떠오릅니다. 이때 아베 신조가 자민당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다시 총리가 됩니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졌던 것이 아니라 1993년의 연립정권 수립 과정에서 자민당의 온건 보수파 의원들이 대거 이탈한데부터 시작된 것이라 민주당 정권 수립 시점에는 자민당 내의 온건 보수파와 보수 좌파 계열의 의원은 그 수가 매우 적어집니다. 이 때문에 자민당 의석 수가 한번 크게 줄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는 과정에서 국수주의가 강한 매파 의원이 대거 당선되면서 자민당이 급격하게 우경화합니다.
자민당의 정권 탈환 전야였던 2012년 총재선거 당시(참의원 선거에서 대승했지만, 아직 2012년 중의원 선거가 치뤄지기 전)과 2017년 3월 현재의 각 파벌의 의석수 변화를 보면 그러한 변화를 한 눈에 느낄 수 있습니다.
- 청화회 43명 → 99명
- 경세회 28명 → 55명
- 굉지회 32명 → 46명
- 위공회 12명 → 44명
- 지사회 13명 → 41명
- 근미래정책연구회 12명 → 14명
- 번촌정책연구소 7명 → 12명
파벌 정치는 나쁘기만 한 것일까?
‘파벌 정치’라는 용어는 오랜 동안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전근대적인 정치 시스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원인, 국민에 의한 것이 아닌 정치적 힘 싸움에 의해 나라의 미래가 결정되는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만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파벌 정치와 파벌 정치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중선거구제는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일본의 파벌 정치는 위에 나열한 부정적인 일면이 강하게 부각된 만큼 실제로 그러한 문제들이 매우 심각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민당 내에 사실상 여러 개의 정당이 존재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자민당 일당이 수십년 동안 집권하는 상황에서 내부적으로 권력을 견제하는 시스템으로 작용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헌법 개정과 재무장을 주장하는 매파가 독주할 수 없었던 이유도 사실은 자민당의 파벌 정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존하는 자민당의 파벌
현재 자민당에는 모두 8개의 파벌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호소다파가 99명(중63/참36)으로 현재 최대 파벌이고, 그 뒤를 이어서 누카가파가 55명(중35/참20), 키시다파가 46명(중32/참14), 아소파가 44명(중33/참11), 니카이파가 41명(중33/참8), 이시바파가 20명(중19/참1), 산토우파가 12명(중8/참4)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준파벌인 다니가키파가 17명, 한국 언론에도 자주 노출되는 스가 요시히데의 키사라기회가 7명입니다. 그 외에도 이나다 토모미(호소다파)가 주도하는 정치공부회인 ‘전통과 창조의 회’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정치 모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8대 파벌의 개별적 특징
1. 청화정책연구회
- 파벌 영수(이하 생략): 키시→후쿠다→아베→미츠즈카→모리→마치무라→호소다
- 2012년 43명 → 2017년 99명
통칭 호소다파. 기시 노부스케가 만든 십일회를 출발점으로 하는 파벌로 자민당을 대표하는 친미 매파 집단입니다. 자유헌법론, 헌법개정론 등을 주창하며 일본의 재무장에 적극적인 태세를 보여온 파벌로, 기본적으로 반공주의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 냉전 시대에는 같은 반공 국가였던 한국, 대만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 시절에는 자민당 내의 주류 파벌이었지만, 1970년대 촉발된 각복전쟁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후쿠다 타케오가 패배하면서 1980~1990년대에는 비주류 파벌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냉전 해소 후 신자유주의가 대두되면서 다시금 힘을 회복해 모리 요시로 총리 시절부터는 자민당 내의 주류 파벌로 복귀합니다.
현재는 자민당 내 최대 파벌로서 아베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주요 각료들 다수가 이 파벌 소속으로, 사실상 자민당을 지배하고 있는 파벌입니다.
2. 평성연구회
- 사토→다나카→타케시타→오부치→하시모토→츠시마→누카가
- 2012년 28명 → 2017년 55명
다나카 가쿠에이로 대표되는 파벌입니다. 일본식 개발독재를 이끌어 왔던 파벌로 다나카 가쿠에이 시절부터 타케시타 총리 시절까지 1970~90년대 버블기의 자민당을 지배했던 주류 파벌이었습니다. 지금은 평성연구회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과거 ‘경세회’로 불렸고, 지금도 경세회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친미색이 강하지만 경제 정책 우선으로 헌법 개정이나 일본의 재무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비둘기파 색채가 강한 파벌입니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후계자였던 타케시타 노보루의 핵심 인사 7명 중 하네다, 오자와, 오쿠다, 와타나베 등 4명이 자민당을 탈당해 1993년 연립정권 수립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결국은 이때 탈당파들이 민주당을 결성하면서 2009년 민주당 정권을 수립하게 되는데요.
이때 핵심 인물들의 탈당 이후로 파벌 세력이 약해지고, 버블 붕괴로 인해 매파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지금은 예전 같은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자민당 내에서 두 번째로 큰 파벌입니다.
3. 굉지회
- 이케다→마에오→오오히라→스즈키→미야자와→카토→코가→오자토→다니가키→기시다
- 2012년 32명 → 2017년 46명
자민당 내 파벌 중 한번도 명칭 변경을 하지 않은 가장 오래된 파벌입니다(1957년 결성). 파벌의 창시자인 이케다 하야토는 바로 이전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가 유지해오던 하이폴리틱스(군사, 정치 중심 외교)를 로폴리틱스(무역, 경제 중심의 외교)로 전환하고, 소득 증대와 복지 확대 등을 중점으로 한 정책을 펼칩니다.
이케다는 경제대국 일본의 밑바닥을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굉지회는 그런 이케다의 노선을 계승하는 파벌이기 때문에 경제 정책 중심이고, 친아시아적인 성향이 강한 비둘기파입니다.
자민당 내에서 경세회와 함께 강력한 주류 파벌이었지만, 1999년 고노 요헤이와 아소 타로 등이 이탈해서 고노파(현 아소파)를 만들었고, 2000년11월 카토와 야마자키가 일으킨 YK혁명으로 인해 다시 카토파(후에 다니가키파)와 호리우치파(후에 코가파)로 분열되었습니다.
2008년에 다니가키파와 코가파가 재통합하여 신생 코가파가 탄생해 현재의 기시다파로 이어지지만, 아소파는 아직 재통합되지 않은 채 분열 상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4. 위공회
- 미야자와→카토→고노→아소
- 2012년 12명 → 2017년 44명
1998년 미야자와파를 이탈해 무파벌로 남아 있었던 고노 요헤이를 지지하는 미야자와파 의원들이 대거 이탈해 새롭게 결성한 파벌입니다. 고노 요헤이는 한국인들에게 ‘고노 담화’로 유명한 바로 그 인물입니다. 파벌 창시자가 고노 담화의 당사자인 만큼, 전형적인 보수 좌파 색채의 비둘기파였습니다.
하지만 고노를 지지하면서 파벌 형성의 가장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아소 타로가 고노와 정치적 노선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재는 고노의 노선과는 관계 없는 아소 타로 노선을 지지하는 파벌입니다.
아소 타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소 타로의 정치 노선은 서구의 기독교 정당들과 매우 흡사한 면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친미반공 색채에 기독교적 보수주의에 가까운 노선이고, 위공회도 전체적으로 그런 색채를 띄고 있습니다. 친미색은 강하지만 같은 매파인 청화회보다는 그래도 원류인 굉지회의 노선에 가깝습니다.
5. 지사회
- 고노→나카소네→와타나베→무라카미→카메이→쿠도·카메이→이부키→니카이
- 2012년 13명 → 2017년 41명
한국에서도 매우 유명한 일본 정치인인 나카소네 야스히로로 대표되는 파벌입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올해 만 98세로(1918년생) 아직도 이 파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인 나카소네 히로후미가 파벌 내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아들인 히로후미의 나이도 만 71세입니다.
원래 이 파벌은 고노파의 춘추회를 계승하고 있지만 나카소네 야스히로, 니카이 토시히로, 카메이 시즈카 등 3명에 의해서 재구성되어 탄생된 파벌이라 전체적으로 친미색이 약한 강경보수 파벌의 색채가 강했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파벌의 리더였던 나카소네는 친미파였지만, 파벌 내부는 전체적으로 강경 보수지만, 친미적 색채는 약한 편입니다. 친미색이 약하다는 것만 빼면 청화회보다 더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수구파 집단입니다.
개헌지지, 대북강경책, 외국인참정권 반대, 인권옹호법 반대, 우정민영화 반대, 건설 경기 부흥 등 굉장히 수구적 색채가 강한 파벌입니다.
6. 수요회
- 2012년 0명 → 2017년 20명
이시바 시게루에 의해 2015년 9월에 결성된 신흥 파벌입니다. 이시바 시게루는 아베 정권의 핵심적인 인물 중 한사람으로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던 인물인데요. 안보법안의 강행 처리 과정에서 의견이 갈리면서 지금은 아베 총리와 상당히 틈이 벌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시바는 아소 타로와 조금 비슷한 일면이 있는 인물인데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며, 자동차·밀리터리 ‘덕후’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적 보수주의에 가까운 노선을 취합니다. 그리고 방위청 장관, 방위 대신 등을 역임했지만 비둘기파 성향이 강한 인물입니다.
특이하게도 이민 정책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는 인물로, 장래적으로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권침해구제법안이나 선택적부부별성제도, 외국인참정권, 재일교포에게 아동수당 지급 등에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면서도 애국심을 교과서에 명문화 하는 것에 강한 반발을 보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민족주의를 경계하지만, ‘일본인은 일본에 사는 사람이 아닌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요회도 이시바의 후원회나 다름 없기 때문에 이시바 정치 노선이 파벌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7. 근미래정치연구소
- 와타나베→야마자키→이시하라
- 2012년 12명 → 2017년 14명
2000년 11월 카토와 야마자키가 일으킨 YK혁명으로 와타나베파에서 야마자키 타쿠를 지지하는 37명이 분리되어 나오면서 형성된 파벌입니다. 야마자키는 코이즈미 정권 당시 당간사장과 부총재를 역임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친코이즈미 파벌로서 2000년대에는 상당히 많은 의원들을 거느린 주류 파벌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2006년 총재선거에서 당내 여러 파벌들이 아베를 지지하는 가운데 강경한 반아베 노선을 고수했고, 이 때문에 파벌 구성원들이 상당수 이탈하게 됩니다. 그래도 약 40명 정도의 의원수를 유지하던 파벌이었는데, 2009년 중의원선거에서 37명이나 있던 의원들이 절반 이상 낙선하면서 16석만 남게 되어 몰락이 가속화합니다.
2011년에는 회장 대행이던 아마리 아키라(甘利明)가 이탈해 사이코우일본(さいこう日本)이라는 준파벌을 형성하고, 야마자키가 정계를 은퇴하면서 이시하라 노부테루(이시하라 신타로의 아들)가 파벌을 물려 받아 이시하라파가 됩니다. 현재는 의원이 14명밖에 없는 소수 파벌이고, 지사회와 통합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재미있는 점은 원래 파벌의 창시자인 야마자키 타쿠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북한통으로 조총련과 매우 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제9조 개정을 일관되게 주장해왔습니다. 파벌을 물려 받은 이시하라 노부테루는 가부장적이면서 민족주의가 강한 보수 정치가입니다.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에 반대하고 헌법 9조 개정에는 반대하지만, 여성덴노라던가 부부별성 사용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죠. 그러면서 개헌파입니다. 타케시마의 날 행사에 자민당을 대표해서 참석한 것은 덤이랄까.
8. 번촌정책연구소
- 미키→코모토→코무라→오오시마→산토우
- 2012년 7명 → 2017년 12명
자민당 내에서 가장 이질적인 파벌입니다. 이 파벌의 색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보수 좌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파벌은 개진당에서 유래했는데, 개진당은 수정자본주의를 지향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소수 파벌이었고, 자민당 내에서는 좌파로 분류되는 세력이었습니다. 수가 적기 때문에 주류 파벌이 될 수는 없었지만, 여러 대형 파벌들이 권력 투쟁을 하는 자민당에서는 캐스팅보드 역할을 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해왔습니다.
하지만 2009년 선거의 자민당 참패 이후 기존 구성원들이 다수 이탈하고 오오시마파 시절에 청화회, 위공회 등과 가까워지면서 한 때 아소파인 위공회와 통합을 위한 조직까지 구성했습니다. 그런 영향도 있어서 파벌 창설 이후 유지되어 오던 보수 좌파적 색채가 많이 윤색돼 현재는 아소파와 함께 아베 총리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파벌입니다.
일본의 걸 그룹 스피드(‘SPEED’)의 이마이 에리코가 바로 번촌정책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2016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돼 당선되었습니다. 당연히 이마이 에리코는 현재 산토우파 소속입니다.
자민당의 파벌 정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코이즈미 정권 이후로 자민당 파벌의 의미는 크게 윤색됐습니다. 그리고 2009년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한번 이루어지면서 파벌 정치에 영향을 미치던 나이든 정치가들이 대거 정계를 은퇴해버려 같은 파벌이라도 수십년 전부터 이어져오던 노선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파벌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파벌간의 색깔 차이도 약해지고, 파벌의 지원 없이도 독자적인 후원 단체를 등에 업고 선거를 치루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서 과거와는 달리 보다 적은 비용으로 높은 효율의 정치 활동을 전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자민당 안에서 총리를 뽑을 때는 파벌의 힘이 절대적인 상황입니다. 지금이야 아베의 리더십 덕분에 자민당의 인기가 높고 야당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파벌끼리 반목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나카 카쿠에이와 후쿠다 다케오가 15년여 간 권력을 두고 쟁투한 각복(角福)전쟁처럼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항쟁할 가능성도 없고요. 하지만 그 때문에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편을 최대한 많이 모으는 것이 다시 중요해졌습니다.
결국, 일본 총리가 되는 자민당 총재 자리는 자민당의 각 파벌이 어느 파벌 후보자를 밀어주는가로 결정됩니다. 특정 파벌에 소속된 의원이 소신 있게 투표하기는 어려운 현실이고, 소신 투표는 곧 파벌 이탈을 의미하기 때문에 파벌의 내부 결정을 거스르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조합의 통합에도 기시다파 영향력 상승
자민당의 지지도가 야당을 압도하고, 당분간 이런 상황이 쉽게 변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파벌이 더욱 중요해진 것입니다. 자민당을 지배하는 것이 곧 일본을 지배하는 것이니까요. 현재 통합 움직임을 보이는 파벌이 많기 때문에 실제로 통합이 이루어진다면 판도는 이렇게 됩니다.
- 굉지회 계열이 전부 통합되고, 니카이파와 이시하라파가 통합할 경우
→ 호소다파(99), 누카가파(55), 기시다파(107), 니카이파(55), 이시바파(20), 산토우파(12)
- 기시타파에 다니가키가 합류, 아소파와 산토우파 통합, 그리고 니카이파와 이시하라파 통합할 경우
→ 호소다파(99), 누카가파(55), 기시다파(63), 아소파(56), 니카이파(55), 이시바파(20)
어떤 형태로 통합이 이루어져도 기시다파의 영향력이 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시다파와 아소파의 통합 가능성은 다소 불투명합니다. 미야자와파(현재의 기시다파)에서 고노파(현재의 아소파)가 이탈할 때의 감정의 골이 깊고, 파벌 분열 당시의 당사자인 아소 타로가 현재 파벌의 영수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파벌 이탈 후 많은 시간이 지나서 비둘기파 성향인 기시다파와는 달리 아소파는 호소다파와 함께 매파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시다파와 다니가키파는 통합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다니가키파는 정식 파벌이 아니고, 굉지회에서 이탈한 이유도 당 3역을 맡으면 파벌을 이탈한다는 관행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통합의 장애물이 없습니다.
아베가 소속된 호소다파가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기는 하지만, 중참의원을 합쳐서 약 420석 있는 자민당 의석수의 1/4에 불과하고, 중의원만 놓고 보면 호소다파는 자민당 중의원 전체 의석수에 1/5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호소다파도 당내 다른 파벌과 연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는 타 파벌들의 지원으로 아베 총리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누카가파나 기시다파의 힘이 강해지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기시다파는 지금까지 아베 정권에 협력한 공적에 비해서 대우가 좋지 않아서 표면화되지 않은 불만이 많이 쌓여 있거든요.
포스트 아베
그렇다면 다니가키나 기시다가 충분히 포스트 아베를 노려 볼만 하겠죠. 다니가키는 72세로 다소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야당 시절(민주당 정권 시절) 자민당 총재를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시다는 지명도나 정치 경력에 비해서 매우 젊습니다. 파벌 영수로서는 매우 어린 59세에 불과하거든요.
최근 모리토모 학원 문제로 아베 총리가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아베 내각 지지율이 한 달 새 10% 넘게 하락했습니다. 지금까지 총리들은 이런 문제가 터지면 모두 사임을 했습니다. 아베 총리는 어떻게 될까요? 이번 위기를 잘 넘긴다면 나이가 젊은 만큼 앞으로 최소 3~5년 정도 더 총리직을 유지하겠죠.
물론 가능성이 매우 낮긴 하지만, 이번 문제로 아베 총리가 물러나게 된다면, 자민당의 파벌 항쟁은 더욱 더 빠르게 시작될 모릅니다. 그때는 일본의 정치 지형뿐만 아니라 한·일관계도 새로운 형태로 재정립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