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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이 글 필자는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의 극장 자막 번역가인 황석희 님입니다. 문맥 이해를 위해 미리 알려드립니다. (편집자)[/box]

[사일런스]에 출연하려고 스콜세지 감독을 찾아 뉴욕과 대만 촬영장까지 갔던 한국 배우가 있다.

"스콜세지를 찾아서 한국, 뉴욕, 타이페이를 거쳤다"는 내용과 "사일런스를 위해 14년을 기다렸다"는 내용의 배우 남정우가 만든 피켓.
“스콜세지를 찾아서 한국, 뉴욕, 타이페이를 거쳤다”는 내용과 “사일런스를 위해 14년을 기다렸다”는 내용의 배우 남정우가 만든 피켓.

배우 남정우의 용기와 열정 

대학 시절 연극을 하던 시절부터 [침묵]이란 작품에 반해 있던 이 배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에 출연하고자 마음을 먹는다. 사실 감독과 약속을 잡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고, 촬영장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다고 이 거장의 작품에 무명 배우를 써 줄 리도 없다.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상상하기 힘든 용기다.

배우 남정우 씨.
배우 남정우 씨.

[사일런스] 첫 내부 시사회 후에 배우 남정우와 만나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편집까지 완성된 영화는 처음 보는 순간, 남 배우의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그 전에 이미 번역 작업을 하면서 작품을 많이 봤기 때문에 남 배우가 어느 장면에 나오는지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지만, 남 배우는 그 짧은 분량이 혹시나 편집돼 날아가진 않았을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고 한다.

번역 과정에서 남정우 배우의 페이스북을 찾아가 친구를 걸고 메시지로 물어봤다. 극 중에 대사가 있냐고. 단독 대사는 없고 싸움을 말리는 상황에서 다 같이 외치던 “야멩까!”(止めんか; stop!)”란 대사가 있다고 했다. 내가 영화 자막 번역가로서 뭔가 해 줄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이때다.

영화 [사일런스 ] (2016) 중에서
영화 [사일런스 ] (2016) 중에서
영화 번역엔 스파팅(spotting)이라는 과정이 있다. 1번 자막, 2번 자막, 3번 자막. 이렇게 자막 별로 호흡을 자르고 번호를 매기는 일, 이런 작업을 스파팅이라고 한다.

영화 [캐롤]의 스파팅 리스트
영화 [캐롤]의 스파팅 리스트
보통은 이렇게 미리 스파팅이 된 대본이 오고 번역가는 저 스파팅 대로 자막을 만든다. 위 이미지처럼 좌측에 1/1, 1/2처럼 넘버링이 돼 있어서 자막도 1/1, 1/2 순서로 만들면 된다. 직배사 같은 경우는 스파팅을 임의로 바꿀 수 없지만, 그 외 작품들은 스파팅에도 번역가의 재량이 어느 정도 있다. 쉽게 말해 번역가가 대사를 자르고 붙이거나, 들리긴 하는데 대본에 누락돼 있는 대사들을 넣을 수 있다는 거다.

번역가로서 남 배우에게 주고 싶었던 작은 선물 

남정우 배우에게 대사가 있냐고 물어봤던 건 혹시나 신음 한 마디라도 뱉은 게 있다면 자막에서 잡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 재량이 있던 대본이었으니까. 싸움을 말리는 장면에서 모두가 외쳤던 “야멩까!”(止めんか; stop!)”는 영문 대본엔 모두 누락돼 있다. 이렇게 오디오가 맞물리고 큰 의미가 없는 대사들은 영문 대본에서 아예 누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대사를 한국어 자막으로 넣느냐, 넣지 않느냐는 번역가의 재량이다.

영상 재생을 십수 번 반복하며 남정우 배우가 외치는 장면과 “야멩까!”(止めんか; stop!)”라는 대사가 같이 들리는 지점을 찾아냈다. 그 지점에 자막을 하나 채워 넣고, 영상에 자막을 올리는 작업을 하는 회사엔 그 장면의 시간(TC)을 적어 정확히 그 지점에 자막을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남정우 배우의 열정에 대한 큰 존경심으로 번역가 나부랭이가 드리는 보잘것없는 선물이다. 앞으론 “대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가 아니라 “대사도 한마디 있었다”로 말씀하실 수 있으면 좋겠다. 멋진 용기와 열정으로 삶의 커다란 영감이 돼 준 남정우 배우에게 다시 한번 크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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