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친'(페이스북 친구) 한 사람이 떠났다. 페친 이전에 좋아하고 존경한 직장 선배였다. 짤막한 글에서 그간의 고민이 선연히 보인다. ‘남들이 ‘좋아요’ 누른 것을 제가 억지로 봐야 하는’ 상황의 심란함이, 훤히 그려진다.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정치적 당파성이 극렬한 대조와 갈등을 빚는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면 더더욱.
내 경우에 국한해 본다면, 정치적 지향이나 종교적 신념의 차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난 몇 년간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을 거쳐 내 앞에 게시되는 포스팅의 내용이 내 취향과 지향과 관심사에 최적화된 결과일 것이다. 광고가 종종 불편하기는 하지만 무시하면 그만이고, 개중에는 내 관심사에 잘 부합하는 정보성 광고도 없지 않으니 그 정도면 ‘제로섬’ 수준은 될 것이라고 자위한다.
그럼에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를 쓰면 쓸수록, 나는 나 자신이 자꾸 무엇인가에 종속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혹은 부지불식 간에 소셜미디어 자본의 한갓 도구나 부품으로 전락해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떨치기 어렵다.
내가 ‘좋아요’, 혹은 그 변주를 눌러 일정한 반응을 나타낸 게시물들은 점점 더 자주 나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나타나 내 주의를 끌고,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았거나 심지어 보기 싫다고 내 타임라인에서 빼거나 가리거나 게시 횟수를 줄이거나 심지어 차단하도록 선택한 포스팅들은 서서히, 혹은 단번에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나는 내가 동의하고 공감하는 포스팅들에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합니다’, ‘공감합니다’는 내용의 댓글을 달면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그들이 속한 그룹과 동화되고 결속된다. 그러는 사이, 일정한 정치적 현안이나 사회 이슈에 대한 내 시각이 옳다는 확인과 응원과 지원을, 그들로부터 받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들에게 지원군으로, 동지로 작동한다. 서로 우군이자 동지 관계임을 되풀이해서 확인한다. 나의 사회적 신념과 정치적 방향성은 그런 반복된 피드백 과정을 거쳐 더욱 공고해진다.
그래 내가 맞아. 저들은 틀렸어!
평행우주
그러나 다른 한 편,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세계들이, 페이스북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나는 인지하고 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스스로 상기하곤 한다. 그 다른 세계를, 나는 단지 일삼아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명명백백한 사실과 증거가 이렇게 많은데도 그러한 주의를 고집하고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과연 꼭 그럴까?
그 다른 세계, 세계들은, 그러나 내가 일구고 길들이는(혹은 ‘나를’ 길들이는) 세계와 겹치지 않는다. 유유상종을 부추기고 강화하는 페이스북의 알고리즘 때문이다. 일종의 평행 우주인 셈이다. 그들과 나의 세계관은 워낙 다르고, 정치적 지향도 워낙 어긋나며, 사회 문제에 대한 시각 또한 워낙 이질적이어서, 페이스북이라는 소우주에서 서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나와 그들은 각기 다른 행성의 거주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들은 그들대로, 내가 그런 것처럼 페이스북에서 비슷한 시각과 신념과 의견을 가진 이들끼리 뭉칠 것이다. 뭉치도록 페이스북이 부추길 것이다. 내가 보거나 읽은 내용, 관심을 보인 콘텐츠에 맞춰 그와 유사한 포스팅을 내 타임라인에 노출하고, 나와 동류로 평가된 다른 페이스북 인사들을 모아주는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공평하게 적용되고 작동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영악한 아첨꾼이자 선동꾼이다. 그렇게 유도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할 만큼 시나브로, 유연하게 부추긴다는 점에서는 다른 어떤 인간 선동꾼보다도 더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모사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필터 버블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포되는, ‘정보’와 ‘뉴스’의 탈을 쓴 그 정보나 뉴스가 과연 진짜인지, 이른바 ‘팩트’ (fact)인지 판별하기는, 언제나 쉽고 간단하지만은 않다. 한눈에 가짜임이 분명한 사이비 정보와 허위 뉴스(fake news)도 있지만, 꼼꼼히 취재원을 추적하고, 다른 믿을 만한 매체와 대조해 보지 않으면 확인하기 어려운, 언뜻 진짜 정보나 뉴스로 착각할 만한 것도 적지 않다. 그와 같은 정보 폭주 현상에, 페이스북이 우리에게 자행하는[footnote]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용자의 편익을 높이기 위해'[/footnote] ‘필터 버블'(filter bubble) [footnote]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의 인터넷 정보제공자가 이용자에 맞추어 필터링한 정보를 이용자에게 제공함으로써, 이용자가 이미 필터링된 정보만을 접하게 되는 것. 미국의 NGO 무브온 이사장 엘리 패리저(Eli Pariser)가 동명의 책 [The Filter bubble] (우리나라 번역서 제목 ‘생각 조종자들’)에서 주창한 개념이다. (참고: 위키백과 ‘필터 버블’) [/footnote] 현상을 추가해보면, 문제는 자못 심각할 수가 있다. 아니, 유명 연예인이나 고위 정치인들을 둘러싼 온라인의 왜곡 현상은 트럼프의 미국 대선 승리에서 보듯이 이미 매우 심각하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미디어의 이런 뜻하지 않은 왜곡과 호도는 심지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고별 연설에도 등장했다.
“그리고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자신들만의 거품 속에 안주하기 때문이죠. 그 거품은 우리 이웃일 수도 있고, 대학 캠퍼스나 교회, 성전일 수도 있으며, 특히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동일한 정치적 의견을 공유하고, 서로의 추정이나 가정에 전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소셜 미디어의 게시판일 수도 있습니다.
적나라한 당파적 주장이 노골화하고, 경제적, 지역적 계층화가 심화하고, 그 모든 취향에 영합하기 위해 언론은 산산이 쪼개져 버리고 있는 현상을 고려하면, 이러한 분류와 편 가르기는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아니,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우리는 외부의 객관적 증거에 바탕해 의견을 세우는 대신, 자기들만의 거품 속에 안주한 채 사실 여부는 따져 보지도 않고, 우리 의견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심각한 현실 왜곡 현상이, 우리 개개인에게 미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더는 종이신문이나 TV 뉴스를 통해서만 정보나 뉴스를 섭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는 지인이나 친구들과 맺은 ‘소셜 네트워크’, 다시 말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식 입소문을 통해 정보를 얻고 뉴스를 섭취한다. 더 나아가, 때로는 검증된 언론의 보도보다, 페이스북 지인이나 친구의 그럴싸한 음모이론에 더 경도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 입맛에 맞게 재단되고 편집되고 왜곡된 소셜 미디어의 정보는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우리에게 아첨을 떨기 위한 ‘립 서비스’에 불과한 것인가?
그래서 나는 자주 의심한다. 삐딱한 시선부터 주게 된다. 페이스북의 포스팅을 훑다가, 개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사진이나 글이 아닌 ‘정보’, 혹은 ‘뉴스’처럼 보이는 내용을 보면 저게 얼마나 사실일까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리고 잘 믿기지 않는 경우 제2, 제3의 증거 자료로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만, 사이비 정보와 허위 뉴스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을 것 같아서다.
주목의 빈곤
그뿐인가. 설령 내가 보고 읽는 정보나 뉴스가 모두 사실/진실이라고 가정해도, 보고 읽어야 하는, 아니, 그냥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야 하는 정보나 뉴스는 이미 너무 많다. 포화 상태다. 저 정보, 저 뉴스가, 나에게 얼마나 요긴한 것이냐는 물음을 던질 여유조차 찾기 어렵다. 요즘 페이스북을 통해 접하는 온갖 정보와 뉴스와 의견들은, 그저 표피적으로 훑기만 하는데도 위화감부터 안겨준다. 산사태에 휩쓸리거나, 쓰나미에 속절없이 떠밀려버리는 무력감과도 비슷하다.
어젯밤 팀 우의 신간 ‘Attention Merchants’에 대한 리뷰와 저자 인터뷰를 담은 가디언의 기사를 보다가 이런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이 1971년에 보여주었다는 놀라운 통찰이었다.
“정보로 넘치는 세계에서, 정보의 풍요는 다른 무엇인가의 빈곤을 의미한다. 바로 풍요해진 그 정보가 소비하는 무엇. 정보가 무엇을 소비하는지는 명백하다. 바로 정보 수취인의 주목이다. 따라서 정보의 풍요는 주목의 빈곤을 초래하고, 저마다 주목을 요구하는 정보의 범람 속에서 효율적으로 그 ‘주목’이라는 자원을 배분하고 할당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Nobel prize-winning economist Herbert Simon made in 1971. “In an information-rich world,” Simon wrote, “the wealth of information means a dearth of something else: a scarcity of whatever it is that information consumes. What information consumes is rather obvious: it consumes the attention of its recipients. Hence a wealth of information creates a poverty of attention and a need to allocate that attention efficiently among the overabundance of information sources that might consume it.”
나는 요즘, 어느새 빈곤해져 버린 나의 주의력, 집중력, 깊이 읽고 깊이 고민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찾아야겠다고 조바심친다. 그러자면 소셜 미디어를 끊어야 해답이 나올 것 같다. 아니, 끊지는 않더라도 접속 시간을 대폭 줄여야만 할 것 같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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