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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현대 세계의 향방을 알기 위해 꼭 이해해야 할 국가,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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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가 ‘중국과 미국의 지리한 평행선’에서 끝난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의 평화’를 즐길 수 있겠다. 불안을 야기하는 대치 상태는 계속될 수 있어도 그것이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00년 전 오늘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등장한 때는 이 시대가 처음이 아니다. 거의 정확히 100년 전에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이 독일에 자본을 투자했고 독일은 러시아에 자본을 투자하는 등 정치적 이해관계와 별개로 세계는 하나로 통합되고 있었다. 유럽의 긴 평화 시대에 있던 전쟁들은 러·일전쟁이나 미국의 남북전쟁과 같은 주변부의 전쟁이거나, 보·불전쟁과 같이 단숨에 끝나는 단기전밖에 없었다.

만약 새로운 강대국 간의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빠르게 종결되어 세계자본주의는 그대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이 모두의 예상이었다. 그리고 거의 정확히 100년 전에, 정확히는 102년 전인 1914년에 평화가 영구히 지속하리라는 낙관론은 너무도 허무하게 깨지고 만다.

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파멸적인 수준의 전쟁이 일어났다. 그 당시까지 세계 자본주의 최고 전성기에 축적된 기술적 성과들이 사람을 도륙하는 살인기술로 변모하여 독가스, 전투기, 전차, 기관총으로 구현되었다. 1천만 명이 죽었고, 전쟁이 끝난 자리에는 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승자도 상처와 허울 좋은 영광만 얻었을 따름이었다. 더욱 최악인 것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으로 칭해진 이 전쟁 뒤에 더욱 끔찍한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왜 세계는 ‘벨 에포크'(Belle Epoch) [footnote]제국주의 전성기의 번영과 평화를 회상하는 말[/footnote]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것인가? 전쟁을 감수하고자 한 독일의 지도부가 바보라서? 물론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킨 빌헬름 2세는 충분히 바보라고 불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 대륙의 모든 수뇌부가 바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설령 집단사고의 오류에 빠졌을지는 몰라도, 그들이 자신과 국가의 이익을 계산할 줄 모르는 비합리적 행위자라고 쉽사리 간주하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난 뒤에야 이를 억지로 짜 맞춘 것에 불과하다.

실마리, 국제무역의 역학 

이번에도 국제무역이 그 열쇠였다. 자본투자, 산업화, 국제무역 등으로 독일, 이후에는 러시아가 급속히 부상했다. 이는 신뢰가 부재한 유럽 각국에 큰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부상하는 러시아는 후에 100년 전인 나폴레옹 전쟁 때 차르가 보여주었던 러시아 스팀롤러를 다시 베를린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공포를 독일 조야에, 특히 지도부의 핵심이었던 프로이센 융커들에게 심어주었다.

제국 러시아의 위용
제국 러시아의 위용 (출처: raremaps.com)

또한, 진정한 산업 대국과 세계 강대국으로 도약하기를 원했던 독일의 신흥자본가들은 독일이 식민지를 더 많이 확보하고 위엄 넘치는 해군 함대를 건설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영국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인종부터 다른 독일인이라는 족속(영국인들은 독일인을 훈족이라고 부르곤 했다)이 이제 식민지 경쟁에서도 경쟁자로 떠오르게 되자 그들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었다.

러시아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차라, 강력한 육군 전력으로 순식간에 프랑스를 굴복시킨 독일을 더욱 신뢰할 수 없었으며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즉, 영국이 ‘보이지 않는 주먹’으로 통제하는 안정된 세계 경제 속에서 빠르게 부상하여 강력한 플레이어로 정치적 영역에 진입한 국가들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이들과 세력권과 이권을 어떤 식으로 재분배할 것이냐에 대한 복잡한 계산이 제1차 세계대전 전야의 유럽 외교였고, 1914년이 되자 지도부는 이를 전쟁으로 풀기를 결심했던 것이다.

미스터리한 ’40년의 평화’ 

그러나 언젠가는 임계점을 지나 터질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곤 하더라도 이런 불안한 상황 속에서 유럽의 평화는 거의 40년을 유지할 수 있었다. 40년 동안 어째서 유럽은 전쟁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우선 그때까지만 해도 이익을 조정하고 분배할 여력이, 즉 남은 식민지들이 있었다.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영국과 유라시아를 놓고 벌인 ‘그레이트 게임’에서 물러나야 할 처지가 되자 영국은 이란의 북쪽 반을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인정해주고 타협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남은 이익을 두고서라도 얼마든지 강대국 간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던 상황이었기에(특히 프랑스의 불만이 굉장했다) 이는 평화에 대한 온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걸출한 인물이 필요하다. 바로 독일의 명재상 비스마르크다.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년 4월 1일 ~ 1898년 7월 30일)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년 4월 1일 ~ 1898년 7월 30일)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만을 고립시키는 대신 러시아와 영국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독일의 국력을 키우는 것이 타당한 전략이라고 여겼다. 그를 위해서 비스마르크는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 러시아와의 협력, 그리고 식민지 쟁탈전에 대한 소극적 태도 등 다수의 독일인은 생각지도 못한 외교정책을 펼쳤다.

2차 산업혁명 시기에 여러 후발주자가 등장했지만, 그중 영국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독일의 부상이 비교적 매끄럽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스마르크가 외부를 성공적으로 안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국민 정서가 전쟁의 도화선이 되고 만다.

비스마크르의 실각과 유럽 대중의 환호 

우리는 흔히 이어지는 비스마르크의 실각을 빌헬름 2세와 연관 짓곤 했지만, 사실 비스마르크의 실각은 전 독일이 환영한 일이었다. 그의 독재적인 리더십 탓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그의 외교정책이 당시 독일 국민이 원하는, 강한 독일과는 배치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독일의 융커, 산업자본가 등은 자신들의 정책적 이익 때문에 영국 혹은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선호하기도 하였지만, 그를 압도하는 것은 대중의 여론이기도 했다. 더는 대외문제에서 굽히고 들어가지 말자는 것, 국력에 어울리는 정당한 지위를 세계 속에서 확보해야만 한다는 것이 당대 모든 국가 안에서 통용되던 합치된 의견이었다.

이런 대중적 지지 속에서 빌헬름 2세는 도발적인 정책을 이어갔고 이후 누적된 국제관계의 스트레스는 마침내 전쟁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전쟁 발발 소식이 들려오자 영국, 독일, 러시아 할 것 없이 모든 당사국의 대중은 환호성을 질렀다.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년 1월 27일~1941년 6월 4일)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년 1월 27일~1941년 6월 4일)

분노한 일본과 제국의 파멸 

비슷한 일은 지구 반대편에도 있었다. 일본은 페리 제독의 흑선이 내항하자 에도 시대 이후로 굳게 닫았던 문을 열어젖히고 서양을 배우자고 나섰다. 수많은 서양 서적들이 일본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는 소리까지 나왔다.

일본의 국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하여 중국과 러시아마저도 굴복시키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은 국제 질서 속에서 영국의 하위 파트너였고, 일본은 그 지위를 통해서 이익을 얻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도달하자 일본도 독일과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워싱턴 군축 조약으로 일본의 해군 전력이 억제되자 일본의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다. 미국과 영국이 자신들을 마침내 고사시키려 한다는 것이 당시 일본 내 여론이었다. 군부는 이런 여론을 이용하고 때로는 주도하여 팽창주의적 정책의 첨단을 달리게 된다. 그 결과는 중·일전쟁과 이어지는 태평양 전쟁, 그리고 욱일승천한 일본 제국의 파멸이었다.

원폭 후 폐허로 변한 히로시마
원폭 후 폐허로 변한 히로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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