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1816년은 그 당시 세상에 참 잔혹한 해였다. 사가들은 그 해를 소위 ‘서양의 마지막 위기’ 혹은 ‘여름이 없던 해’라고 지칭했다.
1816년 그 해에는 여름이 없었다
1812년부터 1814년까지 매해 거대한 규모의 화산 분화가 있었고, 1815년 인도네시아의 탐 보라 산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이 만들어낸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햇볕을 차단해 세계 평균 기온을 크게 떨어뜨리게 된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낮은 기온은 그만큼 심각한 농산물 피해를 일으켜 세계 곳곳에서 흉작과 기아가 발생했으며 수많은 사람이 여름에도 눈과 서리를 목격하며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상 기후가 발생시키는 풍경 또한 남달라 많은 화가가 화산재가 그려내는 저녁노을을 화폭에 담았고, 기술자들은 당시 운송수단으로 널리 쓰이던 말이 너무나 모자라자 그를 대신하는 교통기관을 고려하다 자전거를 발명하기에 이르렀고, 전쟁이 아닌 자연재해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문인들은 세계의 종말에 대한 서사와 악몽을 펜으로 쓰기 시작했다.
디오다티 별장에서 벌어진 괴담 이벤트
1816년의 여름 아닌 여름을 맞으며 스위스에 머물던 사람들도 비슷한 감상에 젖어가고 있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문학 거장 조지 고든 바이런은 아내와의 이혼 등 가정위기에 시달리던 차 절친한 문인이자 시인인 퍼시 셸리를 만나 스위스 휴양을 제안했다.
그렇게 모인 바이런과 셸리, 바이런의 주치의 폴리도리, 셸리의 애인 메리 골드윈, 메리의 여동생 클레어까지 합류하게 된 일행은 제네바 호수 근처의 별장 ‘디오다티’를 빌려 휴양을 하려 했지만, 연일 지루하게 내리는 비 때문에 별장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 18살에 이미 두 문인에게 탁월한 문예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던 메리 골드윈, 내과의사일 뿐 아니라 역시 글쓰기에서 남다른 재주를 드러내 보이던 폴리도리와 함께 있자니 바이런과 셸리는 당시의 지루한 상황을 재미있는 글쓰기 이벤트로 바꿔보자고 제안했다. 그들이 꺼내 든 것은 독일에서 펴낸 [판타스마고리아나] 라는 이름의 귀담집이었다.
당시 6개에서 8개의 인기 있는 유령 이야기에, 환등기를 뜻하는 ‘판타스마고리’를 제목으로 채택한 귀담집은 여럿이 모여있던 밤에 으스스한 이야기를 꺼내는 배경으로는 안성맞춤이 되었다. 그들은 마침 프랑스어판으로 출간되어 있던 그 괴담집의 낭독회와 더불어 낭독이 끝난 뒤에는 각자 하나씩 생각나는 대로 비슷한 유령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메리가 꾼 악몽
셸리는 짧은 아이디어를 냈지만 글로 옮기지는 않았고, 바이런은 ‘이반 스테파노비치 마제파’라는 우크라이나의 실존했던 반전 지도자에 흡혈귀 요소를 섞어서 그럴듯한 괴담을 지어냈다. 바이런은 모임 이후에도 그 이야기를 <파편>이라는 이름의 소설로 발표하며 여러 해를 써 내려 갔지만 끝내 완성은 되지 않았다.
그날 바이런이 만들었던 흡혈귀 이야기의 공동 창작자였던 폴리도리는 바이런이 [파편]을 썼던 해에 자신도 같은 소재를 활용하여 [뱀파이어] 라는 이름의 본격 고딕 소설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태어난 가장 뛰어난 이야기는 메리 고드윈의 것이었다. 메리는 별장에 오기 전부터 1차 산업혁명이 보여주는 과학적인 에너지 활용, 갈바니의 생체전기 실험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바이런과 폴리도리가 만들어내는 ‘흡혈귀 이야기’가 평소의 섬세한 감수성에 영향을 끼쳤는지 그는 이야기 창작 모임의 첫날밤부터 관심사와 귀신 이야기들이 뒤섞인 무섭고도 생생한 꿈을 꾸게 되었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모종의 심리적 압박과 약간의 경쟁심에 들떠있던 메리는 ‘괴담 짓기’ 이벤트가 시작되고 곧바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자 스스로 분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새벽마다 잠을 설치며 꿨던 메리의 꿈은 한 과학자가 시체를 우연히 전기충격으로 살려내는 짤막한 괴담이 시작이었지만 꿈을 거듭 꿀 수록 생명을 직접 만들어내는 과학자의 실험이 걷잡을 수 없는 괴물을 길러내는 끔찍한 악몽으로 확장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가장 먼저 짧은 이야기를 만들었던 퍼시 셸리는 곧 메리가 꾸는 악몽과 그에 기반을 둔 이야기를 건네 듣고 꾸준한 격려를 시작했다.
셸리의 격려는 뜻밖에 큰 힘을 발휘해, 짧은 괴담으로 그칠 뻔했던 이야기가 메리의 뛰어난 기억력에 살이 붙으며 거대하면서도 정교한 서사로 변하기 시작했다.
메리는 1년에 걸쳐 이야기의 살을 거의 완성한 뒤 그 모임이 있었던 장소인 스위스와 그 모임에서 무서운 이야기들을 자아낸 독일 귀담집 [판타스마고리아나] 등의 배경에 착안해 스위스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소설 속 과학자의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 해 뒤 익명으로 소설을 출간하였으니, 그 소설의 제목은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였다.
현대 대중문화의 공포와 괴기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탄생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소설 출간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환상문학 분야, 이른바 고딕 문학의 형식을 듬뿍 갖추고 있던 [프랑켄슈타인]은 그때까지 나왔던 모든 무섭고 신비로운 귀신 괴물 이야기들과 매우 다른 요소들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회 계몽적인 철학과 인권 감수성, 사변문학으로서의 탐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적인 사고와 상상력의 현실적인 결합은 돋보이다 못해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이전까지의 문학 속 괴물들은 그 기원이나 유래가 아무리 상세하다 해도 과학적인 설정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메리 셸리(메리 메이든은 1816년이 다 가기 전에 셸리와 결혼해서 그의 성을 따랐다.)가 만든 이 작품 속 괴물은 과학적인 실험과 예측이 빚어낸 산물일 뿐 더러 단순한 괴물이 아닌 자아를 갖춘 인격체였던 것이다.
메리 셸리의 영민함과 작가로서의 가치를 잘 알아본 남편 퍼시 셸리는 초판본부터 메리 셸리의 이름으로 작품이 출간되기를 권했지만, 메리는 남편의 선동이 아니었으면 아예 소설 자체를 출간하지 않았을 것이라 회고했을 정도여서 결국 초판본은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퍼시 셸리가 사망한 1822년이 되자 메리 셸리는 남편과 지인들의 열망에 대해 고민했고, 극작가인 리처드 브린슬리 피크가 [프랑켄슈타인]을 연극무대로 올리고 메리 셸리와 그 아버지 윌리엄 메이든을 설득하여 연극의 성공과 더불어 [프랑켄슈타인]은 1823년 메리 셸리의 이름으로 재출간이 된다.
[프랑켄슈타인]의 인기와 비판
[프랑켄슈타인]은 연극의 흥행과 재판본의 성황리 판매로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갔지만, 작품이 유명해지는 만큼 꾸준한 충격과 반향 역시 얻게 됐다.
초판본에서는 여성 독자층으로부터 ‘남성 작가가 여성의 출산을 건드린다’는 예상치 못한 비난을 받기도 했고 2번째 판본에서 작가의 이름과 성별이 밝혀지자 이번에는 남성 독자와 비평가들로부터 ‘여류작가가 뭘 모르고 쓴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작품이 가진 상징성과 은유는 물론 박력 넘치는 전개와 묘사가 충격과 인기를 동시에 끌며 얻은 현상이었지만, 작가가 드러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대로 드러나면 또 드러난 만큼 편견에 기대어 작품 외적인 요소에만 치중한 비난이 빚어내는 촌극이기도 했다.
메리 셸리가 세상에 [프랑켄슈타인]을 선보이고 다시 반세기가 지나서야 사람들은 그 작품이 어떤 장르를 만들어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최초의 SF였다
1865년 프랑스의 소설가 쥘 베른이 [지구에서 달까지]를 내놓자, 사변 소설의 경계에서 벗어나 과학적 가설과 추론 그리고 그 설정들이 빚어내는 상상력이 독자들을 이끌어, 독자 역시 소설 속 사건을 현실처럼 추측하고 이해하게 되는 장르 소설인 과학소설, 이른바 SF 가 확립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최초의 SF 소설로 인식되게 된 [지구에서 달까지]보다 무려 49년 전에 완전한 SF 문학으로서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지만, 두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평가절하되었고 [지구에서 달까지]가 나오기 전까지 이 소설이 뭘 가리키는 것인지를 당시 대중들은 제대로 파악조차 못했던 것이다.
‘환상스러운 괴물과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묘사하는 고딕 문학’이라는 점과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단 두가지 이유로 말이다.
[프랑켄슈타인]과 대중문화의 호흡
[프랑켄슈타인]은 시간이 흐를 수 록 소설 장르를 뛰어넘어 1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영상 기술과 만나 대중문화 속으로 메리 셸리가 꾸었던 악몽처럼 생생한 비주얼의 힘을 발휘해 나갔다.
[프랑켄슈타인]은 1910년 발명가 에디슨이 만든 초창기의 영화 중 하나가 되기도 했고, 1931년에는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만든 공포영화로서 [드라큘라] 시리즈와 자웅을 겨루며 대중문화 속 괴물 공포영화로서 입지를 다져나가는 등 문학, 연극, 영상의 분야에서 다양한 장르를 파생시키는 시작이 되었다.
또한, [프랑켄슈타인]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전형적인 형태의 인물을 낳기도 했다. 1886년 출간된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도 매드 사이언티스트 장르의 파생물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최초 부제였던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는 고전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를 소설 속에서 인간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과학자의 광기에 비유하고 있는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작품 자체가 또한 대중문화에서 최초의 SF, 최초의 영화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200년 전 [프랑켄슈타인]이 던진 사회적 메시지
메리 셸리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최초의 페미니즘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를 펴냈던 사실 또한 [프랑켄슈타인]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참 당연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이며 그렇기에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한 이 저서는 당시에 파란을 일으켰고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재조명받기도 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이름 없는 괴물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그 공포스런 외모 때문에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한 아픔에 대해 진지하고 장중하게 토로한다. 소설 속 괴물이 구사하는 언어조차 누군가에게서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한 하나의 권리라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200년 전 꾸었던 악몽 속에서 메리 셸리는 다가오는 미래를 어떻게 예견하고 상상했던 것일까?
우리는 오로지 그가 남긴 [프랑켄슈타인]과 그 뒤 남겨진 몇 저서들을 통해, 최초의 SF가 불을 붙였고 덕분에 아직도 발전을 거듭하는 관련 문화들에 대해 새삼 그 가치를 재발견할 뿐이다. 어쩌면 참 평범한 철학,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는 인권선언의 첫 항 역시 이미 200년 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부르짖었던 주장이라는 점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