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제도
세상에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게 참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무조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모든 세상 사람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그걸 강요한다. 반면 가족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새로운 가족이 날마다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혼인제도, 호적제도 등 가족에 대한 각종 제도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가족 개념은 변해왔고, 더불어 사회 변화에 따른 가족구조의 변화, 가족 내 권력관계 등을 파악하는 기능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도 그 의미가 재정의되어 왔다. 특히 가족구조의 변화나 권력관계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과 페미니즘 등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당연하게 유지되어 온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가 사실 당연하지 않고, 그 정당성이 문제시되며, 논의가 확장된 건 1980년대에 불과하다.
영화 [가족의 탄생]이 이야기하는 가족의 의미
김태용 감독이 2006년에 만든 두 번째 장편 영화인 [가족의 탄생]은 특별하다. 대안 가족에 대한 성찰을 대중적인 이야기로 끌어올린 최초의 한국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가족의 모습은 평범하지 않다. 주위 시선 따위는 무시한 채 동거하는 20살 연상녀와 연하남, 나이가 아무리 먹어도 사랑에 목숨 거는 엄마, 그리고 그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친구를 둔 한 여성, 주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느라 남자친구를 외롭게 하는 여성과 어렸을 때부터 외롭게 자라 여자친구에게 늘 더 많은 걸 바라는 남자….. 이들은 기존 관습의 시각으로 보면 확실히 ‘비정상’이다.
영화는 이런 인물들을 통해 “근대의 억압적 제도”로서의 가족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두 명의 엄마, 전 남편의 전 부인의 딸이기 때문에 호적에 올릴 수 없는 아이, 20살 차이가 나는 연인처럼 제도와 숫자의 한계에 작정하고 부딪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과 상황들은 흔한 신파와 가족은 ‘결국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라는 유치한 결론을 넘어 수많은 고통과 고민을 품은 이들의 편에 서서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족의 의미
시종일관 흥미진진한 질문을 관객들을 향해 던지는 영화 [가족의 탄생]은 그 제목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서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을 통해 엥겔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가족 안에서 남성은 여성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그 가족은 사유 재산에 기초한 계급성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여성의 억압은 인류의 역사 이래로 계속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계급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물질 발전의 역사가 여성 억압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원시공동체 사회가 무너지고 채집, 수렵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생산을 지휘하던 소수에게 생산물이 집중되면서 불평등이 생겼고, 이를 통해 계급이 생겼는데, 생산수단이 고도화되고 육아를 담당해야 했던 여성들은 급속도로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엥겔스는 말한다. 이러한 계급적 관계가 유지되고 방어되는 메커니즘은 가족의 구성원들에게 위계질서를 부여했고 이는 국가의 본질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사회구성원에 대한 처우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2010년 사회조사: 가족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제도적 테두리 안에서 자신을 숨기거나 죽이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주어진 역할에 단순히 순응하거나 소극적인 회피를 시도할 뿐이다.
2010년 사회조사(가족,교육,보건,안전,환경)을 보면 그 특징들이 드러난다.
- 부모의 노후를 가족이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36% (2002년에는 70.7%)
- 부모와 자녀가 동거하지 않고 부모만 따로 사는 경우는 62.8% (2002년에는 56.7%)
- 청소년의 고민상담 대상 중 친구, 동료가 51.1% (부모는 20.7%, 아버지는 2.9%)
- 부모가 자식을 대학 이상 교육시키고 싶은 이유는 좋은 직장을 갖게 하기 위해서가 44.7% (1990년에는 인격이나 교양을 쌓게 하기 위해가 47.6%)
- 자살 충동의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38.8%), 가정불화(15.1%), 외로움/고독(12.9%) 순
- 미혼여성 중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46.8% (미혼남성은 62.6%)
- 미혼여성 중 “이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50.0% (미혼남성은 38.5%)
- 부부가 실제로 가사를 공평하게 분담하고 있는 가정은 전체의 10%
가장 큰 특징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족은 점점 해체되고 있다는 점이다. 부모의 노후를 돌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0명 중 4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는 실제로 부모와 따로 사는 사람들의 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청소년들은 부모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대신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가부장 사회임에도 아버지에게 질문을 털어놓는 자식은 채 3%가 않된다. 그리고 부모는 그런 자식들을 인격이나 교양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직장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는 원초적이고 물질적인 이유로 교육하고 싶어한다. 부모와 자식을 가리지 않고 자살 충동이 드는 경우 중 두 번째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이유는 가정불화이다. (첫째는 경제적 어려움)
미혼여성 중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0명 중 4명이 조금 넘는 정도이다. 결혼하더라도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50%에 이른다. 미혼 남성이 가진 생각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실제로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하고 있는 부부는 전체의 10%에 불과하다.
2012년의 가족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가족은 대개 개인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다. 하지만 반대로 가장 무거운 짐일 수도 있다. 점점 핵가족화가 심화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을 보는 시선은 부모자식 간의 경제적인 부양의무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 때문에 자식 세대들이 받는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더불어 부모세대의 불안과 외로움도 그에 못지않다.
우리는 어떤 가족을 꿈꾸는가. 과정이 어찌 되었든지 가족은 결국 뭉쳐서 한 곳에 살아야 하는가. 아무리 서로 이해하지 못해도 한 냄비 안에 숟가락을 모두 집어넣고 저녁식사를 해야 하는 걸까. 혈연과 제도를 강조하며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회 분위기에 반대하는 이론과 대중예술이 등장한 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족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단편적이고, 일차원적이다. 가족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은 돈 벌어오는 가장에 대한 연민, 부모의 헌신을 잊지 않고,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성실한 자녀, 이처럼 신파조의 정서나 의무로 점철되어 있기가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단절된다. 오랜 침묵은 소외를 낳고, 그 소외가 켜켜이 쌓아놓는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진다. 통계 수치에 담긴 우리시대의 가족. 그 수치들은 ‘가족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침묵과 소외의 골짜기에 아주 서툴더라도 대화의 다리를 놓는 일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가족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