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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 멸종론: 청년세대의 여성 혐오에 관하여

여성혐오가 이슈다. 우선 주의해야 할 것은, 갑자기 어제오늘 사이에 여성혐오가 새롭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성혐오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수많은 여성이 개별적으로 이것에 맞서 싸우며 남자들만의 역사에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

‘여성’도 사람이라는 놀랍고도 급진적인 주장

프랑스 혁명을 전후하여 급기야 여성주의(페미니즘)라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여 ‘여자도 사람’이라는 너무나도 놀랍고 급진적인 주장을 집단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어찌나 놀라웠던지 프랑스 혁명 이후 여성도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함께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여성 혁명가 올랭프 드 구주(1748 ~ 1793)는 자코뱅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고, 교육권, 참정권, 사회참여권 등등을 얻기 위한 숱한 투쟁은 수많은 남자들의 방해와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올랭프 드 구즈(Marie-Olympe-de-Gouges by d’Alexandre Kucharski.

올랭프 드 구주(Marie-Olympe-de-Gouges) by d’Alexandre Kucharski.

아직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종교나 전통 등을 내세워 여자를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취급하려는 남자들은 많고, 법적으로 ‘여자가 사람이고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라는 것을 못 박아 둔 나라들에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이들이 넘쳐난다. 차라리 100일 동안 마늘과 쑥만 먹으며 동굴에 있으면 사람이라고 인정해줬던 옛날 옛적의 방법이 더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유구하고 찌질한 여성 혐오의 역사

시대를 막론하고 여성혐오는 울려 퍼졌지만, 그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이유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실제적인 이유라기보다는 그때그때 남성들이 중요시하던 가치의 반대쪽에 여성을 가져다 놓는 식이다. 신체의 강인함이 중시되면 여성의 연약함이 도마 위에 올랐고, 지성이 중시되면 여성은 선천적으로 어리석다는 주장이 과학적인 사실이라며 공표되었다.

고행과 금욕이 중시되면 여성이 여염집 남자들을 꾀어낸다고 난리를 치다가, 욕망과 쾌락이 유행하자 여자들은 보수적이라고 공격을 당했다. 어쨌거나 이 모든 여성혐오의 목적이자 기능은 같다. 여성을 사회의 중요한 일들에서 배제하고, 그들을 종속적인 상태에 가두는 것이었다.

이 유구하고 찌질한 역사를 모두 열거하는 것은 백과사전으로 만들어도 부족할 일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아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국에서 태어난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오늘날 한국남자들 앞에 닥쳐온 멸종 가능성에 대해서 굉장히 논리적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한국남자에게 닥칠 멸종 가능성 

이 글을 쓰는 데에는 한국남자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페미니즘의 ‘ㅍ’자도 들어갈 필요가 없다. 사실 요즈음의 여성혐오는, 페미니즘의 수많은 입장과 관점들이 개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단순하다.

이를 위해 작동하고 있는 ‘메갤’1의 생성 이유나 논리 또한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다. 한 줄로도 말할 수 있다. 여성혐오적인 표현이나 관행을 멈추라는 것이다.

João Carlos Magagnin, triton summer, CC BY https://flic.kr/p/72ffBE

João Carlos Magagnin, “triton summer”, CC BY

그래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남 간의 평등을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을 비롯하여 수많은 법과 제도로 양성평등이 명문화되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더치페이에 목숨을 거는 웹상의 남자들조차 양성평등 그 자체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요컨대 양성이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적어도 민주주의(혹은 사회주의)를 자신의 정치체제로 받아들인 집단에서는 반드시 지향해야 할 가치이자, 사회의 기반이 되는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알아서 이루어졌을 리는 없고, 수많은 여성의 길고 격렬한 투쟁이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것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부분이다.

인터넷 청년세대 ‘여혐’의 특징 ‘딱지붙이기’

본격적인 멸종 시나리오를 살펴보기에 앞서, 오늘날 문제시되는 여성혐오의 성격을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여성혐오는 그 이전 세대와는 양상이 좀 다르다. 가령 과거의 여성혐오는 여성을 온전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성적인 대상으로서만 여성을 인식하며, 힘과 능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무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고전적인 마초이즘은 여성을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데, 여성과 싸운다는 것은 남성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옛날이라고 해서 뛰어난 여자들이 없었을 리도 만무하고, 마초들이 그런 여성들을 상대로 추잡한 싸움을 벌이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과거 여성혐오의 핵심은 내가 우위에 있다는 감각과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반면 웹을 중심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여성혐오, 오늘날의 여성혐오는 된장녀, 김여사, 보슬아치, 김치녀 같은 딱지 붙이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최초에 이들의 사고 속에 등장한 된장녀는 사치와 허영을 부리는 여성이다. 이들은 밥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고 명품을 좋아하며, 남자에게 비싼 음식이나 물건을 뜯어내려고 하는 여자다.

“빼애애애액”의 해부, 그들은 진심으로 억울하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된장녀에 대한 남자들의 반감의 핵심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물질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성관계를 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지점에 있다. 된장녀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외제 차를 탄 남자가 나타나서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끝난다.

남자들은 그 외제차를 탄 남자가 아니라 나에게 비싼 밥을 얻어먹고 아무것도 ‘주지 않고’ 사라진 여자들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남자들은 마치 자판기가 돈을 먹은 것같이 행동하면서, 이 서사에서 ‘순진한 피해자’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진심으로 억울해한다.

Photcapy, "Marked Woman" (CC BY-SA 2.0)

Photcapy, “Marked Woman”, CC BY-SA 2.0

억울함이야말로 오늘날의 여성혐오가 가지고 있는 특징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생겨난다. 하지만 여성혐오자들이 대체 무엇이 억울한지를 알기는 어렵다. 무엇이 부당하단 말인가? 비싼 밥을 사주면 반드시 섹스를 해야 한다거나, 고백을 하면 반드시 받아줘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애초에 돈을 쓰면 대가로 섹스를 얻는다는 공식은 일방적으로 남자들의 뇌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것이 무슨 공리라도 되는 양 신봉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세계 안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는 것을 억울해하며, 심지어 그 탓을 여자들에게 돌린다. 따지고 보면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 여성 혐오의 목적은 일종의 가격협상 같은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너의 가격이 너무 비싸니 ‘된장녀’니 ‘보슬아치’니 ‘김치녀’ 같은 명칭을 붙여가며 너의 가치를 떨어뜨리겠다는 것이다.

내게는 너무나도 억울한 사회, 여성에게 관대하다?

남자들의 억울함은 이런 성적인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이 과거보다는 양성평등을 이룩해 나가고 있는 것이 남자들은 너무 억울하다. 여자들이 학교에서 공부도 더 잘하고, 생리휴가도 있고, 지하철과 주차장에는 전용 칸도 있고, 군대도 안 가는데 너무 많은 것을 누리는 것만 같다.

남자들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이 시대의 아픔을 다 겪어내는 반면, 여자들의 삶은 너무나 쉬워 보인다. 게다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여성부와 여성단체들이 이런 불공정한 처사를 점점 확대하려 한다. 이것은 ‘역차별’이다. 우리 시대는 여성상위시대다. 그러므로 ‘피억압자’인 남자들은 이 불공정함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남자들은 역차별당하고 있다?

남자들은 역차별당하고 있다?

이 억울함은 그 가당치 않은 내용들을 제쳐두더라도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 수많은 지표가 입증하듯이, 생색내듯이 던져준 몇 가지 것들로 해결될 리가 없는 차별과 위협은 여성들의 삶 전체를 휘감고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그리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남자들은 이런 객관적이고 빤히 보이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고 어린애만도 못한 자신들의 주장을 근거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펼쳐놓는다.

이들의 행동은 무엇보다도 비열하다.

이들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가 아니라 만만한 상대를 찾아와서 패악질을 부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고단한 것은 헬조선의 대다수 거주자가 처한 현실이지만, 여성혐오자들은 자신보다 어려운 조건에 놓여있는 이들을 착취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하며, 약자행세를 함으로써 도덕적 우위까지 점하겠다는 날도둑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일부는 이들이 여성의 삶에 대해서 정말로 모르는(실은 관심 없다는 것에 가깝지만) 무지의 소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지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상처를 주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

K국 남자 멸종론

게다가 이제 세상은 변했다. 만약 이 황당한 억울함을 거두고 공존을 위한 혼신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남자들은 멸종할 것이다. 그 이유는 지극히 논리적이다. 먼저 과거의 결혼이 여성에게 어느 정도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었다면, 가족임금체계가 붕괴한 오늘날 남성 혼자 버는 돈으로 가정경제를 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오히려 기혼여성은 이기적이라며 욕을 먹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은 가사노동 대부분을 떠맡고 있다. 결국 여성은 결혼을 통해 오히려 비약적인 노동의 증가만을 얻게 된다. 게다가 한국의 결혼제도는 여전히 여성에게 지극히 불리해서, 이른바 ‘시월드’의 부담까지 한층 더해진다.

통계청 자료(2013)

통계청 자료(2013)

여기에다 출산과 육아에 매우 불합리한 국가제도와 기업의 인식 등은 그나마 결혼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아이에 대한 생각마저 싹 달아나게 한다. 이런데도 남자들은 빨리 결혼해서 부인이 해 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싶다거나, 결혼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말을 스스로 대견한 말이라도 하듯이 내뱉는다.

여성 입장에서는 비록 엄청난 임금차별이 있다고는 하지만, 혼자 일해서 혼자 살아가는 것이 결혼한 것과 비교하면 드는 비용과 에너지가 훨씬 적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할 불타오르는 사랑과 닥쳐올 시련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면 여성이 결혼을 택할 이유는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남자의 경쟁력

게다가 연애 상대로 한국남자가 적합한지도 따져볼 문제다. 가장 큰 장점이라면 말이 통한다는 정도인데, 한국말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의 문제다. 예쁜 옷을 입고 나갔더니 대뜸 ‘그렇게 비싸 보이는 옷을 입다니 넌 김치녀냐’고 묻는 이와 같은 언어권에 있다는 것에 어떤 이점이 있을까?

게다가 오죽하면 최근에 생겨난 신조어 중에는 ‘안전이별’이라는 말이 있다. 결별과정에서 스토킹, 개인적인 영상이나 사진 유출, 성폭행, 살해 같은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기에 생겨난 말이다. 멀쩡히 만나서 즐겁게 밥 잘 먹고 집에 간 남자친구가 ‘오늘 여자친구가 밥값을 안 냈으니 김치녀인 것 같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거나, 좀 씻으라는 소리를 했다가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스릴을 연애과정에서 맛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한국남자를 만나지 않는다고 혼자서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는 넓고 남자는 많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남자들의 불리함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단순히 생존과 삶의 질이라는(목숨을 부지하고 삶의 질을 유지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측면에서만 따져도 한국여자가 한국남자를 만날 이유는 점점 줄어든다. 특히 한국남자들이 여성혐오에 열을 올리면 올릴수록 그렇다.

결국 여성혐오는 어떻게 따져도 좋은 전략이 아니다. 한국남성은 여성혐오를 통해서 여성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지만, 한국여성은 굳이 한국남성과 이런 돼먹지 못한, 실제로 목숨과 인생을 위협하는 게임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마치며: 찌질하고 외로운 멸망을 피하는 법

이 글에 다소간의 위악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을 모두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남자들이 하루빨리 여자를 똑같은 인간이자, 동료로서 인식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이런 일이 현실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여기서 교육이 중요해진다. 성에 대한 수치심이나 심어주는 성교육이 아니라, 모든 교육에 성(性)인지적인 관점이 포함되어야 한다. 또 사람을 함부로 차별해서는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 들이는 노력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다 큰 어른이라도 이 새로운 세상의 법도를 기꺼이 배워야만 한다.

성차별을 없애는 것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인류 절반의 삶에 대한 문제이자, 또 그들을 통해서 인류 전체가 얻었고, 얻게 될 것들에 대한 문제다. 이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남자들에게 남은 것은 찌질하고 외로운 멸망뿐이다.

이 글은  [오늘의 교육] 2015.11+12월호 vol.29에 게재되었습니다. 슬로우뉴스 원칙에 맞게 편집했습니다. (편집자)


  1. 디시인사이드의 메르스갤러리로부터 비롯된 여성혐오에 대해 반대하는 흐름, 현재 메갈리아 사이트로 독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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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최태섭
초대필자. 문화불평가.

성공회대에서 사회학박사과정을 밟고있다. 문화, 젠더, 계급, 노동에 관심이 있다. 장래희망은 먹고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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