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정치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대중을 상대하는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어느 날 갑자기 스타를 탄생시킬 때가 있다.
재능만으로도 돈만으로도 안 되는 ‘스타’
스타 만들기의 원리는 간단하다. 대중이 관심과 인기를 몰아주면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누구나 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깜찍한 아역 배우가 영화에 출연해서 인기를 끌면 그만이었다면, 지금은 아이를 영화배우로 키우고 싶어하는 극성스런 엄마들이 유치원에 가야 할 아이에게 연기수업을 시키고 할리우드로 이사해서 에이전트를 찾아다니는 세상이다.
과거에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자질만 있으면 되었다면, 이제는 자본이 필요한 세상이다. 유럽과 남미로 축구 조기유학을 보낼 자본이 없는, 혹은 그런 자본을 가져올 수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난 아이가 세계적인 축구 스타가 되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대중을 상대로 한다는 것과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미국 정치도 다르지 않다. 물론, 젭 부시를 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많은 돈을 부어도 재능이 없으면 스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재능이 있어도 돈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버락 오바마 실력과 재능만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다. 그의 실력이 돈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그런 시스템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미국 정치 시스템은 그렇게 돌아간다. 하지만 축구 꿈나무를 키워주기 위한 독지가들이 나오듯, 실력이 있는 정치가가 나타나면 돈이 따라붙는다.
폴 싱어의 루비오 지지, 그 엄청난 함의
세 번째 공화당 후보토론회에서 젭 부시와 정면대결해서 압승을 거둔 마르코 루비오가 공화당의 큰 손 기부자 폴 싱어의 공개지지를 받아냈다. 폴 싱어라는 이름이 낯설다면 그의 미들네임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엘리엇(Elliott).
그렇다. 지난봄 삼성물산의 이재용과 주주총회에서 일전을 벌였던 미국의 헤지펀드 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설립자 폴 엘리엇 싱어(Paul Elliott Singer, 1944~현재)가 루비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것이다.
부자가 그렇게 많은 나라에서 억만장자 하나가 지지 선언을 했다는 것이 그리 대단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싱어는 그냥 억만장자가 아니다. 그는 공화당 큰 손들 사이에서 오피니언 리더로 통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부자들이 어느 정치인에게 지갑을 열어야 할지 모를 때 ‘싱어가 지지하는 후보’는 일종의 보증수표다. 따라서 그가 지지한다는 것은 싱어에게서만 돈이 들어온다는 것이 아니라 덩달아 따라오는 많은 부자 후원자가 생긴다는 의미다.
싱어가 그렇게 오피니언 리더가 된 이유는 그가 코크 형제처럼 단일한 이슈 하나만을 가지고 맹목적, 전투적인 지지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슈를 저울질하고 공화당 내 다수의견과 달라도 소신 있는 지지를 선언하는, 뉘앙스가 있는 기부자이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 전국의 공화당 후보들에게 가장 많은 돈을 쓴 기부자이면서도 동성결혼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것을 봐도 그렇다. 그런 자신만의 시각이 주위 부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이다.
돛은 꺾이고 선원은 뛰어내리는 ‘젭 부시’호
그렇다 보니 폴 싱어는 당연히 모든 후보의 구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부시도 폴 싱어의 지지 선언을 끌어내기 위해 엄청나게 공을 들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부시가 세 번째 토론회를 말아먹은 후, 싱어가 루비오에 대한 공개지지를 선언했다. 물론 그런 선언이 한 번의 사건으로 결정된 건 아니고 오래 지켜본 결과라고는 하지만 부시 캠페인에서는 토론회와 무관하게 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틀 전에는 부시 캠페인을 지휘하던 COO가 사퇴를 선언했다. 근래 들어 지출 삭감을 선언하면서 직원들의 월급을 일제히 반 토막 냈는데, 1만2천 달러의 월급을 받던 그 COO는 남아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될 것 같으면 반 토막이 나더라도 붙어 있을 것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갈수록 요원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부시로서는 물이 새는 배에서 돛은 꺾이고, 선원마저 배에서 뛰어내리는데, 기다리던 공급선 하나가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가버린 형국이다.
공화당 강경파 vs. NBC
토론회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지난 토론회 얘기를 잠깐 해보자.
세 번째 공화당 후보토론회 여파가 만만치 않다. 공화당 판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방송사로도 불똥이 튀었다. NBC 방송국이 공화당으로부터 2월에 있을 후보토론회 중계권을 박탈당한 것.
미국의 토론회 중계는 본 선거와 경선이 다르다. 포맷이나 중계방식은 비슷해도 본 선거용 토론회는 한국이나 다른 나라들처럼 공익을 우선으로 결정되지만, 경선은 각 당내 행사로 취급되기 때문에 스포츠 빅 매치처럼 방송사와 각 당의 이익을 우선시해서 방송이 결정된다. 따라서 케이블 가입자가 아니면 볼 수 없도록 스트리밍을 막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세 번째 토론회 진행 및 중계권을 따낸 CNBC는 진행자를 세 명을 배치했다. 그중 한 명은 2012년 대선에서 텍사스 주지사 릭 페리의 “Oops”발언을 끌어내서 탈락시킨 존 하우드였다. 하지만 이들은 토론 주제인 경제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질문보다는 후보들의 발목을 잡고 궁지에 몰아넣는 질문들을 집중적으로 던지는 바람에 후보들의 항의는 물론, 방청객의 야유까지 받았다.
공화당은 토론회가 끝난 후 CNBC에 강력한 항의를 했고, 그런 항의에 그치지 않고 CNBC의 모회사 NBC가 주관하기로 한 2월의 토론회 중계권을 빼앗아버렸다. 정치권과 언론은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 악어새가 도를 넘으면 악어가 입을 다물면 그만이다. 하지만 공화당의 급격한 보수화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미국 언론과 그런 언론에 대한 공화당 강경파의 대결은 이번 조치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날개 단 루비오, 하지만 낙관은 금물
폴 싱어의 지지 선언으로 루비오는 날개를 달았다. 하지만 지나친 확대해석은 금물이다. 미국의 정치는 한국과 많이 다르다. 한국 정치의 향방이 바뀌는 것이 요트가 방향을 트는 것과 비슷하다면 미국은 유조선이다: 1) 바람의 영향이 크지 않고 2) 돌리는 데 시간과 돈이 든다.
하지만 루비오가 캠페인 성공을 작정했다면, 이제부터 남은 것은 시간 싸움이다. 다른 후보들은 돈도, 조직도, 이름(name recognition)도 있는데, 루비오는 모든 걸 한 번에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스타트업이 성공하는 방법과 비슷하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동안에 날개를 만들어 달고, 땅에 부딪히기 전에 날아올라야 한다.[footnote]물론 대부분 불가능한 일이다.[/footnote]
실력은 있는데 돈이 없고, 공화당을 주도하는 기득권 세력의 사랑을 받지 못한 루비오에게 싱어는 두 가지를 함께 가져다줄 수 있는 그런 지지세력이다. 그렇다면 싱어는 그런 루비오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루비오는 현대의 보수주의를 잘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재 공화당에서 소통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듣는 사람의 ‘머리’와 ‘가슴’ 둘 다에 어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루비오의 토론과 연설을 보면 그런 싱어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미국 대선을 구경하는 건 메이저리그의 경기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어차피 연고구단이 없는 메이저리그를 볼 때 마음에 드는 구단을 하나 정하듯, 미국 대선에서도 자기가 관심을 두는 후보 하나를 찍어두고 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지켜보면 훨씬 재미있어진다. 트럼프 구경하는 말초적인(?) 재미가 시들해질 무렵, 루비오가 진지한 재미를 선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한번 기대해볼 만하다.
이번 대선은 공화당도 민주당도 당초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네요
무난하게 힐러리 VS 젭 부시 구도를 점치는 예측이 주류였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