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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정치학: 사과를 망치는 세 가지 방식

유승민의 사과
신경숙의 사과
이재용의 사과
네네치킨 대표이사의 사과방문
문형표 복지부 장관의 사과
(…)

공인이라면 자신의 잘못에 관해 미디어를 통해 공개적으로 ‘제대로 사과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정치인의 사과 

‘정치인의 사과’는 그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조합입니다. 이름 좀 있다 하는 정치인이라면 한 번쯤 거치는 통과의례가 바로 ‘사과’입니다. 정치인은 나랏일을 올바르게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고, 공인으로서 사회에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지 책임이 따릅니다.

책임을 져버렸다는 비난 여론이 거세지면 정치인은 공개적인 사과 압박에 직면합니다. 부적절한 일의 파급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어떻게 사과하느냐’입니다. ‘사과’를 잘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비난 여론이 180도 돌아서기도 하고, 불같은 비난에 기름을 퍼붓는 격이 되기도 합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2012년 9월 24일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과 관련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 입은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출처: 박근혜 공식앨범) https://flic.kr/p/ddvXNV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2012년 9월 24일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과 관련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 입은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출처: 박근혜 공식앨범)

분명 정치인들이 사과한답시고 화면에 나오는데 이를 보는 대중은 ‘사과인 듯, 사과 아닌, 사과 같은’ 알쏭달쏭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정치인의 사과는 일반적인 사과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개 최대한 자기 책임을 회피하면서도 사과하는 모양새를 표출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의 사과입니다.

사과의 ‘타임라인’과 두 가지 차원 

“사과는 손상되기 전으로 관계를 되돌려놓는 방법이다.”
-UCLA 인류학자 조앤 실크

사과의 ‘타임라인’은 대부분 다음과 같습니다.

  • 대과거: A와 B는 좋은 관계였다.
  • 과거: 어느 시점에 A가 이 관계를 손상하는 일을 B에게 저질렀다.
  • 현재: A가 B에게 사과한다.
  • 미래: A와 B의 관계가 좋았던 때(대과거)로 회복하기를 원한다.

정치인의 사과에서 사과받는 대상 B는 국민일 수도 있고, 특정 정치인일 수도 있고, 지역주민일 수도 있고 다양합니다. 정치인 A가 B와의 관계를 손상했다면 이전의 관계로 회복하기 위해 취하는 것이 ‘사과’라는 매개 행위입니다.

사과는 두 가지 차원(two level)으로 작용합니다.

  1. 도덕적 차원: 잘못된 행위를 인정하고 후회를 표현한다.
  2. 사회적 차원: 상대방과의 관계를 개선한다.

유승민 사례 – 잘못은 없지만 해야 하니까 한다 

얼마 전(2015년 6월 26일) 큰 화제가 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사과를 살펴볼까요?

“우선 국민 여러분께 참으로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 (중략) 우리 박근혜 대통령께도 진심으로 죄송하단 말씀을 드린다. (중략) 박 대통령께도 거듭 죄송하단 말씀을 드린다. 박 대통령께서도 저희들에게 마음을 푸시고 마음을 열어주시길 기대한다.”

유승민 의원은 사과문에서 사과 대상을 국민과 박근혜 대통령으로 상정했지만, 주된 사과 대상은 박 대통령이었습니다. 유 의원은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로 있었을 때 비서실장을 맡을 만큼 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유 의원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박 대통령의 공약을 비판하고,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한 ‘괘씸죄’로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가 손상되자 공식적으로 거듭 사과를 표명합니다.

박 대통령은 유 의원의 사과를 받았지만, 이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친박 의원들이 움직여 결국 유승민 의원은 대표직에서 사퇴합니다. 이전 관계를 회복하길 원했던 유 의원의 사과는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인의 사과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인이 진정으로 죄송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사과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진정성이야 본인만 알겠지만, 정치인의 사과는 정황상, 여론상 사과를 할 수밖에 없어서 사과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유 의원도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자신을 직접 거론하며 비판 수위를 높였기 때문에 당내 여론상 사과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지요. 그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서 정말 죄송하고,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과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사과를 망치는 세 가지 방식 

정치적 상황에 의해 사과를 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은 그들만의 ‘사과 방식’이 있습니다. 나쁜 사과의 예이기도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주변 사람에게 이런 사과를 한다면 왕따를 당하기 십상일 겁니다. 사과의 의미를 약화하는 정치인의 사과방식을 살펴볼까요?

1. 가정법(IF)

“만약~했다면 사과한다.”의 조건문 형태의 사과는 책임을 상대편에게 전가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가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한다.”식의 사과는 기분 상한 쪽이 잘못이라는 은근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 나쁠 만한 사과이지요.

덧붙여 “혹시 누구라도”, “어떠한 식으로라도”와 같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모호하게 표현하는 사과는 가정법 사과와 비슷한 효과를 냅니다.

1992년에 상원의원 밥 팩우드(bob packwood)가 성추행 추문으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이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알려진 나의 행실에 대해서 사과한다. 그리고 나는 미안하다고 말한다.”
“I’m apologizing for the conduct that it was alleged that I did, and I say I am sorry.”

미안하다고 말했음에도 그는 자세하게 자신의 잘못을 말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의 모호한 사과로 인해 그는 의원직에서 사퇴하게 됩니다.

2. 사소하게 따지기(hairsplitting)

지미 카터 퍼블릭 도메인 잘못의 작은 부분에 대해서만 사과하고, 다른 큰 면들은 언급하지 않는 사과 방식을 말합니다. 잘못의 핵심사항을 모호하게 가리는 작용을 합니다. 2007년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책에서 자살 폭탄이 특정 상황에서는 합법적인 전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자 그는 브랜다이스 대학교 강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에 있는 모든 분에게 사과한다. 이는 내 입장에서는 하나의 실수였다.”
“I apologize to you personally, to everyone here…. it was a mistake on my part.”

사과를 단순한 실수로 격하시킵니다. 그러나 이 사과는 자살 테러에 대해 극심하게 반대하는 비평가들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난이 지속해서 일자 2009년에 “나의 모든 말 또는 나의 모든 행동”(“any words or deeds of mine”)에 대해 사과합니다.

3. 서술적 용법(predicative choice)

사과를 표현하는 말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우리나라만큼 사과 표현이 다양한 나라도 없지요.

  • 송구하다
  • 죄송스럽다
  • 유감이다
  • 책임을 깊이 통감한다
  • 후회한다 등이 있습니다.

제각기 다양한 뉘앙스를 풍기는 사과 표현이 존재합니다. 영어는 어떨까요.

  • apologize
  • regret
  • sorry 등이 있습니다.

‘apologize’는 책임을 수반하는 직접적인 사과 표현을 말합니다. 그러나 ‘regret, sorry’는 직접적인 책임 통감이 아닌, 자신의 정신 상태와 감정적 상황을 표현하는 암시적 사과에 불과합니다. 정치인이 어떤 서술어를 쓰느냐는 사과받는 사람의 기분을 좌지우지합니다.

빌 클린턴 퍼블릭 도메인 대표적인 예가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위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입니다. 그는 이에 대해 총 두 번 사과했습니다.

첫 번째 TV 사과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합니다.

“I misled people, including even my wife. I deeply regret that.”

‘apologize’ 대신 ‘regret’라는 표현을 썼죠. 피상적이고 무신경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과했던 백악관 조찬 기도 모임에서는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강한 어조로 상처 준 사람에게 “사과한다(apologize), 내 책임이다”라고 절절한 고해성사를 합니다.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상처를 입은 가족, 친구, 직원, 모니카 르위스킨와 가족, 그리고 미국 국민에게 일일이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진정으로 통감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에 함께 모임에 있었던 성직자들의 박수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두 번째 사과는 탄핵까지 갈 뻔했던 악화한 여론을 어느 정도 돌리는 데 성공합니다. 클린턴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과가 모든 사람에게 효과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두 번째 사과는 일반 대중이 아닌 일부 사람들에게만 한정된(closed) 사과였지만, 진정한 사과였기에 그 진정성이 일반 여론에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좋은 사과? 성공적인 사과의 요건 

그렇다면 정치인의 ‘성공적인 사과’는 어떤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할까요?

좋은 사과란 상처 받은 대상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좋은 사과는 조건문이어서는 안 되고, 변명해서도 안 됩니다. 타이밍도 매우 중요합니다. 대중에게 알려지기 전에 미리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즉시 해야 합니다. 담담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후회한다고 고백해야 하며, 앞으로 발전하는 모습 보이겠다는 포부도 얹어 주어야 합니다.

  •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 I’m sorry, what I did was wrong, and I won’t do it again.

sorry 사과 미안

 

변명과 책임회피, 죄의 부정은 사과의 효과를 손상한는 작용을 할 뿐입니다. 한국 정치를 돌이켜 보건대 국민이 정치인으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은 적은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정치적 사과의 요건을 갖춘 정치인의 사과는 많이 떠오르는데 ‘성공적인 사과’의 예는 잘 떠오르지 않네요.

책임지는 건 둘째 치고 정치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고 싶은 것.
그게 대한민국 국민의 소박한 희망 사항은 아닐까요?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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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필자, 사단법인 열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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