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영어교육을 몇 살부터 시켜야 좋을까요?
한국어 독서와 영어 독서 비율은요?
그래서 영어 어떻게 시켜야 하죠?
정답에 대한 조바심과 목마름
영어 교육 방법론을 이야기하기 위해 학부모를 만나면 결국 이런 질문으로 대화가 끝나곤 합니다. 해결하고 싶은 것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아이가 처한, 특수 상황인데, 그에 관한 질문은 추상적이기 짝이 없죠.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서 ‘정답’에 대한 목마름이 드러납니다. 조바심과 함께 말이죠.
과연 영어는 어떻게 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요? 저는 학부모께서 실망스러워할 만한 답을 들려줍니다.
‘정답은 없어요. 세상 아이들이 다 다르고 그 환경이 다 다른데 어떻게 정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정답은 없고 일련의 원리와 원칙이 있을 뿐이죠.’
며칠 전에도 영어 교육 상담 모임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책 읽기 이야기를 좀 해보죠.
‘행간 읽기’의 진짜 의미
먼저 영어로 책을 읽을 때 영어로 읽는다고 해서 ‘영어로만’ 읽는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사실은 영어로 책을 읽어도 우리의 지식체계와 경험 중에서 필요한 부분이 실시간으로 동원되거든요. 또 책을 읽는 것이 단어와 문법을 이해하는 수동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실제로는 굉장히 능동적인 활동이에요.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볼게요.
(1) 8월의 슬레이트 지붕 강의실
먼저 다음 문장을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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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 어느 날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어진 간이 강의실에 들어섰다. 에어컨은 작동하지 않았다. 강의는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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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문장이니 한국 상황이겠죠. 한국의 8월은 1년 중 가장 더운 달이고요. 8월의 슬레이트 지붕 강의실은 찜통입니다. 사실 제가 저 위에서 한국의 8월 날씨에 대해, 슬레이트라는 재료의 성질에 관해 이야기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이 정보들이 자동으로 활성화되죠. 이전 텍스트 중에서 적절한 정보가 실시간으로 동원되는 겁니다. 그리고 ‘두 시간의 강의가 남았다’는 문장이 들어오면 단지 글의 의미만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상황 전체가 눈에 그려져요. ‘멘붕이겠다’라고 화자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겠죠.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문자로 전달되지 않은 의미라 하더라도, 우리의 지식과 경험 중에서 필요한 정보가 자동으로 동원된다는 사실입니다. 영어 읽기건 한국어 읽기건 이런 과정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2) 노아의 방주와 타이타닉
예전에 한 샌드위치 가게 벽면에서 이 글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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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be afraid to try something new. Remember that a lone amateur built the Ark. A large group of professionals built the Titanic.”
새로운 시도를 결코 두려워하지 마라. 기억해야 할 것은 아마추어 하나가 노아의 방주를 지었지만 많은 프로가 달라붙어서 타이타닉호를 주조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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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믿건 안 믿고는 중요한 게 아니고요.
이 문장을 읽고 올바른 의미를 끌어내려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타이타닉 침몰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해요. 노아의 방주는 세상을 구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초호화 유람선은 침몰하고 말았죠.
이렇게 배경에 깔린 이야기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 문장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는데, 이건 영어와 한국어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를 알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한국어 독서냐 영어 독서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렇게 보면 영어로 글을 읽을 때라도 ‘영어로만’ 읽지 않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3) 여러 개의 [인사이드 아웃]
요즘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인기인데요. 발달심리학자가 본 [인사이드 아웃]과 일반인들이 본 [인사이드 아웃], 평범한 7세 아이가 본 [인사이드 아웃]은 과연 같은 애니메이션일까요?
이들이 절대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오는 캐릭터를 분석하고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행간 읽기’는 보통 ‘reading between the lines’라고 표현되는데요. 글쓴이가 이야기한 것 이외에 다른 정보들을 끌어내는 걸 말하는 거죠.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행간 읽기’는 ‘행간 쓰기'(writing between the lines)라고 해야 옳습니다. 진정한 독서는 저자가 이야기한 것을 ‘알아내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관점과 경험, 지식을 동원하여 빈칸에 자기 이야기를 ‘써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깊이 있는 독서를 행간 읽기(reading between the lines)가 아니라 행간 쓰기(writing between the lines)라고 표현합니다. 행간 쓰기는 흔히 말하는 ‘비판적 문해력(critical literacy)’의 기반이 되죠.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펜을 들고 쓰지 않는다뿐이지 매우 능동적인 쓰기 과정입니다.
영어 읽기와 삶 읽기 그리고 함께 행복하기
한국에서 한국어를 쓰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한국어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는 것이 빠를까요? 영어를 통해 쌓는 것이 빠를까요? 답은 자명합니다.
영어책을 잘 읽어야 하니 영어로만 책을 읽혀야 한다는 주장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영어책은 ‘영어’책이면서 동시에 ‘책’입니다. 영어를 알아야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단순한 해석만으로 깊이 이해할 수 없는 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책의 비중은 점점 높아지죠.
저는 영어를 잘하면 좋은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어보다 중요한 게 세상에 진짜 많아요. 아이가 공부하면서 자신과 타인을 과도하게 비교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 역할이 절대적이에요. 파닉스 좀 못한다, 독해 좀 안된다고 스스로 깎아내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 같아요.
비교를 안 하고 사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비교를 좀 덜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 방향을 조금 트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을 내몰지 않고 대화를 통해 공부하도록 하는 것, 그런 과정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면서 자기 삶을 돌아보고 함께 책임질 수 있는 주체로 커가는 것. 그런 것들이 영어 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부모도 아이도 행복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