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진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아마도 정부일 것입니다. 삼성서울병원에서 감염된 메르스 환자가 한국 전체 환자의 절반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방역은 정부의 책임이니까요. (실제로 삼성서울병원은 한국 최초의 메르스 환자를 진단해 냈습니다)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방역의 책임을 민간에게 떠넘길 수도 없고요.
하지만 청와대와 정부는 자꾸만 행정부의 수장인 박근혜 대통령은 잘못이 없다는 메시지를 내놓습니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 은근슬쩍 말이죠. 마치 추리 소설에서 범인이 뒤늦게 알리바이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를 적어봅니다.
박원순 시장의 정보 공개
“이제부터는 제가 방역대책본부장을 맡겠습니다.”
2015년 6월 4일 심야 기자회견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꺼낸 말입니다. 박원순 시장은 그 자리에서 환자의 동선을 공개하고 서울시에서 환자와 접촉이 의심되는 분들에게 연락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시계를 돌려보죠. 6월 3일 관계기관 회의에 참석했던 서울시 공무원이 35번째 메르스 확진 환자가 재개발 총회에 참석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그 사실을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에 알렸지만,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질병관리본부는 명단 확보를 하지 못했다고 하죠.
다행히 서울시는 재개발 총회 참석자 명단을 구하고 긴급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박원순 시장이 직접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연락했지만 역시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고 합니다. 서울시 내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이 갈렸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본 후 박원순 시장이 최종 결단을 했다고 합니다.
반면 2015년 5월 20일 한국 최초 메르스 환자가 확인된 이후로 정부는 6월 7일이 되기까지 정부는 정확한 정보를 숨겼습니다. 6월 1일과 6월 2일이 고비였습니다. 6월 1일에는 최초로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6월 2일에는 최초로 3차 감염이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정부와 방역 당국은 제대로 된 정보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박원순 시장의 긴급 발표는 정보를 제대로 알리지 못한 부분이 있는 등 잡음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정부를 움직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정부 역시 3일 후인 6월 7일 “메르스 환자 발생 및 경우 병원 명단”을 공개했거든요. 물론 정부의 발표 자료는 오류투성이긴 했지만 뒤늦게라도 정보를 공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의미가 있죠.
사실은 대통령이 서울시장보다 먼저 지시했다?
“대통령께서도 지난 6월 3일 메르스 대응 민관합동 긴급점검회의에서 환자가 발생한 의료기관을 투명하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지시하셨고…”
최경환 국무총리 대행이 6월 7일 병원명을 공개하며 한 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6월 3일 정보 공개를 먼저 지시했다는 것이죠. 박근혜 대통령이 박원순 서울시장보다 하루 빨랐다는 겁니다.
즉, 박근혜 대통령이 6월 3일 지시했지만, 정부는 나흘 동안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국민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와중에 전염병을 막기 위한 대통령의 지시를 아무도 따르지 않았는데 징계를 받은 사람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신기한 건 이뿐만이 아닙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6월 4일 밤에 정보를 공개하자 6월 5일 청와대는 ‘서울시와 복지부가 긴밀히 협조해서 불안감이나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신중했으면 좋겠다’는 요지의 브리핑을 했죠.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시장이 나서서 정보를 공개하자 정부는 갑자기 운동 경기를 설명하는 해설자처럼 돌변하여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한 것입니다.
서울시장보다 하루 빠른 건 부족해. 사실은 더 빨랐어?!
“5월 20일 오전 8시쯤 보건복지부로부터 메르스 환자 발생 사실이 보고돼 고용복지수석비서관실이 상황을 최초 인지했다.”
“상황 인지 직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지시사항을 조치 받았다.”
“복지부의 대응상황을 종합해 당일 오후 대통령에게 (다시) 보고했다.”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이 7월 3일 밝힌 내용입니다.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당일 비서관실이 인지했고,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대통령이 지시사항을 조치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뭐였을까요? 청와대가 밝힌 내용으로는 이렇다고 합니다.
- 감염경로를 신속히 파악하고 추가 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방역조치를 실시할 것
- 국민들이 과도하게 불안해하지 않도록 방역당국의 조치사항과 메르스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제공할 것
https://twitter.com/sada69c59/status/616796840000786432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를 아무도 듣지 않는 정부라는 고백?
이쯤 되면 타임라인이 정말 이상해집니다. 청와대의 거듭된 해명을 적용해서 타임라인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box type=”info” head=”메르스 관련, 청와대와 정부의 해명이 사실이라면”]
- 5월 20일: 메르스 환자 발생.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정확한 정보 제공을 지시
- 5월 26일: 복지부 장관은 대통령 앞에서 최초 대면 보고
- 6월 1일: 최초 사망자 발생
- 6월 2일: 3차 감염자 발생
- 6월 3일: 대통령이 지시한 지 14일이 지났으나 아무도 말을 듣지 않자 대통령이 다시 정보 공개하라고 요구. 역시 누구도 말을 듣지 않음
- 6월 4일: 박원순 서울시장, 긴급 발표
- 6월 5일: 16일간 대통령 지시를 시행하지 않은 청와대가 대통령 지시사항과 같은 맥락의 일을 한 박원순의 정보 공개를 비난
- 6월 5일: (대통령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정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국립중앙의료원에 방문
- 6월 6일: 17일간 대통령 지시를 시행한 사람이 아무도 없음. 대통령은 자신의 지시를 아무도 시행하지 않지만, 별도의 언급 없음.
- 6월 7일: (대통령 지시 후 18일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최경환 국무총리 대행, 국민에게 정보 공개
[/box]
대통령이나 청와대 참모, 정부는 모든 일에 완벽할 수 없습니다. 가벼운 실수부터 치명적인 실수까지 일을 잘못 수행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세한 정보가 사라질 즈음에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어. 몰랐던 건 아냐.”라고 말하는 건 마치 거짓 알리바이를 내세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국회법과 관련하여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직접 강한 어조로 불만을 쏟아낸 것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지 않으면 다시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정치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폭발하면서 국무회의가 "오싹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http://t.co/tCXKxSiAI7 pic.twitter.com/UmanwRfgtP
— 한겨레 (@hanitweet) June 25, 2015
만약 청와대의 거듭된 해명이 사실이라면, 나라에 전염병이 돌고 국민이 죽어가는 마당에 대통령이 지시를 내려도 정부에는 그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이 없으며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정부와 청와대는 국민들에게 겨우 이런 말을 전하는 조직이라는 걸 뜻합니다.
“아! 사실은 처음부터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고, 대통령도 그에 합당한 지시를 내렸어! (그런데 정부는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지만, 처벌도 없었고 대통령도 별말 하지 않았어!)“
아무도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정부는 그 불통의 프로세스에 관한 어떠한 개선사항도 내놓지도 않고 지나간 일에 해명만 정부라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사실 메르스가 한국에 들어올지 청와대와 대통령은 5월 20일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 백신도 개발하라고 5월 20일 전부터 지시했었어. (그런데 아무도 대통령 말을 듣지 않았어. 그러니 대통령 잘못은 없어.)
유승민과 같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승마협회 비리 사건 조사 지시 후 (승마선수인 정윤회 딸래미의 경기 심판 경찰조사 사건으로 정윤회의 막강파워에 말이 많았지) 문화부 과장까지도 박근혜가 메모했다가 직접 찍어냈다는 예전 기사를 떠올리면 이 기사의 사실이 뭔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최고 존엄은 한 점 오류도 없어야 한다는 거지. 불행하게도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