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표절 의혹과 관련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시인 김상. 그는 신경숙과 동년배이고,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동기였다. 아니 그는 시인이라기보다 필경사(筆耕士; 글씨를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좋은 글이 있으면 항상 손으로 옮겨적었다. 그가 그렇게 옮겨적은 글이 담긴 수첩과 대학노트가 30여 권이 넘었다. 그의 행동은 흔히 ‘필사’라고 부르는 문학지망생이 좋은 글을 쓰는 훈련법으로 학교에서 권장됐다.
김상 시인은 개인적 사정으로 학교를 쉬었다가 10년 뒤 재입학해 나와 함께 98년도에 문예창작과를 다녔다. 올려다보이지도 않는 대선배지만, 그냥 동네 형처럼 우리에게 대해줬다. 그 시절 그는 시도 쓰고 소설도 썼었다. 교내 문학상인 예장문학상 소설 부문에 당선된 뒤에도 나이 들어서 후배의 것을 가로챘다는 마음이 든다며 부끄러워했다.
신경숙은 대하소설 ‘토지’를 필사했다고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그녀의 서정적 문장이 필사를 통해 완성됐다는 얘기에 몇몇 학생이 학기 초에 필사를 시도했으나 학기 중간에 때려치웠다. 그만큼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나도 그랬다. 당시 ‘동문회의 밤’이라는 행사가 가을에 있었다. 등단한 문예창작과 출신 선배들에 모교에 찾아와 낭송회를 여는 행사였다.
“신도리코도 와?”
그날 행사에 소설가 신경숙 선배가 온다는 얘기에 김상 시인이 이죽거렸다. 나는 그의 비아냥이 못마땅해서 심하게 대들었다. 형이 신경숙 선배만큼 못 쓰니까 배 아픈 것은 알겠는데 흉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그에게 말했다. 김상 시인은 술을 마시다말고 자취방에 나를 데려갔다.
3면 벽을 책으로 둘러싼 자취방에서 김상 시인은 내게 신경숙의 소설과 다른 작가의 소설들을 번갈아 비교해 보여줬다. 신경숙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몇몇 동문의 시와 소설을 보여주고 비슷한 구절이 적힌 다른 책들도 보여줬다.
김상 시인은 수첩에다 표절을 필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하늘 같은 대선배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그가 싫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김상 시인에게 억울하면 형도 베끼라고 화를 내며 나는 자취방에서 나와버렸다. 나는 그 뒤로 자연스럽게 그와 멀어졌고 연락이 끊겼다. 물론 나는 더는 학교에도 나가지 않았다.
작년 2014년 9월, 김상 시인이 숨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연락이 끊긴 사이에 그가 어디로 등단했는지 모르겠지만, ‘시인’이라는 직함을 달았다. 또한, 길거리 행인들 싸움을 말리다가 잘못 넘어져 하반신 마비로 5년 전부터 고생하던 중에 암에 걸려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사망했다.
장례식장에는 A4용지에 출력한 그의 시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몇몇 편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X랄 같이 못 썼네’라고 중얼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그는 아름다운 문장을 수도 없이 알았지만, 그것을 베낄 만큼 부도덕이 없어서 못나고 서툰 시 몇 편을 남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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