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내 주변에 비슷한 게 뭐가 있지?’
집에 돌아와 보니 철제 2층 침대가 눈에 띄었다. 폭과 길이 대략 80cm와 2m. 크기도 비슷하고 특히 안전난간대가 영화 속 ‘엄마’ 배를 꽉 누르고 있던 쇠막대와 닮았다.
‘체험을 해보자’는 충동이 일었다. 준비는 간단했다. 자기 전, 다음 날 세 끼 음식과 먹을 물, 공책과 펜, 책 한 권을 머리맡에 두는 게 전부였다. 실제 ‘그곳’과는 비할 바 없이 안락하고 풍족한 환경이었지만 밀폐된 공간에 온종일 감금돼 책을 보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셀프 감금, 12시간 체험 시작
(오전) 7:00 기상. 지금부터 12시간 침대 위에만 있어야 한다. 예외는 오직 화장실. ‘그곳’에서라면 화장실을 위한 이탈도 허용되지 않지만, 거기까진 자신이 없다. 갈증을 느껴 물 한 모금을 마시지만, 일부러 소량만 섭취한다.
8:20 고구마 두 개로 첫 식사. 세 끼로 계산해 고구마는 총 여섯 개다. ‘그곳’에선 같은 음식이 매일 대량의 항생제와 온갖 화학 약품과 섞여 나온다. 심지어 채식하는 이들에게 동족의 사체를 갈아 만든 고기를 주기도 한다. 그에 비하면 고구마와 물은 넘치는 축복이다.
8:29 소변을 참을 수 없어 화장실에 다녀왔다. 지체 없이 볼일만 보는 데 2분 소요.
생업과 관련한 전화를 무시할 수 없어 사실 휴대전화도 챙겼다. 하지만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은 불가. 벌써 손이 간질거린다. 내가 있는 방은 거실, 부엌과 마주한 출입문이 두 개지만 창문은 없다. 문을 모두 닫아 숨쉬기가 갑갑하다.
8:42 불과 체험 1시간 42분 만에 이런 생각을 했다.
‘오늘 하루가 빨리 갔으면…’
8:48 한 자리에 계속 있으니 눈앞에 사물을 자세히 보게 된다. 침대 프레임의 용접 부분에 흠이 있는 걸 발견했다.
11:18 두어 시간 잠들었다. 눈앞에 천장이 있고 실내 공기는 한층 더 탁해진 것 같다. 2층 침대에서 내려가 문을 활짝 열고 인터넷 등으로 관심을 돌리고 싶다. 하지만 ‘그곳’에선 미칠 듯 괴로운 현실을 잊게 해줄 열외 시간이나 장난감 따위 없음을 기억한다. “으아아아아아!” 비명.
11:28 공책에 답답한 마음을 적으면서 ‘그들’이 사람의 글을 알고 쓸 수 있다면 ‘안네의 일기’보다 더 슬픈 명작이 여럿 나왔을 거란 생각을 한다. ‘얼른 화장실이라도 급해졌으면’ 또 생각한다.
화장실과 관련해 ‘그곳’에선 이미 말했듯 용변을 보기 위한 이동은 없다. 그냥 먹고 자는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한다. 미동조차 힘든 공간에서 조준을 잘못하면 자신의 똥과 오줌 위에서 다시 먹고 자는 수밖에 없다. ‘아파트 형태의 그곳’은 항시 위층 사는 이웃의 오물을 온몸에 덮어쓰고 아래층 이웃에겐 자신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오후) 12:05 두 번째 점심. 역시 고구마 두 개. 물 몇 모금. 십 분이 채 안 돼 식사를 끝내고 ‘배는 부른데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1:01 읽고 있는 책에 나오는 동물들 그림을 그렸다. 덕분에 1시간이 금세 갔다. 이것도 반칙에 속하지만 어쩌지 못한다. 5시간 57분 남았다.
2:00 또 잠들었다 깼다. ‘그곳’에 사는 이들은 악몽이면 좋을 참혹한 현실을 짧은 잠에서 깰 때마다 자각하겠지……
2:20 두피가 지끈거린다. 잠시 이 체험의 취지를 잊고 지금의 답답함과 지겨움에 집중했다. 씻지 못한 얼굴은 번들거리고 손에선 아침, 점심 연이어 먹은 고구마 냄새가 난다.
3:00 침대 주변 허공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다. 이만 체험을 멈추고 싶다! “뜨아아아아아!” 두 번째 비명. 4시간 남았다. 8시간이 지났음을 위안 삼으며.
3:47 방금 놀라운 생각을 했다. 이 지루한 체험이 끝나면 ‘치맥’이 먹고 싶다는. 습관이란 대단히 무서운 것임을 체감한다.
4:00 몸이 찌뿌드드해서 앉은 채로 체조를 했다. 두피 통증이 계속돼 머리를 벽에 대고 돌렸다. 양팔을 아래위로 들었다 올렸다 하기도 했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이와 흡사한 모습을 동물원에서 봤음이 기억난다.
5:15 주변이 쌀쌀해졌다. 담요를 덮고 누웠다. 어머니로부터의 전화. “지금은 통화할 수 없다.” 말씀드리고 끊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상당한 해방감이 든다. 머릿속이 먹먹하고 뒷목이 뻐근하다. 씻고 싶다.
5:47 심각한 심신에 대한 위협이나 고통 없이 다만 단조롭고 밀폐된 공간에 머무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래도 10시간이 지난 게 신기하다… 새삼 회의가 든다. 이런 시도가 누군가 ‘그곳’에 대해, 정확히는 그곳에 사는 ‘그들’에 대해 관심 두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까? 아니 나부터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까?
6:04 온종일 물과 고구마만 먹은 탓인지 배 안에서 개 우는 소리가 연거푸 난다.
7:00 종료.
(내가 침대에서 내려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모든 문을 활짝 열고 바깥 공기를 쐬는 것이었다.)
잡식가족의 딜레마 그리고 공장식 축산 반대 100만인 서명
내가 본 영화는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였다. 영화는 돈가스를 사랑한 황 감독과 그 가족들이 살아있는 돼지를 만나면서부터 겪는 좌충우돌 일상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고기도 한때 생명이 있었음을, 하물며 사람과 너무 많이 닮은 존재임을 또한 보여준다. 그런 그들이 매일 사는 ‘공장식 축산’의 참혹함도 더불어.
나의 12시간 체험 속 ‘그곳’은 바로 공장식 농가를 의미했다. 철제침대의 난간대는 영화 속에서 새끼들에 젖을 물리는 어미 배를 짓눌렀던 스톨의 쇠막대와 비슷했다. 공장식 농가의 돼지들은 꼼짝하기도 어려운 폭 60cm, 길이 2m 쇠로 된 스톨에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살고, 닭들은 아파트 모양의 배터리 케이지 속 A4 용지 2/3 크기만 한 데서 매일 산다.
물론 나의 체험은 실제 동물의 참담한 삶에는 십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보잘것없는 경험 속에서도 괴로움을 느꼈으니, 그것의 십만 배 고통은 어떠할지 상상해본 데 의의를 둔다. 더불어 공장식 축산의 실체를 알면서도, 이따금 모든 걸 잊고 그곳에서 살다 죽임당한 동물들을 먹고 마는 나의 이기(利己)를 돌아봄도.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생이별을 하고, 꼬리와 성기, 입을 마취 없이 잘리기도 하고, 죽는 날까지 미동조차 힘든 틀에 갇혀 살아야 하며, 건강이 안 좋거나 요건에 미달하면 탯줄도 떼기 전에 내동댕이쳐져 죽임당하거나 잡아먹히는, 죽는 순간까지도 산 채로 몸을 난자당하기도 하는. 이것은 절대 과장이나 오류가 없는 ‘공장식 축산’의 숨겨진 모습이다.
음지의 극소수 농가에서만 이러한 공장식 축산이 일어난다고 믿고 싶은가? 그 역시 절대 사실이 아니다. 공장식 축산은 근 백여 년 동안 전 세계의 보편적 동물 사육과 도축 방식이 되었으며, 한국 또한 1990년대부터 대규모 축산 농가 육성에 집중하면서 현재는 전체 농가의 99.9%가 이에 해당한다.
육식, 고기를 먹는 것 자체는 절대 죄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을 경시하고 그들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분명 죄다. 때마침 동물보호단체 카라와 녹색당 그리고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변호사들이 ‘공장식 축산 반대 100만인 서명’에 돌입했다.
부디 다시금 외면하지 말고 겁먹지도 말고 우리 안에 ‘잡식동물로서의 딜레마’를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공장식 축산이란 생지옥 안에서 한 마리의 동물이라도 살아나올 수 있게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을 이어가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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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 자체 감금 동안 읽은 책, 진 바우어의 [생추어리농장]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인간은 타자에게 감수성과 측은지심을 발휘할 무한한 능력을 가진 동시에, 타자의 감정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차가움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무관심과 잔인함으로 대하면 세상에 무관심과 잔인함이 퍼지고, 우리가 이해심과 따뜻함을 가지고 살아갈수록 세상에도 이해심과 따뜻함이 퍼져나간다.”
그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데 가장 위안이 됐던 건 책 속 동물들을 그리는 일이었다. 이 서툰 그림 속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공장식 농가에서 참혹한 삶을 살다 도축 직전에 기적처럼 탈출해 새 삶을 얻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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